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2:12-19절/열정과 냉정 사이(26.03.12)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 이스라엘의 왕이시여”(13절)

​11장에서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참된 생명이심을 보여주는 이적입니다. 하지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했습니다. 반면 12장 앞부분에서 마리아는 자신의 가장 귀한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헌신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예수님 주변에는 철저한 배척과 놀라운 헌신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월절 명절을 맞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입니다.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환영합니다. 그리고 열광적으로 외칩니다. 13절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호산나’는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종려나무 가지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장군이나 왕을 환영할 때 흔드는 국가주의적 승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무리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줄 강력한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로 기대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기대는 17-1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엄청난 표적을 보았고, 그것을 본 많은 사람들이 증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능력이라면 자신들의 경제적, 정치적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표적으로 시작된 이런 열정은, 바꿔 말하면 표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사라질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무기력하게 종교 당국자들에 의해 십자가를 지십니다. 마27:40절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조롱에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자 이들의 열정은 실망으로 바뀝니다. 하지만 표적이 일어나지 않은 십자가의 죽으심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그러니 우리 신앙이 표적이 아닌 말씀 중심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의 의미를 알아가야 합니다.

결국 무리들의 열정은, 오직 자신들의 이익과 육신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한 왜곡된 열정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진짜 목적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1:29)이 되어 우리의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함인데, 사람들은 그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세상의 영광만을 구하는 이런 모습은 결국 자신의 기대와 다를 때, 이 열정적인 환호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으로 바꾸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고 있습니다.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14절)

​무리들의 엄청난 환호 속에 예수님은 뜻밖의 행동을 하십니다. 14절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상식적으로 세상을 정복할 왕이라면 크고 멋진 군마를 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초라한 어린 나귀를 타십니다. 이것은 슥9:9절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함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군중들은 칼과 창으로 세상을 정복할 왕을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낮아지사 평화의 왕으로, 겸손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이 무언의 행동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저자인 요한은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16절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환호하는 무리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입성하는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이런 분위기라면 결국 예수님께서 왕이 되실 것이고 자신들은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즉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며 성령을 보내주신 후에야 비로소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이 구약의 예언을 이룬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린 것입니다.

또한 이 뜨거운 열정의 현장 한편에는 아주 차갑고 냉소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19절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과 종교적 질서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넘어 나사로까지 죽이려 모의했습니다. 하지만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르자 극심한 위기감과 절망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 요한은 이 악한 자들의 탄식을 통해 놀라운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입술로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라고 고백하게 만드심으로써, 결국 십자가를 통해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 만민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거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미리 보여줍니다.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원하고 있습니까? 환호하는 무리들처럼 말을 타고 칼을 들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는 예수님인가요? 아니면 나귀 새끼를 타신 겸손과 평화의 왕이신가요?

요한복음 12:1-11절/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26.03.11)

●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3절)

​11장에서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이 표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한 사람을 제거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자며 공식적으로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밉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겉으로는 성결하게 유월절 절기를 준비한다면서도, 속으로는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 찾습니다. 이런 어두운 현실에서 오늘 본문은 한 여인의 아름다운 헌신이 아름다운 빛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때는 유월절 엿새 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베다니’를 찾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불러내어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입니다. 나사로의 가족은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배설합니다. 마르다는 여느 때처럼 열심히 시중을 들고 있었고, 나사로는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 곁에 앉아 있습니다.

이때,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놀라운 행동을 합니다. 그녀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긴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이 나드 향유의 가치는 ‘삼백 데나리온’(5절)으로, 당시 노동자의 1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큰 금액입니다. 게다가 유대 사회에서 여인이 뭇사람들 앞에서 머리를 푸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고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오라비를 살려주신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의 사랑과 감사는 체면이나 돈으로 계산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에게 예수님의 가치는 세상 그 어떤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재산을 깨뜨렸고, 여인의 가장 영광스러운 상징인 머리털을 사용하여 가장 낮고 천한 부위인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철저한 자기 깨어짐과 낮아짐의 헌신이었습니다. 성경은 그 결과 3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고 합니다. 마리아 한 사람의 아름다운 헌신이 온 집안을 향기롭게 하였습니다. 성경은 우리 성도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합니다(고후2:15절). 악취가 진동하는 곳이 그리스도인 한 사람을 통해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하게 된다면 복된 삶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아름다운 헌신을 비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5절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유다의 말은 합리적이고 정의롭습니다. 1년 치 연봉을 한순간에 발에 쏟아버리는 것은 비효율적인 ‘낭비’이며, 그 돈으로 수많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저자 사도 요한은 유다의 이 그럴듯한 고백 뒤에 숨겨진 실상을 폭로합니다. 6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유다는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영적인 가치나 사랑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돈’과 ‘자기 이익’뿐이었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곁에 계셨지만 속으로는 계산기를 두드리며 자신의 탐욕을 채울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7절)

​예수님은 비난받는 마리아를 변호하십니다. 7절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룟 유다와 세상의 눈에는 마리아의 행동이 미련한 ‘낭비’로 보였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다가올 십자가의 죽음을 예비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헌신’으로 보였습니다.

사실 마리아가 얼마 뒤에 있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정확히 알고 향유를 부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주님을 향해 쏟아부은 순전한 사랑의 헌신은, 결과적으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임을 당하실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는 것과 같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잔치가 벌어지는 동안, 예수님과 나사로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큰 무리가 베다니로 몰려옵니다. 이들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무덤에서 살아난 나사로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서 앉아있는 것은 믿음의 충분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란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역시 과거 죽었던 우리가 예수님으로 다시 살아난 존재들입니다.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길로 나오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나사로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자 10절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되자,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넘어 그 부활의 증인인 나사로마저 없애버리기로 합의합니다. 자신들의 권력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몇 사람 제거하는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종교 지도자들이라는 사실이 충격입니다.

오늘 본문은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 주변에 서 있는 세 부류의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첫째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생명까지 죽이려 드는 대제사장들입니다. 둘째는 겉으로는 신앙의 명분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철저히 자신의 물질적 이익을 계산하는 가룟 유다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세상이 낭비라고 조롱할지라도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깨뜨려 주님께 전부를 쏟아부은 마리아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 전체를 ‘낭비하듯’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진정으로 깨달은 자만이 마리아처럼 옥합을 깰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계산적인 생각들을 내려놓고 내게 주신 모든 것을 통해 주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또한 우리 삶의 자리가 이기적인 다툼의 냄새가 아닌 그리스도의 향기로 가득 채워지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요한복음11:47-57절/예수님을 찾는 이유(26.03.10)

●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50절)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생명의 주님이 가장 위대한 기적을 베푸셨건만, 예수를 믿는 자들이 있는 반면 어떤 이들은 바리새인들에게 달려가 예수를 고발합니다. 이 고발을 접수한 종교 지도자들은 곧바로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여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지 본격적으로 모의하기 시작합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걱정은 단 하나였습니다. 47절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이들은 한때 예수님께 더 많은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이를 통해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기적 중의 기적인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인정하고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정반대의 결정을 합니다. 이들의 두려움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계속 행하시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게 될 것이고, 결국 반란을 우려한 로마 군대가 와서 자신들을 짓밟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메시아를 기대하면서도, 로마를 두려워하며 의지하고 있는 아이러니입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절대 포기하려하지 않는 몸부림입니다.

이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나서서 결정적인 발언을 합니다. 50절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참으로 “악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철저히 자기들의 이익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죄 없는 예수님 한 명쯤은 죽여도 괜찮다는 선언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앞장서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할 대제사장과 종교 지도자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도 없고, 진리도 없었습니다. 오직 “나의 유익”과 “나의 영광”만이 가장 중요했기에 생명의 주님을 죽이는 일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종교가 자기 이익에 도취될 때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가야바는 철저히 정치적이고 이기적인 목적으로 예수를 죽이자고 선동했지만, 하나님은 이 악한 인간의 말조차 선용하셔서 오히려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도구로 만드십니다.

저자인 요한은 가야바의 이 말이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51-52절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고 해석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자녀를 모으는 사건이 되리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탐욕을 위해 구원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 했으나,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의 악한 의도를 도리어 온 세상을 살리는 “대속의 십자가”’로 역전시키십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악조차도 사용하셔서 구원을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56절)

​가야바의 발언 이후, 이들은 하나가 됩니다. 53절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기 위해서 하나가 되고, 본격적으로 행동에 돌입합니다. 이를 아신 예수님은 유대인들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빈 들 가까운 에브라임이라는 동네로 물러가 제자들과 함께 머무십니다. 예수님의 도피는 결코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십자가를 지실 ‘하나님의 때(유월절)’를 위함입니다.

마침내 유대인의 큰 명절인 유월절이 다가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명절 전에 자신을 성결하게 하기 위해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무리들은 성전 뜰에 서서 서로 수군거리며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토록 애타게 찾는 목적은 예수님을 믿기 위함이 아닙니다. 57절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예수님을 잡기 위함입니다.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유월절의 완성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들 앞에 계시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제거하려는 어리석음을 봅니다. 학자들은 이 장면을 “폭풍 전야의 고요함과 긴장감”이라고 묘사합니다. 사람들은 절기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정결하게 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들의 손은 생명의 주님이자 “참된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돌아봅니다. 교회 안에서 직분을 받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면서도, 진정으로 집중해야 할 하나님의 영광은 잃어버린 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가야바와 종교 지도자들처럼, 내 삶의 평안과 나의 유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예수님의 말씀을 가볍게 외면하고, 형제자매를 희생양 삼는 신앙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지 돌아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이렇게 기도합시다. “하나님, 내 유익과 내 영광만을 구하던 이기적인 신앙을 십자가 앞에 못 박게 하옵소서. 인간의 악함까지도 선용하여 구원을 이루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 나의 삶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룩한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11:38-46절/나사로야 나오라(26.03.09)

●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38절)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의 무덤을 향해 가셔서 위대한 생명의 기적을 베푸시는 장면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기적을 넘어, 다가올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미리 보여주는 중요한 표적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가시며 38절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셨습니다. 여기 ‘비통히 여기다’라는 단어는 33절에도 나왔지만 단순히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정도의 감정이 아닙니다. 원어(엠브리마오마이) 의미는 마치 말이 코에서 콧김을 내뿜으며 분노로 치를 떠는 모습을 표현할 때 쓰는 강력한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은 도대체 무엇을 향해 이토록 분노하셨을까요? 이를 이해하려면 요한복음이 “새 창조”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1:1절이 창세기처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하는 것은, 창세기에서 망가진 문제를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해결하실 것임을 보여줍니다. 원래 하나님은 인간을 질병이나 늙음, 죽음이 없는 영원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 인해 인간은 죽음과 질병의 굴레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절망해왔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아름다운 피조물을 짓누르고 파괴하는 이 “죽음의 세력”을 향해 맹렬하고 거룩한 분노를 터뜨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돌로 막힌 굴 무덤 앞에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자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다급히 만류합니다. 39절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사실 마르다는 바로 앞선 대화에서 예수님을 27절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훌륭하게 고백했던 여인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고백은 훗날 마지막 부활의 때에나 이루어질 막연한 진리였을 뿐,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부패해가는 오라비의 시신을 주님이 살려내실 것이라는 “현재적인 믿음”은 없었습니다.

마르다의 모습은 곧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믿음’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듣고 많이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입술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내 경험과 이성, 내 한계에 주님의 능력을 가둬두고 신앙생활을 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은 그런 마르다에게 40절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라며 참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기적이 먼저가 아니라, 내 한계를 뛰어넘어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신뢰하는 ‘온전한 믿음’이 선행될 때 비로소 죽은 자가 살아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 “나사로야 나오라”(43절)

돌을 옮겨 놓자,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41절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이 굳이 무리들 앞에서 소리 내어 기도하신 이유는, 자신이 행하는 이 생명의 기적이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임을 주변 사람들이 믿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온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십니다. 창조주의 생명 말씀이 선포되자, 죽었던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 얼굴은 수건에 싸여서 무덤 밖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에 앞으로 이어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나사로를 살리셨는데, 머지않아 유대인들은 큰 소리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칠 것입니다. 또한 나사로의 얼굴이 ‘수건’에 싸여 있었다 하는데,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는 요20:7절은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나사로가 수건을 감고 살아난 이 사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훗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실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서 걸어 나오는 이 엄청난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의 반응은 놀랍게도 둘로 나뉘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으나, 어떤 자들은 바리새인들에게 달려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고발했습니다. 그들은 진리 앞에서도 예수님을 제거하고 죽이기로 결의하는 완악함을 보입니다.

이 엇갈린 반응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내 삶에 더 큰 기적과 응답을 주시면 내가 더 잘 믿을 텐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눈앞에서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보고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 했던 유대인들처럼, 우리의 신앙을 자라게 하는 것은 “더 많은 기적과 체험”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는 일곱 개의 기적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기적이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기적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기적의 종합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의 새로운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온전한 믿음’임을 강력히 선포합니다.

오늘 우리는 마르다처럼 내 생각과 경험의 한계에 갇혀 주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괴롭히는 죽음과 절망의 문제를 향해 맹렬히 분노하시며 굽어살피시는 생명의 참된 주관자이십니다. 더 많은 기적을 구하기보다, 이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밝히 보여주신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합시다. 내 삶의 절망적인 무덤 앞에서도 “나오라” 부르시는 생명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복된 하루가 됩시다.

요한복음11:1-16절/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26.03.06)

●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4절)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일곱 개의 기적 중 마지막 일곱 번째이자 가장 위대한 표적인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의 시작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를 넘어, 다가올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는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10:38절에서 분명한 표적들 앞에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고 하셨는데, 가장 위대한 일, 표적을 행하십니다.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병에 걸렸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3km 동쪽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그의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는 급히 예수님께 사람을 보냅니다. 3절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이렇게 예수님께 사람을 보낸 것을 보면 나사로가 위중한 상태였음을 알게 됩니다. 자매들은 당연히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 급히 오셔서 오라버니를 고쳐줄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위급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4절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나사로는 결국 죽습니다. 그렇다면 “죽을 병이 아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사로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으로 일어나는 일이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위대한 일이 될 것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 예수님의 영광”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죽음조차 사용하십니다. 우리 삶에 예기치 않은 질병이나 실패, 깊은 고난이 찾아올 때 우리는 절망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짓누르는 그 고난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드러나는 거룩한 무대’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6절)

​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은 예수님의 다음 행동입니다. 5절은 예수님이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분명히 ‘사랑하셨다’고 기록하는데, 6절에 보면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십니다. 너무나 위급한 상황인데, 왜 일부러 지체하셨을까요?

우리는 17절을 통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가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계신 “요단강 저편”(10:40절)과 베다니는 걸어서 하루 정도의 거리입니다. 나사로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가지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출발한 후 나사로는 세상을 떠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아셨고, 소식을 들으신 후 이틀을 더 유하신 겁니다. 그리고 하루 걸어서 베다니로 향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죽은지 4일 만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예수님의 지체하심을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지체하심은 결코 사랑이 없거나 무관심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다급한 요청이나 필요에 이끌려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단순히 아픈 병을 고쳐주는 것을 넘어, ‘죽음을 이기는 부활과 생명’이라는 훨씬 더 크고 영광스러운 선물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에 대해 주님의 응답이 지체되는 것 같아 답답할 때, 그것은 ‘거절’이 아니라 더 큰 은혜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완벽한 기다림”임을 신뢰해야 합니다.

●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내가 깨우러 가노라” (11절)

이틀이 지난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유대로 가자”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놀라며 만류합니다. 8절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그럼에도 예수님은 베다니를 향해 가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던지는 돌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명을 따라가십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자신은 죽음의 길, 십자가의 길을 향해 걸어가십니다. 나사로와 같이 죽었던 우리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시는 예수님의 위대한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죽은 것을 11절 “잠들었다”고 표현하십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육신의 잠을 자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성경은 종종 죽음을 잠에 비유합니다. 영원한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면 다시 일어나듯, 살아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죽음이 끝 혹은 영원한 절망이 되지 못합니다. 죄로 인해 찾아온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 되십니다.

16절은 상황을 오해한 도마의 외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그런데 이 말이 기록된 의미가 있습니다. 도마의 말처럼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신 후, 이 사건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의 결의를 통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죽음을 길을 가신 겁니다. 그렇다면 도마의 이 고백은 이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제자는 도마의 고백처럼 “예수님과 함께 죽는 삶”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짓누르는 어두운 무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내 시간표대로 응답되지 않아 절망하고 계십니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합시다. 내 삶에 닥친 고난이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가 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오늘 하루도 참된 소망 가운데 승리합시다.

요한복음10:22-42절/빼앗을 자가 없느니라(26.03.05)

●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6절)

오늘 본문의 배경은 ‘수전절(성전 봉헌절)’이며, 계절은 ‘겨울’입니다. 수전절은 주전 164년경 마카비 혁명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더럽혀졌던 성전을 되찾아 깨끗하게 한 후, 하나님께 다시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굳이 22절 “때는 겨울이라”고 명시한 것은, 단순히 날씨가 춥다는 사실을 넘어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을 향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차갑고 냉랭한 영적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성전 안 솔로몬 행각을 거니시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다그칩니다. 24절을 새번역은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로 번역했습니다. 언뜻 보면 이 질문은 메시아에 대한 순수한 갈망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속마음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힘 있고 정치적인 메시아”만을 원했기에, 양의 문이요 목자로 오신 예수님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수많은 말씀과 표적으로 당신이 누구신지 증명하셨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되었던 자가 눈을 뜬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믿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를 주님은 이렇게 진단하십니다. 26절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즉, 증거나 기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자신들이 정해놓은 율법적 세계관과 욕망의 틀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대하고 원하는 방식의 예수가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는 영적인 교만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입니다.

●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8절)

반면, 예수님의 참된 양들은 거짓 목자들의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음성을 따르는 양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가장 위대한 두 가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첫째는 ‘영생’을 주어 영원히 멸망하지 않게 하신다는 것이고, 둘째는 28절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는 절대적인 안전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이 29절에서는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로 이어집니다. 즉, 우리를 붙들고 계신 “예수님의 손”은 곧 온 우주를 창조하신 만유보다 크신 “아버지 하나님의 손”과 완벽하게 동일함을 선포하십니다. 세상의 어떤 위협이나 실패, 심지어 사탄의 세력조차도 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우리를 결코 끊어내거나 훔쳐 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안전한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나 행위가 강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붙들고 계신 주님의 손이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양들의 절대적 안전을 보증하시며, 예수님은 위대한 선언을 하십니다. 30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이는 예수님의 사역과 뜻, 생명을 주시는 권능이 곧 성부 하나님과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선언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향해 신성모독이라며 분노하여 돌을 들어 치려 합니다. 생명의 주님이시며, 참된 성전이신 창조주가 눈앞에 계시건만, 기득권과 자기중심적인 신앙에 갇힌 그들은 오히려 구원자를 죽이려 드는 치명적인 영적 소경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41절)

결국 예수님은 돌을 드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떠나, 과거 세례 요한이 사역하던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 안의 사람들은 그 수많은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요단강 저편의 무리들은 41절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고 합니다. 요한은 표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말씀으로 예수님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말씀에 반응해서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들이야말로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자신의 유익만을 좇는 신앙이 아니라, 말씀 자체에 반응하여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진정 선한 양들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 현주소를 돌아봅니다. 나는 혹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처럼 내 욕망과 내 방식대로 응답해주시는 메시아만을 원하며 주님과 다투고 있지는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당장의 문제 해결이 없다고 해서 쉽게 주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강한 손으로 오늘 하루도 우리를 굳게 붙들고 계십니다. 내 삶에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추운 겨울이 찾아올지라도, 나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크신 손을 굳게 신뢰합시다. 요단강 저편의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기적이 없을지라도 오직 ‘말씀’만으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기쁨으로 순종하는 생명력 넘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