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20 | 매일성경
●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16절)
지금 제자들은 굉장한 혼란과 두려움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3년 동안이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의지하며 따랐던 예수님께서 갑자기 어디론가 떠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목숨을 바쳐서라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없어지시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제자들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과 근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세상에 나 홀로 버려진 느낌, 주변에 사람은 많지만 내 편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막막함이 제자들을 짓눌렀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극심한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고단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위대한 약속과 따뜻한 처방전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15절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21절에서도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거듭 강조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계명 즉 주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어떤 자녀가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 제가 아버지를 너무 사랑합니다. 아버지를 위해 내 생명도 바칠 수 있어요!”라고 입버릇처럼 말은 하지만, 정작 아버지의 말씀은 하나도 듣지 않고 아버지가 가르쳐 준 것과 정반대로만 살아간다면, 그것을 진정으로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시더라도 제자들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의 증거는 곧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입술로만 사랑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묵묵히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힘과 결단만으로는 주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를 코앞에 두고 계시면서도 온통 제자들 걱정뿐이셨던 예수님은 우리의 이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16절에 이렇게 위대한 약속을 주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여기서 ‘보혜사’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인데, 그 의미는 ‘위로자, 보호자, 돕는 자’입니다. 세상 법정에서 곁에 서서 나를 대신해 변호해 주고 도와주는 대언자와 같은 뜻을 가집니다.
여기서 “다른 보혜사”라는 말은 “원래 보혜사”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원래 보혜사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떠나시면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셔도,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우리를 돕고 위로하며 영원히 함께하실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혜사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을 계속 하십니다.
그래서 17절은 이 보혜사 성령님을 “진리의 영”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보혜사로 성도들을 도우시는데 진리의 말씀으로 도우십니다. 그렇다면 성령충만은 곧 ‘말씀충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없는 신비, 혹은 예수님이 행하셨던 것과 다른 행동들은 결코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 속에 영원히 거하십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살아낼 수 없는 십자가의 길, 순종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지혜와 용기를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18절)
예수님은 18절에서 제자들의 가장 깊은 두려움을 어루만지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고아와 같다는 말은 세상의 거친 풍파 속에 보호자 없이 홀로 덩그러니 남겨져 어찌할 바를 모르는 우왕좌왕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부활을 통해 그리고 마침내 성령의 임재를 통해 다시 우리에게 찾아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보지 못하겠지만, 성도들은 다시 사신 예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20절의 말씀처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는 신비롭고 완전한 연합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우리 삶을 완벽하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놀라운 은혜의 날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눈앞의 위기나 고독 앞에서 내가 세상에 홀로 남겨진 고아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위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사, 우리 마음속에 내주하시며 영원토록 동행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살아갈 때, 신앙은 감정이 아니라 내 삶의 구체적인 ‘순종’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을 향해 기꺼이 손을 내밀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묵묵히 주님의 말씀을 지켜내는 것, 그것이 주님을 향한 우리의 가장 진실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오늘 하루도 내 곁에서 나를 변호하시고 도우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일상의 삶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아름답게 지켜내는 복된 제자의 길을 걸어갑시다.
2026.03.19 | 매일성경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6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만 해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머지않아 로마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큰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은 자신이 떠날 것이며 그곳에 제자들은 올 수 없다고 죽음을 암시하십니다. 의지의 대상이었던 주님이 떠나신다는 소식과 수제자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는 말씀 앞에, 제자들의 마음은 두려움과 근심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처럼 깊은 절망과 근심에 빠진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예수님은 불안에 떠는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온전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눈앞의 상황이 절망적으로 보이고 내가 기대했던 바가 무너지는 것 같아도,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또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굳게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앞날을 알지 못해서 불안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근심하지만 그 위에 더 아름다운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맡기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근심 많은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떠나시는 이유는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기 위함이 아닙니다. 2절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은 결국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기 위한 구원의 여정입니다. 여기서 “거할 곳”은 죽어서 가는 천국의 물리적 공간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더 분명한 것은 십자가 대속을 통해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며 머물 수 있는 영적인 자리를 의미합니다. 즉 주님과의 “완전한 연합과 사귐”을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 도마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5절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그런 도마를 향해 예수님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발견합니다. 목적지와 목적지에 도달하는 길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품에 안기기까지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적지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만이 ‘길’이 되신다고 선포하십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종교와 철학은 저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다고, 자신들이 진리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길을 안다”거나 “내가 진리를 가르쳐 주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곧 유일한 ‘길’이시며, 변하지 않는 ‘진리’이시고,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생명’ 그 자체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길’ 되신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 인생은 아무리 화려해도 방황할 뿐입니다.
●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8-11절)
도마의 질문에 대한 대답 끝에 예수님은 7절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하시며 예수님을 본 자가 곧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빌립이 질문합니다. 8절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기적과 가시적인 표적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본다면 더 이상 근심도, 의심도 없이 완벽하게 믿을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합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9절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은 본질상 하나님과 하나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하신 사역, 그리고 연약한 자들을 향한 긍휼과 사랑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과 뜻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참된 믿음은 하늘의 기적을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온전히 발견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앎’, ‘봄’, ‘믿음’이 반복됩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보다 예수님을 잘 알고, 주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 참된 믿음의 근거입니다. 눈에 보이는 신비가 아닌 이미 주어진 말씀을 붙잡고 묵상하며 순종하는 삶이 복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엄청난 특권을 약속하십니다. 12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연약한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사역을 완수하시고 아버지께로 가셔서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으셨던 육신의 예수님과 달리, 성령 충만을 받은 제자들을 통해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계와 열방으로 뻗어 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 위대한 사역을 위해 우리에게 주신 강력한 도구가 바로 ‘기도’입니다. 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우리는 근심과 불안에 갇혀있을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를 부르신 사명은 무엇인가?”를 깊이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내 이기적인 뜻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의 뜻과 목적에 합당하게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할 때, 주님께서 친히 응답하시고 놀라운 생명의 일을 이루십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근심과 걱정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환경이 내 기대와 다르게 흘러가고, 당장 내일의 앞길이 막막해 보일 때 우리는 제자들처럼 쉽게 절망하며 요동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위로하십니다.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굳게 믿고, 우리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합시다.
내 눈에 당장 길이 보이지 않아도,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위한 영원한 거처를 예비하시고 지금도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십시오. 주님이 부어주시는 하늘의 평안과 놀라운 응답을 풍성히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26.03.18 | 매일성경
●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31절)
예수님은 저녁 식사 중 제자들을 발을 씻겨 주셨고, 가룟 유다에게 떡을 건네주며 주님 품으로, 생명의 길로 초청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끝내 그 사랑을 거부하고 자기 욕망을 좇아 어두운 밤 속으로 나갔습니다. 이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 것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유다가 떠난 직후 시작됩니다. 이렇게 시작된 오늘 본문부터 17장까지를 예수님의 ‘고별 설교’라고 합니다. 죽음을 불과 몇 시간 앞둔 시점에서, 남겨질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쏟아내시는 장면입니다.
십자가의 참혹한 고통과 배신이 눈앞으로 다가온 이 순간,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우리의 상식을 뒤엎습니다. 31절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예수님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십자가의 죽음을 실패와 수치가 아니요, 도리어 ‘영광’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완성되는 자리이며,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최고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내어주는 그 십자가의 희생과 순종을 통해서만 참된 구원이 완성됩니다. 그래서 그 죽음의 자리가 곧 아들 예수의 영광이요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영광’은 무엇입니까? 어쩌면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남들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성공해서 세상의 박수를 받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보여주신 참된 영광은 세상의 영광과 다릅니다. 자신을 비우고 낮아져서, 타인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썩어지는 밀알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이 보여주신 영광입니다. 내가 죽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33절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다가올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혀 알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해 앞으로 이루어질 일들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34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가장 위대한 명령이 바로 34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구약에도 나오는 계명입니다. 레19:18절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부르실까요? 사랑의 ‘기준과 차원’이 완전히 새로워졌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네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를 뛰어 넘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가 사랑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제자들의 냄새나는 더러운 발을 손수 씻겨주셨고,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전부인 생명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나를 대적하고 원수 된 자를 위해서도 기꺼이 목숨을 내어주는 것, 남을 밟고 일어서는 세상의 방식을 버리고 종의 자리로 내려가 섬기는 것, 바로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서로를 대하라는 위대한 명령입니다.
그래서 35절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세상에 증명하는 방법은 우리가 얼마나 종교적인 지식이 많으냐, 혹은 얼마나 대단한 기적을 행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참된 표지는 오직 십자가를 닮은 ‘사랑’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많은 사람들이 혹독한 핍박 속에서도 교회로 나왔던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성도들은 전도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까?” 핍박 속에서도 교회와 성도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새 계명에 순종하여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8절)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뜻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시몬 베드로입니다. 그는 36절에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더니, “지금은 따라갈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발끈하여 이렇게 장담합니다. 37절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베드로의 이 호언장담은 결코 거짓말이나 위선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열정은 누구보다 뜨거웠고 진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 베드로의 열정이 얼마나 연약하고 한계가 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습니다. 38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의 문제는 십자가의 길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한 것입니다. 영광의 길을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간적인 의지와 결단력만으로 얼마든지 주님을 따를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제자의 길은 인간의 육신적인 열심과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힘을 의지했기에 처참하게 실패하고 주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부인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오직 십자가에서 완성된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때에만 걸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참담한 실패를 미리 예언하심으로써, 훗날 그가 자신의 연약함을 철저히 깨닫고 오직 십자가의 은혜만을 붙드는 참된 제자로 빚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영광을 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내 뜻을 꺾고 자기를 부인하여 생명을 살리는 십자가의 영광을 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이름이 높아지는 세상의 썩어질 영광에 목말라 있습니까?
오늘 하루, 우리를 위해 목숨 버리신 주님의 사랑을 묵상합시다. 그 사랑이 잣대가 되어, 내 곁에 있는 가족과 성도들, 그리고 이웃들의 허물을 덮어주고 기꺼이 발을 씻겨주는 섬김의 삶을 살아냅시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할 때, 비로소 세상은 우리를 통해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2026.03.17 | 매일성경
●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21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십자가의 의미와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감동적인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감동과 반대되는 예수님과 3년을 동고동락한 제자 가룟 유다의 배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자신이 택한 열두 명 중 한 사람이 자신을 배반할 것을 구약 성경 시41:9절을 인용하여 밝히십니다.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중동의 문화에서 누군가와 한 상에 둘러앉아 ‘떡을 떼어 함께 먹는다’는 것은 깊은 친밀함과 신뢰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토록 깊은 우정을 나눈 자가 ‘발꿈치를 든다’는 것은, 가장 믿고 사랑했던 사람에게 배반을 당하는 아픔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신을 몰라서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또한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충격적인 배신이 실제로 일어날 때 제자들이 혼란에 빠져 믿음을 포기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주님이심을 온전히 믿고 증거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0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선언하십니다. 다가올 동료의 배신으로 인해 제자들의 권위가 흔들릴 수 있는 상황 속에서 “너희는 여전히 내가 보낸 대리자요, 너희를 영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라고 그들의 신분과 복음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굳건히 세워주시는 내용입니다.
유다의 배신 앞에 에수님은 21절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라고 합니다. 그동안 요한복음은 가룟 유다의 배신을 암묵적으로만 기록했지만, 이제 주님은 제자들 앞에서 직접적으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폭탄 같은 선언을 하십니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깜짝 놀라 서로를 쳐다보며 의심합니다. 12명밖에 안 되는 소수 중에서 3년이나 가장 가까이서 동고동락했는데 배신자가 있다니, 그 배신자가 누구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유다는 철저히 자신의 탐욕을 위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웅성거릴 때, 한 제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 있었습니다. 예수님 품에 가장 가까이 기대어 앉아 있던 이 사람이 바로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입니다. 흥미롭게도 요한은 복음서 전체에서 자기 이름을 한 번도 쓰지 않고, 늘 자신을 “예수의 사랑하시는 자”라고 부릅니다. 이는 결코 교만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이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신 예수님의 그 벅찬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무한한 감격과 은혜의 고백입니다. 사도 요한은 평생을 그 사랑에 감격해서 살았다고 합니다. 요한에게 베드로가 머릿짓으로 과연 누가 예수님을 팔 자인지 물어보라고 합니다. 요한은 주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한 채 “주여 누구니이까”라고 묻습니다.
● “곧 나가니 밤이러라”(30절)
26절 예수님은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고 하시며 유다에게 떡을 주십니다. 떡을 적셔서 주셨다고 하는데 포도주에 적셔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떡’은 십자가에서 찢기실 예수님의 몸을 의미하고, ‘포도주’는 십자가에서 흘리실 주님의 보혈을 의미합니다. 이 장면을 통해 주님은 가룟 유다를 십자가의 자리로, 생명의 자리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사탄의 지배를 받는 어둠을 버리고 빛되신 주님께로 나오라는 겁니다. 세상의 탐욕을 좇지 말고 주님을 따르라고 부르십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은 가룟 유다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다가 그 사랑의 떡을 받는 순간, 사탄이 그의 속에 들어갑니다(27절). 그가 빛이신 주님의 마지막 사랑마저 거부하고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선택하자, 어둠의 세력이 그를 완전히 삼켜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27절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명하시자 유다는 조각을 받고 곧 밖으로 나갑니다. 사도 요한은 유다의 퇴장을 이렇게 짧게 묘사합니다. 30절 하 “곧 나가니 밤이러라” 여기서 ‘밤’은 단순히 해가 져서 어두워진 시간적 배경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빛이신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난 자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캄캄한 어둠인지를 보여주며, 사탄이 지배하는 십자가의 짙은 어둠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식탁에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두 제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어 그분의 사랑을 충만히 누리는 ‘사도 요한’과, 3년이나 예수님 곁에 머물렀으면서도 결국 자기 욕심을 이기지 못해 영원한 어둠 속으로 뛰쳐나간 ‘가룟 유다’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며 몸은 주님 곁에 가장 가까이 있을지 몰라도, 마음으로는 주님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육신적인 가까움이 아니라, 마음의 친밀함입니다. 오늘 하루, 내 안의 이기적인 욕망과 어둠을 십자가 앞에 모두 내려놓읍시다. 사도 요한처럼 기도와 묵상으로 주님의 품에 깊이 안겨 그 크신 사랑에 감격합시다. 나를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그 깊은 사랑을 세상에 증거하며, 밤이 아닌 생명의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그리고 이 생명의 복음ㅇ르 전하는 복된 삶이 됩시다.
2026.03.16 | 매일성경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절)
요한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2장까지는 표적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신 ‘표적의 책’입니다. 그리고 13-21장까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통해 진정한 생명과 영광을 나타내시는 ‘영광의 책’입니다. 오늘 본문인 13장은 그 두 번째 부분, 곧 십자가를 향한 발걸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중요한 장입니다.
유월절을 앞두고 죽음이 점점 가까워 오고 있는 가운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겨 주십니다. 예수님은 왜 갑자기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을까요? 그리고 그 행동 속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즉 십자가를 지실 ‘때’가 왔음을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다가올 십자가의 끔찍한 고통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단절이라는 무서운 짐을 앞두고 있다면, 보통의 사람들은 자기 연민과 자기 사랑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온통 이 땅에 남겨질 제자들을 향해 있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끝까지’라는 말은 시간적으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셨다는 뜻이며, 질적으로는 자신의 생명과 모든 것을 온전히 내어주기까지 완벽하게 사랑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십자가의 끝없는 사랑입니다. 죽음도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이 다름아닌 제자 가룟유다의 배신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겁니다. 가룟 유다는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생명의 말씀을 듣고 표적을 보았지만, 그의 마음 중심에는 언제나 자신의 욕망과 이기적인 계산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빛이신 예수님을 팔아넘길 무서운 계획을 품고 이 식탁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가룟유다의 발도 씻어주십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난 예수님은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십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하나하나 씻기시고 두르신 수건으로 닦아 주십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남의 발을 씻기는 일은 집안의 종들 중에서도 가장 천한 노예들이나 하는 일이었습니다.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가장 낮은 종의 자리로 내려가셨습니다.
이 행동은 다가올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본문에 반복되는 단어가 ‘씻다’입니다(5,6,8,9,10). 그리고 ‘씻다’가 ‘깨끗하다’로 이어집니다(10,11).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냄새 나는 발을 씻기신 것’은 십자가에서 흘리실 보혈로 우리의 모든 추악한 죄와 허물을 영원히 씻어주시고 깨끗케 하실 것을 보여줍니다. 지금은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에 이해하고 십자가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차례가 되자 완강히 거부합니다. 어떻게 감히 주님이요 스승이신 분이 비천한 제자의 발을 씻길 수 있겠느냐는 인간적인 상식에서 나온 반응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주 단호하게 대답하십니다. 8절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만약 세족식이 그저 겸손과 봉사의 미덕을 가르치기 위한 단순한 윤리적 교육이었다면, 씻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자가 된다는 무서운 선언을 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씻기심은 곧 ‘십자가 보혈을 통한 대속’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윤리적이고 예의 바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그 죄를 씻음 받지 못한다면 그는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어둠의 존재, 구원받지 못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신앙은 전적으로 나를 낮추어 주님의 십자가 은혜 아래 나를 온전히 내어 맡기고 그 피로 씻음을 받는 것입니다.
●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14절)
모든 제자의 발을 씻기신 후, 예수님은 자리에 앉아 발을 씻어주신 또 다른 의미를 말씀하십니다. 14-15절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십자가의 은혜로 죄 씻음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 우리 역시, 이 땅에서 형제와 자매의 발을 씻어주는 삶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서로의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다른 사람의 허물과 약점, 실수와 죄악을 들추어내어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의 사랑으로 덮어주고 용서하며 끝까지 품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은 남의 약점을 밟고 올라서야 내가 높아진다고 가르치지만, 주님의 나라에서는 서로 낮아져서 발을 닦아줄 때 비로소 진정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대접받고 섬김을 받으려는 세속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주님이 친히 가신 그 십자가의 길, 겸손과 섬김의 길을 걸어가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마주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의 모든 더러움과 연약함, 심지어 내 안에 숨겨진 배신의 본성까지 다 아시면서도 끝까지 십자가로 나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입은 자로서,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며, 예수님처럼 내 곁에 있는 지체들의 냄새나는 발을 기꺼이 씻어주는 참된 제자가 됩시다.
2026.03.13 | 매일성경
●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24-26절)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십니다. 세상의 왕들처럼 크고 멋진 군마를 타신 것이 아니라, 가장 초라한 어린 나귀 새끼를 타시고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들어오십니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열광했고, 이 엄청난 환호 앞에 종교 지도자들은 19절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라며 탄식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들의 탄식처럼,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인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이들의 방문을 기점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 곧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선포하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헬라인들은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왔다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이야기와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보면서 간절한 만남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헬라인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이 독특합니다. 23절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하십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때가 되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고난의 시간, 그리고 부활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헬라인들(이방인)이 자신을 찾아오는 것을 보시며,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온 세상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께서 십자가를 지실 그 ‘결정적인 시간’이 도달했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진리이자 역설을 ‘밀알의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십니다.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세상의 원리는 어떻게든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자기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높아지고, 움켜쥐고, 자기를 확장하는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정반대입니다. 스스로 땅에 떨어져 자아를 부인하고 완전히 썩어지는 ‘죽음’을 통해서만 비로소 수많은 생명을 살려냅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 원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25-26절을 보면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런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신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자기를 높이려 하고, 자기 영광과 유익을 위해 남을 무시하고 짓밟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화려한 영광의 길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걸어가신 그 길, 곧 자기를 한없이 낮추고 희생하여 다른 사람을 살려내는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걷는 사람입니다. 비록 세상은 그런 우리를 알아주지 않고 미련하다 조롱할지라도, 하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걷는 제자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영원한 영광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28절)
십자가의 길을 담대하게 선언하신 예수님이시지만, 27절에는 인간적인 고뇌와 슬픔을 표현하십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동시에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오신 인간이셨습니다. 예수님을 힘들게 한 것은 며칠 뒤면 겪게 될 채찍과 못 박힘의 끔찍한 고통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하는, 그래서 아버지와 완전히 단절되어야만 하는 두려움이 예수님을 짓눌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통에 집중하지 않으시고 사명과 목적에 집중하십니다.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27-28절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27-28절). 예수님은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오직 아버지께 영광돌리길 원하십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28절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이것은 지금까지 예수님의 성육신과 공생애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으며, 이제 앞으로 남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최고의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는 확증의 소리였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십자가가 비참한 실패요 저주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안에서는 그것이 곧 승리요 영광이라는 선언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다가올 십자가 사건이 가져올 승리를 선포하십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심판 당하시는 것이 아닌 세상의 임금이 심판당하고 쫓겨나는 일입니다. 32절 “땅에서 들리면”이라는 표현은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죄수로서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 처형당하시는 수치스러운 죽음을 뜻하지만, 영적으로는 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세상 임금(사탄)의 권세를 완전히 깨뜨리고 부활 승천하셔서 만왕의 왕으로 높임 받으시는 영광을 뜻합니다.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 높이 매달린 놋뱀을 쳐다볼 때 살아났던 것처럼, 이제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는 자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고 주님께로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친히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셨습니다. 썩어지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내가 먼저 죽어지고 희생하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시다. 자기를 낮추고 생명을 나누는 그 좁은 길 끝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귀히 여겨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밀알처럼 썩어짐으로 내 주변에 아름다운 생명의 향기를 피워내는 복된 삶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