2026.03.30 | 매일성경
●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17절)
오늘 본문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신 예수님께서 안나스의 뜰로 끌려가 심문받으시는 장면과 바깥뜰에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베드로의 비극적인 장면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12절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라고 합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죄인들이 잡아서 끌고 가는 아이러니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갑니다. 이 사람이 이 모든 일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자, 원래 대제사장이었던 인물로 당시 유대 종교 사회의 실세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14절은 가야바가 어떤 사람인지를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11:50절에 나왔던 말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후 사람들이 예수님께 열광하자, 예수님 한 사람을 죽여서 로마로부터 유대민족을 보호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속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가야바의 말이 실제로 “예수님 한 분의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는 과정으로 사용하십니다. 오늘 본문도 주님이 가시는 길이 바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안타가운 것은 대제사장들이 이런 일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하나님께 가까이 있어야 할 사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해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앞장서서 제거하려 합니다. 자기 욕심과 기득권에 눈이 멀 때 이런 비극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끌려가실 때,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사도 요한)이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도망하고 없습니다. 요한의 도움으로 대제사장의 뜰로 들어서는 베드로에게 문을 지키는 여종이 묻습니다. 17절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이때가 13:37절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했던 다짐을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님을 위해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피워 놓은 불 주위에서 불을 쬐었습니다.
“나는 아니라”는 대답이 25절에도 반복됩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셨던 예수님의 답변과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잡으러 온 무장 군대 앞에서도 세 번이나 당당하게 “내가 그니라”며 자신을 밝히셨습니다(18:5,6,8).
●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20절)
저자인 요한은 의도적으로 베드로의 부인 사건 한가운데에 예수님이 심문받으시는 장면을 샌드위치처럼 배치합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은 베드로가 아닌 당당하신 예수님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질문에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안나스가 예수님의 제자들과 교훈에 대해 심문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20-21절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내가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이 당당한 말씀에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예수님을 손으로 칩니다. 폭력으로 입을 막으려는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은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23절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만왕의 왕으로서의 거룩한 위엄을 잃지 않으시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당시 요한 공동체에게 큰 도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도 예수님과 같은 혹은 베드로와 같은 자리에 서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내가 그니라”하며 신앙을 인정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야할지, 아니면 베드로처럼 “나는 아니라”하며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할지 결정해야 할 순간들을 맞이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처럼 당당하게 선포하고 십자가의 길, 생명의 길, 영광의 길을 걸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어떤 대답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의 기득권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베드로처럼 행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직장과 세상 속에서 당당하게 우리의 믿음의 신분을 드러내지 못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위기와 손해 앞에서도 고난의 잔을 마시며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당당함을 본받읍시다. 삶의 현장에서 “내가 바로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선포하며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한 날이 됩시다.
2026.03.27 | 매일성경
●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절)
요한복음 13-16장까지 예수님의 긴 ‘고별 설교’가 끝이 났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불과 몇 시간 뒤면 사람들에게 끌려가 밤새 고문을 당하시고, 이튿날 아침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됩니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요한복음 17장 전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대속 사역을 앞두고 하나님께 직접 올려드린 ‘대제사장적 중보기도’이자 유일하고도 긴 실제 기도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과연 어떤 기도를 드리셨을까요?
예수님의 기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5절은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 6-19절은 남겨질 제자들을 위한 기도, 20-26절은 미래의 성도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1절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여기서 ‘때’는 바로 십자가를 지실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가 곧 ‘영화’라고 말씀하십니다. 1-5절에 ‘영화’라는 단어가 5번이나 반복됩니다(1,4,5). ‘영화’는 인간적인 출세나 성공이 아니라 철저한 희생과 순종의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십자가는 수치와 실패로 보이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기에, 그 죽음의 자리가 곧 아들의 영광이요 아버지의 영광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이 영광입니다.
십자가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은 창세 전부터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은 이 영생의 본질을 명확히 정의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원래 어떤 존재였으며, 죄로 인한 결과가 무엇이고, 그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일들을 알고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의 영생은 죽어서 누리는 영생이 아닌 예수님을 믿을 때 주어지는 영생을 의미합니다. 즉 믿는 자들은 이미 영생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얼마를 주면 살 수 있을까요? 천하의 그 어떤 재물과 가치로도 결코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우리에게 이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많은 문제로 아파하고 낙심할 때가 많지만, 이 구원의 은혜 한 가지만 기억해도 우리는 평생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 “내가 비옵는 것은 …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9절)
예수님은 이제 시선을 돌려,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고통보다, 거친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에 대한 마음이 훨씬 더 애타고 안타까우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속에는 제자들을 비롯한 이 시대 성도들이 꼭 기억해야 할 정체성이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것’, ‘아버지의 말씀’이 핵심입니다. 제자들은 세상 중에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들이며, 본래 “아버지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고, 아버지의 ‘말씀’을 주셨으며, 제자들은 그 말씀을 지키고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구원자이심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9절에서 파격적인 기도를 올리십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우리 주님의 관심과 중보는 오직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즉 주님의 제자요 성도인 바로 ‘우리’를 향해 집중되어 있습니다. 온 우주의 창조주께서 나를 ‘아버지의 소유’로 지명하여 불러주시고, 세상 한가운데서 나를 눈동자처럼 주목하시며 기도해 주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로와 감격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처한 현실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예수님은 떠나가시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악한 세상 한가운데 남겨져야 합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셨기에 세상은 제자들을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제자들도 더 이상 어둠의 세상에 속하지 않은 빛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14절).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말씀대로 정직하게, 희생하며 살려고 몸부림칠 때 세상은 우리를 환영하기보다 오히려 미워하고 핍박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차라리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빨리 벗어나 주님이 계신 천국으로 가고 싶다는 도피적인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15절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핍박받는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뜻은 우리가 이 치열하고 적대적인 세상 한복판에 서서, 그곳에서 악한 사탄의 권세에 타협하거나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내는, 즉 보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절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는 말씀처럼 하나됨을 이루는 것입니다. 세상의 핍박과 환난 속에서 흩어지지 않고 믿음의 공동체로 생명의 빛을 발하는 것, 그것이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영생을 선물로 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세상 속에서 고난을 당하고, 현실의 문제들이 우리를 흔들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들입니다. 험한 세상 한가운데서 도피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진리의 말씀 안에 굳게 서서 서로 사랑으로 하나 되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거룩한 승리의 삶을 살아갑시다.
2026.03.26 | 매일성경
●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27절)
요한복음 13장부터 시작된 긴 고별 설교가 이제 막을 내립니다. 오늘 본문은 고별 설교의 결론부로서, 다가올 환난 앞에서도 제자들이 결코 무너지지 않도록 가장 강력한 확신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역시 수많은 염려와 불안이 가득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25절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영적으로 어린 제자들을 위해 여러 비유와 상징을 섞어 말씀하셨습니다. 어제 말씀의 해산하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때가 이르면”, 즉 십자가의 대속이 완성되고 성령이 오시는 그 날에는 모든 영적 진리가 명백하게 깨달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의 가장 큰 변화는 26-27절입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이 말씀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이지만, 구약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광에 감히 다가설 수 없었습니다. 희생 제물을 드리며 제사장을 통해 두려움 속에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직접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해주십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특권이고 영광인지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습니다.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어떤 대단한 권력자나 대통령과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만왕의 왕이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히’ 사랑해 주시고 우리의 작은 신음과 기도에도 귀 기울여 응답해 주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음이 특권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예배함이 특권입니다. 이 사랑 안에 거할 때, 세상이 주는 어떠한 근심과 염려도 이겨낼 수 있는 참된 평안이 시작됩니다.
●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33절)
예수님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난 제자들은 29-30절에서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라며 벅찬 확신을 쏟아냅니다. 제자들 스스로는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고, 자신들의 믿음이 굳건히 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제자들이 십자가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장담 앞에서 냉정한 현실을 예고하십니다. 31-32절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제자들은 당장 몇 시간 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로마 군병들을 피해 뿔뿔이 도망치고, 예수님을 철저히 배신하며 홀로 버려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목적은 그들의 연약함을 책망하거나 정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죽음과 제자들의 배신이라는 위기 앞에서도, 제자들이 당황하여 완전히 실족하지 않도록 미리 말씀해 주시는 주님의 배려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32절 하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제자들이 떠난 자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십니다. 함께 하신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피하도록 건져주시지 않고 고난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그 곁에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 예수님도, 아버지 하나님도 큰 아픔과 고통을 견디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고별 설교의 가장 핵심적인 결론을 선포하십니다. 33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요즘 뉴스만 보아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전쟁 소식이 끊이지 않는 혼돈의 세상입니다. 경제도 불안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평안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이런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세상 앞에 “담대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미 주님께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임금인 사탄의 권세를 십자가로 깨뜨리셨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도 주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이처럼 이미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기에, 세상이 흔들 수 없는 굳건한 ‘평안’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우리는 종종 눈앞의 고난과 삶의 무게 앞에서 제자들처럼 쉽게 근심하고 두려워합니다. 기억합시다.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친히 돌보시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이미 세상을 이기신 주님께서 ‘담대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하루 삶의 자리, 때론 버겁지만 주님께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으로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2026.03.25 | 매일성경
●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20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세상을 떠나신다는 말씀을 계속하시자, 제자들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이 끝이 아니며 부활과 성령이 오실 것을 약속하시지만, 제자들은 다가올 이별의 충격 때문에 깊은 혼란과 근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처럼 캄캄한 절망 속에 갇힌 제자들을 향해, 그리고 오늘날 고단한 삶의 문제로 근심하는 우리를 향해 주시는 위로와 기쁨의 약속입니다.
16절에서 예수님은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16-19절까지 “조금 있으면”이 7번이나 반복됩니다. 이 말로 인해 혼란이 생겼는데, 여기서 ‘조금 있으면’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때까지 남은 아주 짧은 기간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굳이 제자들을 이토록 혼란스럽게 만드시는 말씀을 미리 하시는 것일까요? 만약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일어날 영광스러운 부활과 성령 강림의 계획을 모른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직후에 “이제 다 끝났네”라며 깊은 실망감에 빠져 주님을 완전히 떠나버릴 위험성이 컸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제 끝났다”며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이 그렇게 무너지지 않도록,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며 그 뒤에 훨씬 더 놀라운 생명의 일들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미리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주님은 어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쉽게 풀어서 20절부터 설명하십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제자들은 곡하고 통곡할 것입니다. 반면 세상은 기뻐할 것입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런데 끝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됩니다.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21절 ‘해산하는 여인’의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는 뼈를 깎는 극심한 고통을 겪지만,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 그 새 생명의 기쁨 때문에 이전의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결코 실패나 절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활이라는 생명을 낳기 위한 거룩한 해산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시는 그 날, 제자들의 애통은 세상이 알 수도 없고 흉내 낼 수도 없는 영원한 기쁨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긴 부활의 기쁨을 맛본 자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22절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는 말씀처럼, 이 기쁨은 십자가를 통과한 자만이 누리는 완전한 기쁨입니다. 세상과 환경이 주는 평안이 아니라, 사망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흔들리지 않는 생명의 기쁨입니다.
●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24절)
이제 예수님은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기쁨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열쇠를 주십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23절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여기 ‘그 날’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약속하신 성령님이 오셔서 제자들 안에 거하시는 날입니다. 진리의 성령은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요14:26절). 그러니 예수님께 묻지 않습니다. 대신 기도합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이름으로”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완전한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24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구하면 주시고 기쁨을 충만케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아무 것이나 구하면 되는가? 아마 본문이 그런 말씀이라면, 즉 무엇을 구하든 주셨다면 우리 삶이 지금과는 다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성도들이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기도를 멈춥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구하라”고 하신 목적입니다. 요한복음의 전체 흐름 속에서 보면,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우리의 이기적인 탐욕이나 육신의 편안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로서 세상 속에서 주님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내 힘으로는 그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너무나도 쉽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엎드려 구할 때, 하나님 아버지는 반드시 그 기도를 들으시고 가장 완벽한 능력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내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내 연약함을 인정하며 내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사명을 채워달라고 구하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기도입니다.
우리는 종종 눈앞의 고난과 막막한 현실만 보고 “이제 끝났다”며 쉽게 근심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는 끝난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는 우리를 위해 예비된 더 크고 놀라운 기쁨의 아침, 곧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도 “조금만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주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구하는 성숙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갑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엎드려 담대히 구할 때, 세상의 어떤 환난도 빼앗을 수 없는 하늘의 충만한 기쁨과 주님의 길을 걸을 수 있는 능력이 가득하게 됩니다.
2026.03.24 | 매일성경
●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1절)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세상 속에서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서로 사랑하고 헌신하는 증인의 삶을 살면 세상이 우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미워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은, 세상의 거센 핍박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따르다가 ‘실족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왜 주님을 따르는 길에 이런 고난이 있으며,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이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야 하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 묵상해 보길 원합니다.
1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앞두신 주님은 제자들이 장차 겪게 될 핍박의 구체적인 실상을 숨기지 않고 알려주십니다. 사람들이 제자들을 유대교 회당에서 ‘출교’할 뿐만 아니라, 때가 이르면 제자들을 죽이는 자들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굳게 믿을 것이라는 무서운 예언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회당으로부터의 출교는 단순한 종교적 징계를 넘어 모든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는 사회적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자들은 자신들의 살인 행위가 이단자를 처단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는 거룩한 종교적 의무라고 확신한다는 겁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잘 알고,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하나님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이런 경고를 하시는 이유는, 제자들이 앞으로 닥칠 극심한 핍박 앞에서 혼란스러워하거나 믿음이 흔들려 ‘실족’하지 않게 하려는 주님의 세심한 배려입니다. 어떤 고난이나 환난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이상한 일로 여기지 않고 ‘아, 주님이 이미 말씀하신 당연한 일들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구나’라고 깨달아 그들이 꿋꿋이 주님의 십자가 길을 따라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감당할 때도 그렇습니다. 이미 성경은 그 길에 고난과 갈등, 시험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인내하며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삶이 제자의 길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막상 문제와 갈등을 만나면 흔들리고 분노합니다. 이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흔들림없이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5-7절)
이런 무서운 핍박이 예고된 가운데, 예수님은 5절에서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간다”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스승이 자신들을 떠나간다는 소식에 제자들의 마음에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과 근심이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7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선언하십니다. 보혜사 성령에 대해 같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십니다. 제자들이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성령께서 하시는 새로운 일을 소개합니다. 8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책망하다(엘렝케이)’라는 말은 단순히 꾸짖는다는 뜻을 넘어, 죄와 잘못을 폭로하여 빛으로 드러내고 유죄를 입증한다는 강력한 법정 용어입니다. 성령님은 박해하는 세상의 거짓된 재판을 무효화하시고, 참된 하늘의 재판을 여십니다.
첫째, ‘죄에 대하여’ 책망하십니다. 세상은 도덕적인 잘못만을 죄로 여기지만, 성령님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9절)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유일한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믿지 않는 불신앙이 가장 끔찍하고 근본적인 죄임을 명백히 폭로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의에 대하여’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의롭게 하십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닌 자기 의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자들을 책망하십니다. 셋째,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십니다. 십자가는 겉보기에 세상 권력의 승리 같았으나, 실상은 11절 “이 세상 임금(사탄)이 심판을 받았음이라”는 위대한 역전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은 아직 제자들에게 하실 말씀이 많았지만, 영적으로 어린 제자들은 그 깊은 십자가의 진리를 지금 다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님이 오시면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13절과 14절을 보면 성령님은 자의로(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직 들은 것을 말씀하시며, 장래 일을 알리시고, 무엇보다 “내(예수님) 영광을 나타내리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7절 하 “내가 그를 … 보내리니” 예수님께서 보내십니다. 그리고 14절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알리시겠음이라” 성령님은 오직 예수님을 증거하시고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오늘날 성령 충만을 빙자하여 말씀과 상관없는 기이한 현상에 집착하거나, 자신의 이기적인 영광을 좇는 일들이 교회 안팎에서 종종 일어납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령님의 사역은 철저히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끄시고,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며, 주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는 세상의 고난 앞에서도 자기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영광만을 선포하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길에는 우리의 상식과 이해를 뛰어넘는 고난과 문제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할 이 모든 환난을 이미 다 아시고, 우리가 실족하지 않도록 이 말씀을 미리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결코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보혜사 성령님’을 곁에 보내주셨습니다. 어지럽고 악한 세상 속에서 진리의 성령님만이 우리가 붙들어야 할 유일한 나침반입니다. 오늘 하루도 눈앞의 문제에 낙심하지 말고, 대신 내 안에 거하시는 보혜사 성령님께 온전히 내 삶을 의탁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구합시다.
2026.03.23 | 매일성경
●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19절)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18절부터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미워한다”, “박해한다”는 단어들이 계속해서 반복됩니다(18,19,20,23,24,25), 오늘 본문에만 ‘미워한다’는 말이 무려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서로 사랑하며 산다면, 세상 사람들도 우리를 칭찬하고 인정해 주어야 할 것 같은데 왜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18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바른 진리의 말씀으로 세상의 어둠과 죄악을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이들은 회개해야 하지만, 대신에 예수님을 미워하고 제거하려 합니다. 이것이 죄의 본성입니다.
19절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상 사람들은 ‘자기 편’을 정확하게 알아봅니다. 만약 어떤 성도가 교회는 다닌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세속적인 가치관과 타협하며 살아간다면 세상은 그를 절대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편으로 환영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 예수쟁이가 되어,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처럼 생각하며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게 살려고 몸부림친다면 어떻게 될까요? 세상은 그런 우리를 불편해하고 껄끄러워하며 결국 미워하고 박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이라는 어둠의 영역에 속하지 않고, 빛의 자녀로 살아갈 때 필연적으로 세상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께 제대로 속해 있다는 영광스러운 증거입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도 미움을 받고 십자가에 달리셨다면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고난을 겪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제자도의 길입니다.
●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22절)
그렇다면 세상이 이토록 진리를 거부하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적대하는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요? 21절은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고 하십니다. 이 중심에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잘 알고,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있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미워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적 맹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22절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죄를 핑계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만약 예배 중에 성도님들이 마음대로 나갔다 들어왔다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기준이 명확하지 않을 때는 그것이 잘못인지도 모르고 그냥 하던 대로 행동할 것입니다. 그것을 본받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회자인 제가 “지금부터 예배 시간에 함부로 이동하는 분은 벌금은 내야 합니다”라고 엄격한 ‘기준’을 세운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기준이 선포된 순간부터, 그 규칙을 어기는 행동은 분명한 잘못이 되고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죄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천국 복음의 ‘절대적인 기준’을 명확히 선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핑계할 수 없습니다. 믿지 않는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복음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받아들이고 믿으면 구원이요 생명이지만, 거절하고 외면한다면 심판입니다.
이토록 세상이 진리를 거부하고 미움과 박해가 가득한 세상에서, 남겨진 제자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저 침묵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놀라운 동역자를 약속하십니다. 26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주님이 보내실 ‘보혜사(파라클레토스)’ 성령님은 곁에서 우리를 도우시며 변호하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성령 충만은 단지 신비하고 기적적인 현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가장 핵심적인 사역은, 적대적인 세상 한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구원자이심을 당당히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7절은 제자들 역시 증언의 사명이 있다고 하십니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진리의 성령께서 일하실 때, 이 시대 우리 역시 그 증언의 사역에 동참해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2천 년 전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땅에서 시작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어떻게 머나먼 대한민국 땅까지 전해져서 오늘 우리가 영생을 누리게 되었습니까? 바로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세상의 미움과 죽음을 불사하며 복음을 ‘전했던’ 증언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증언하는 자가 없다면 세상은 결코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같은 가치관과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려 몸부림치다가 세상으로부터 차가운 시선과 미움을 받고 있습니까? 비록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지라도, 우리를 세상에서 택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그 십자가 은혜를 기억합시다. 일상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닮은 거룩한 행실로, 그리고 담대한 입술의 고백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살아있는 ‘증인’의 삶을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