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03 | 매일성경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38절)
예수님을 소개했던 세례요한이 두 제자와 함께 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십니다. 그러자 36절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소개합니다. 어제 본문 29절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세례요한은 인생의 문제가 ‘죄’라는 사실, 그리고 이 죄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당시 오실 메시아에 대한 왜곡된 기대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의 두 제자 중 한 사람은 안드레라고 40절이 소개합니다. 다른 한 제자의 이름을 성경학자들은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일 것이라고 합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릅니다. 정확한 설명은 세례요한이 자신의 두 제자를 예수님께 보낸 겁니다. 이제 따르고 섬겨야 할 분은 예수님이라는 거지요. 세례요한은 철저하게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의 삶을 삽니다.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38절 “무엇을 구하느냐” 바꿔 이야기하면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시는 겁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 무엇을 원해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지…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이들은 예수님을 랍비, 즉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어디 계신지를 묻습니다. 그곳에 함께 머물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을 따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함이 이 제자들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39절 “와서 보라”고 대답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이 말이 다시 한번 등장하는데 46절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와서 보라”고 합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 계신 곳으로 가서 함께 거합니다. 시간이 10시쯤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 시간으로 오후 4시입니다. 아마 하루를 함께 보내고 이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요? 이후 제자 중 하나인 안드레가 변화된 모습을 보면, 예수님과 교제하며 많은 대화를 나눈듯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예수님이 지금까지 이들이 간절히 고대하고 있는 메시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안드레가 찾아간 사람은 형제인 시몬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41절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안드레의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달라졌습니다. 랍비(선생님)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메시야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곧바로 자기 형제 시몬에게 전한다는 것은 먼저 안드레의 마음에 예수님을 만난 기쁨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그런 기쁨과 확신을 주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 가운데 시몬이 생각났다는 것은 시몬 역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드레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몬을 알아보시고 이름을 바꿔주십니다. 그런데 본문 47절부터 보면 나다나엘이라는 사람도 예수님께 오는데 그 역시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알아보십니다. 무엇을 말하냐면?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정확하게 아신다는 겁니다. 아실 뿐만 아니라 시몬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게바’입니다. 헬라식으로 하면 ‘베드로’인데, 의미가 ‘반석’입니다. 이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가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보면 그는 처음에 반석이 아닙니다. 좌충우돌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가면 반석이됩니다. 초대교회의 중심인물이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시고 그렇게 만들어가십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베드로보다 훨씬 더 연약하고 부족함 투성이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 나라 향한 꿈도 주시고 이루게하시는 분이십니다.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46절)
다음 날에는 예수님께서 빌립이라는 사람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두 제자는 그들이 자발적으로 따랐다면, 빌립은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이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제자를 삼으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빌립 역시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을 찾아갑니다.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는 나다나엘에게,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나사렛 예수”라고 소개합니다. 나다나엘의 반응이 시큰둥합니다. 46절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이 말은 구약을 잘 알고 있는 나다나엘이 메시야와 나사렛과는 전혀 상관이 없지 않느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그러자 빌립이 46절 “와서 보라”고 합니다. 빌립이 지혜롭습니다. 나다나엘과 논쟁하지 않고 “와서 보라”고 합니다. 우리도 전도하다 보면 나다나엘과 같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요즘같은 시대 교회를 공격하고 자신의 지식으로 논쟁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과 빌립처럼 “와서 보라”, “와서 말씀 들어봐라”, “와서 예배드려보라”고 초대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빌립의 전도로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오자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아십니다. 47절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놀란 나다나엘이 자신을 어떻게 아시느냐고 묻자 48절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말씀에 나다나엘이 깜짝 놀라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49절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즉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맞습니다”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궁금한 것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고만 했는데 나다나엘은 왜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일까요?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데, 아마 그 아래에서 나다나엘이 간절히 메시야를 고대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런 그가 메시야를 만났고 자신이 기도했던 것을 아시는 것을 보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놀라는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은 50절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더 큰 일”이 51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입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창세기에서 야곱이 한 곳에서 잠을 자다 꿈을 꾸었는데 사닥다리가 보이고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의미가 하늘과 땅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이 하늘과 땅,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사역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 하나님의 생명에서 단절된 관계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연결하시고 회복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주님을 따르고 있는지 돌아보면서, 매일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 됩시다. 또한 주님을 만난 기쁨을 “와서 보라”고 전하는 삶이 됩시다.
2026.02.02 | 매일성경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20절)
요한복음은 창세기와 비슷하게 시작합니다. 1: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반복해서 ‘말씀’을 강조하는데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천지 만물 창조사역에 함께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좋은데, ‘말씀’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인데요, 이 단어가 유대인들에게는 잠언 8장에 나오는 ‘지혜’였고 더 나아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를 가리킬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또한 이방인인 헬라인들은 철학적 사고를 하면서 우주를 지배하는 어떤 원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로고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로고스’라는 단어가 유대인들에게는 “당신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이분이다!”라는 선언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당신들은 신이 존재하는 것 같다라고 생각하는데 그분이 바로 로고스이신 예수님이다!”라고 선언하는 겁니다. 탁월한 단어 선택입니다.
요한은 ‘로고스’이신 예수님을 곧바로 4절에서 생명과 빛으로 연결합니다. 우리 삶에 예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죽음이요 어둠입니다. 9절 보면 예수님은 참 빛으로 각 사람에게 빛을 비추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외면합니다. 자신들의 기대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합니다. 창조주를 피조물이 인정하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을 알고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우리가 이 특권과 권세 누리고 있음이 감사일 뿐입니다.
그런데 저자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가장 먼저 예수님이 아닌 자를 소개합니다.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 이야기가 1장에서 많이 반복됩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메시아로 주목하고 기대했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저자 요한은 6-8절까지 세례요한은 ‘사람’이고 그의 사명은 ‘증언’이라는 것을 반복 강조합니다. 8절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고 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절)
그리고 오늘 본문은 세례요한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했으며, 예수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소개합니다. 세례요한에게 특사단이 파견되어 19절 “네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세례요한은 드러내어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는 엘리야가 아니라”, “나는 선지자가 아니라”고 답합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누가 아닌지”를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인기가 있어지면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만 있어도 인기가 더 치솟을 겁니다. 영광과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알고 단호하게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오직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예수님 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요한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마17:12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라고 하셨습니다. 즉 세례요한을 엘리야라고 하셨습니다. 말라기서를 보면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와 같은 사람을 먼저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세례요한이 그 엘리야입니다. 하지만 당사자인 세례요한은 자신을 그런 특별한 존재라고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일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세례요한의 대답에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누구냐?” 요한의 답은 23절 하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합니다. 사40:3절을 인용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마치 왕이 등장할 때 그 길을 미리 준비하는 역할이 자신의 사명이라는 겁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소리라고 합니다. 그는 소리는 사라지고 말씀만 기억되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은 사라지고 예수님만 드러나길 원했습니다. 예수님만 흥하고 자신은 쇠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또한 자신은 27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합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은 높고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34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런 소개에 사람들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을 겁니다. 당시 이들은 정치적, 경제적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의 강한 손아귀에서 이스라엘을 구해줄 강력한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29절 세례요한은 자신에게 나오는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합니다. “세상 영광 지고 가는 하나님의 숫 사자”가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여기 어린양은 구약 출애굽기에 나오는 유월절 어린양을 의미합니다. 어린양의 피를 집문에 바르므로 장자의 생명을 구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는 생명을 얻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본문은 우리의 문제가 정치, 경제적인데 있지 않다는 말해줍니다. 그것이 해결된다고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죄’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죄의 문제는 오직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이 생명이요 빛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오직 주님만을 높이며 주님께만 영광돌립시다. 세상 죄를 지고 자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음에 감사하며 오늘 하루 하나님의 뜻을 아름답게 이루어 갑시다.
2026.01.30 | 매일성경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2절)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인 이삭이 태어납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많은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약속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1절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를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돌보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십 평생 자녀가 없었던 사라를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행하시니 임신을 합니다. 그리고 2절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시기, 하나님의 때가 되니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렇다면 1-2절의 강조점은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말씀하신 시기에 반드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 부분에서 실패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가 아닌 자신들의 생각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시기가 아닌 자신들이 원하는 때에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결과 오늘 본문처럼 가정에 갈등과 아픔이 발생합니다. 우리의 모습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방법과 우리의 때를 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원망하고 불평할 때가 있습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입니다.
낳은 아들 이름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대로 ‘이삭’이라고 짓습니다.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이삭이 태어난 후 팔 일 만에 할례를 행합니다. 4절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여기도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입니다. 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민족과 땅에 대한 약속을 주시면서, 아브라함도 언약에 신실한 삶을 살도록 언약 백성의 징표로 할례를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할례를 통해서 언약에 신실한 삶을 스스로 결단하며, 이삭의 몸에도 징표를 새기고 있습니다.
5절은 이삭이 태어날 때 아브라함의 나이를 기록합니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100세입니다. 뿐만 아니라 2절은 “노년의 아브라함”, 7절도 “아브라함의 노경에”가 반복됩니다. 무엇을 말하냐면? 인간이 끝났다고 절망하고 포기할 때 하나님은 시작하시고 소망을 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오직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끝났다고 하기 전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슬픔 가운데 있던 사라를 웃게하셨습니다. 또한 이 소식을 듣는 모든 사람도 웃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쓴웃음이 변하여 함박웃음이 되게 하셨습니다. 시30:11절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우리도 삶을 살아가다 보면 절망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누구도 해결할 수 없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키시는 때입니다. 다시 웃게 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12절)
이삭의 태어남은 기쁨이지만 하나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과연 누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 아브라함의 뒤를 이을 것인가입니다. 지금까지는 당연히 이스마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의 태어남으로 변화가 생깁니다. 결정적인 계기는 이삭이 젖을 떼고 잔치를 베푸는 날에 일어납니다. 보통 젖을 떼는 나이는 세 살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이때 이스라엘의 나이는 17살 정도 되었습니다. 상당히 장성했습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소망이요 기대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가 아닙니다. 갈등이 발생하는데 9절 하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여기 “놀리는지라”의 본 의미는 “웃었다”입니다. 비웃은 겁니다. 아이가 비웃은 것을 가지고 가족간의 갈등이 일어나고 내쫓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은 좀 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이 비웃음은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가는 것에 대한 비웃음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편에 서 있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거대한 세상을 만들고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조롱하며 비웃습니다. 그러니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사라는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고 합니다. 11절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사랑하는 아들, 지금까지 큰 기쁨이었던 아들은 쫓아낸다는 것은 결코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먼저 12절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맡기라는 겁니다. 그리고 사라의 말처럼 내 보라고 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맺은 언약이기에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이삭이 약속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의도적으로 하갈의 아들에게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이 있지만 거론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스마엘도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14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순종하기 쉽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순종합니다. 즉각적인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의 모습 가운데 이런 내용이 많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면 머뭇거리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따릅니다.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주고 하갈과 아들을 내보냅니다. 이들은 머지않아 죽을 위기를 만납니다. 그런데 17절에는 두 번이나 하나님께서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합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의 뜻이 “하나님이 들으셨다”인데 이름처럼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그리고 하갈을 위로하시며 아들에 대한 약속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갈의 눈을 밝히니 샘이 보이고 물을 가져다가 아들에게 마시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과도 함께 하십니다.
우리 삶에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씀하신 때에 이루실 것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인내합시다. 하나님께서 말씀 통해 순종을 요구하실 때 즉각 순종합시다.
2026.01.29 | 매일성경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2절)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시겠다는 약속이 구체화되었습니다. 18:10절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지 25년여만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성취를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군대에서 제대를 앞두고 있으면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아브라함 가정이 지금 그래야하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아브라함이 다시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실수는 이미 12장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왔는데 기근을 만나자 애굽으로 내려가며 두려움에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합니다. 애굽 왕이 사라를 궁으로 불러들이는 위기를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큰 재앙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1장은 드디어 약속의 자녀인 이삭이 태어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아브라함의 실수는 하나님의 약속이 시작된 직후에, 또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성경 저자는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사실을 강조합니다. 15장 횃불 언약을 통해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책임지시고 언약을 이루십니다. 사람은 위기를 만들지만 하나님은 위기를 해결하십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인도하신 과정을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성장해서 이런 실수를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수합니다. 실패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붙잡으시고 이루어가십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 사라를 데려갑니다. 지금 사라의 나이가 90인데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데려갔다는 것이 의아합니다. 어찌 되었든 위기입니다. 그 밤에 하나님께서 긴급하게 개입하십니다.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3절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아무것도 몰랐던 아비멜렉은 자신이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행한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비멜렉의 사라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7절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아브라함이 선지자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17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아비멜렉 집의 여인들을 치료하셔서 출산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앞에서는 롯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19:29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로 롯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민족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점점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참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던 땅에 살던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셔서 온 세상을 향한 스스로 꿈꿀 수 없는 비전을 주시고 신실하게 이루어가시며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부르신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만들어 가십니다.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10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책망했듯이 아브라함을 책망합니다. 이 일로 자칫 아비멜렉 뿐만 아니라 그의 나라까지 위기를 겪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를 묻자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11절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이곳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8절 하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하지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아브라함이 신뢰했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했다면 어디에 있든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사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으면 사람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아비멜렉의 책망에 아브라함의 대답이 계속되는데 13절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고 합니다.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이렇게 하기로 약속을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된 두 번 이상 이런 일들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12장에서 아브라함은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전쟁에서 승리케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방패와 상급이 되어주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실수를 통해서도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전과 다른 말과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문제의식 없이 습관적으로 해오던 일들을 점검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제 신앙을 시작하신 분들이 세상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어왔음에도 여전히 삶의 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 오늘 본문처럼 한 가정과 인생에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12장에서도 실수를 통해 재물을 얻은 것처럼 아비멜렉도 양과 소와 종들을 아브라함에게 줍니다. 또한 16절 “은 천 개”를 줍니다. 많은 액수입니다. 아비멜렉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잘못을 물질로 보상하고 있습니다. 그런 아비멜렉을 위해 아브라함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태를 열어 출산케 하십니다.
반드시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크신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새로운 환경이나 두려운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이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지 않고, 이전과 다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말과 행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026.01.28 | 매일성경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26절)
하나님께서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십니다. 25절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고 합니다. “온 들”, “모든 백성”, “땅에 난 것을 다”라는 표현을 통해 죄악의 도성과 관련된 모든 것을 멸하십니다. 노아 홍수가 죄로 가득했던 온 세상에 대한 심판이었다면, 소돔과 고모라는 죄로 가득한 도성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죄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 가운데서 롯의 가정만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합니다. 26절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이미 17절에서 천사는 경고했습니다.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결과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뒤를 좀 돌아보았다고해서 이렇게 된다는 것이 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본 이유는 소돔 성에 대한 미련이요 집착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그의 마음과 생각을 채우고 있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것을 포기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그녀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영적인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부와 명예와 자리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것과 높은 자리에 있다 해도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면 실은 죽은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 생명의 삶이요 복된 삶입니다.
오늘 본문은 롯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비극 사이에 아브라함 이야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을 비교하고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어나 27절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보 기도했던 자리에 서서 소돔과 고모라 쪽을 바라보니 거대한 연기가 솟아오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무거웠을 것입니다. 조카 롯에 대한 염려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는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었을 겁니다. 하나님 없는 죄악의 세상을 향하는 삶이 아닌, 더디지만 때론 힘도 들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는 믿음의 삶을 결단했을 겁니다.
29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고 합니다. 앞에서는 롯과 관련해서 여호와께서 자비를 더하셨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생각하신 겁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를 생각하셔서 롯을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생각하시도록 그리고 일하시도록 합니다. 누군가를 돕는 가장 강력하고 위대한 방법은 기도입니다. 우리 기도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게 합니다. 우리 기도가 우리와 자녀들, 가정과 교회 공동체를 살립니다.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32절)
롯 가정의 비극은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된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롯은 소알 성읍에 거주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산으로 도망해서 굴에 거주합니다. 그런데 큰딸과 작은딸이 하나의 계획을 세웁니다. 이 땅에 배필 될 남자들이 없으니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아버지와 동침하여 후손을 이어가자는 겁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생각을 딸들이 자연스럽게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반대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말하냐면 소돔의 가치관에 자녀들이 물들어 있습니다. 성에 들어온 나그네와 동성애를 하는 것이 일상인 도시에서 이런 딸들의 생각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이 아닌 성경적 가치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변하는 세상의 흐름에 따르지 않고 변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기준으로 세상과 싸우며 살아가야 합니다.
또 하나 딸들의 문제점은 31절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해서 남자가 없지만 온 세상 남자들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눈에 보기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질문이 잘못되니 답이 바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대로만, 우리의 한계 안에서만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이래서 위험합니다.
사실 롯이 소돔 땅을 선택한 이유가 눈으로 보니 좋았기 때문입니다. 물이 넉넉하고 푸른 초원이 있는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죄악의 도성이었습니다.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한 것이지요. 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 내 생각이 전부입니다. 믿음의 눈을 뜨는 것, 영적인 지평을 넓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자녀가 없는 상황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인내하고 있습니다. 롯의 딸들처럼 인위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32절부터는 “술을 마시게 하고”가 네 차례 반복됩니다(32,33,34,35). 노아는 스스로 술을 마시고 벌거벗은 결과 자식인 함을 저주하게 됩니다. 반면 롯은 자녀들이 술에 취하게 합니다. 죄와 술취함이 연결됩니다. 뿐만 아니라 33절과 35절은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합니다. 롯의 영적인 상태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가장인 아버지가 깨어서 자녀들을 바른길로 인도하고 본을 보여야 하는데 영적으로 무감각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버지와의 동침 결과 두 딸이 임신합니다. 큰딸은 아들을 낳고 ‘모압’이라고 하는데 의미가 “아버지로부터 유래한 자”입니다. 둘째 딸도 아들을 낳고 ‘벤암미’라고 합니다. 의미가 “나의 친족의 아들”입니다. 이들이 ‘암몬’족속이 됩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민족들이 이렇게 생겨납니다.
세상을 향하여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나라 꿈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갑시다. 세상 가치관에 흔들리지 말고 말씀의 기준을 선명하게 붙잡읍시다. 이를 위해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적용하는 삶이 됩시다.
2026.01.27 | 매일성경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12절)
소돔 성에서 롯이 영접한 두 명의 나그네를 사람들이 상관하겠다며 찾아와 롯의 집을 에워쌉니다. 롯의 권면도 듣지 않고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 합니다. 긴급한 상황에서 두 천사가 롯을 집안으로 끌어들이고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하여 위기를 모면합니다. 이 과정에서 소돔이 얼마나 심각한 죄악의 도성인지가 드러났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하지만 롯에게는 구원의 은혜가 임합니다.
천사들이 롯에게 “성에 있는 사위나 자녀, 그리고 성 중에 롯에에 속한 사람들은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고 합니다.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냐에 상관없이 롯에게 속해있다면, 그리고 순종해서 함께 이 성을 떠난다면 구원을 베풀어줍니다. 이에 롯이 나가서 딸과 결혼을 앞둔 사위들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14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저녁때에 천사들이 소돔 성에 도착했고 심판은 해가 뜨면서 시작됩니다. 롯이 이 소식을 전한 시간은 늦은 밤이나 새벽녘이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까지 이런 말과 행동을 하지 않은 장인이 다급하게 이런 요청을 한다면 귀를 기울일 법도 한데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어제 본문에서 롯이 소돔 성에서 높은 자리에는 앉아 있지만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살펴보았는데 사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위들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늘 죄악 가운데서 살아왔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갑자기 이런 말을 하니 믿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이처럼 죄악의 일상화가 위험합니다.
예수님은 재림을 설명하시면서 마24:37-39절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하십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홍수로 세상이 심판을 당한다고 해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심판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일상을 살아갔습니다. 롯의 사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우리가 주의해야 할 말씀입니다. 주님 다시 오신다는 것을 알지만, 현실은 그것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오직 이 땅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그 날을 준비하며 깨어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천사들은 다시 한번 소돔 성의 멸망 이유를 설명합니다. 13절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앞에서도 계속 반복된 내용입니다. 소돔의 멸망은 죄악의 결과로 고통당하며 신음하는 사람들의 부르짖음 때문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상실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의미 없는 삶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누군가로 하여금 부르짖게 하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21절)
드디어 동이 트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천사들은 롯을 재촉합니다. 빨리 이 성에서 나아야 합니다. 그런데 롯은 지체합니다. 그러자 16절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지체하는 롯을 잡아 끌어 성 밖에 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롯은 지체했을까요? 어쩌면 롯 역시 사위들과 마찬가지로 심판에 대한 확신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더 큰 이유는 소돔 성에 대한 미련 때문입니다. 자리와 부를 누렸습니다. 사람들의 인정도 받고 재미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미련이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멸망 당하면 아무 쓸모 없는 것들입니다. 사라져버릴 것들입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관심을 두며, 무엇을 쌓으며 살아가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천사들은 롯에게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면서 17절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고 합니다. 죄악의 도시에 대해 돌아보아서도 안 되고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이러해야 합니다. 돌아보지 말고 머물지 말고, 지체하지 말고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체하며 머뭇거리던 롯이 다급하게 말을 합니다. 그것도 길게 말합니다. 산으로 도망하라는 말에 대한 대답입니다. 산까지 갈 수 없다는 겁니다. 대신 근처 작은 성읍으로 도망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천사 입장에서 보면 자비를 베풀어서 롯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지체하지를 않나, 이제는 새로운 요구사항을 제시합니다. 그럼에도 21절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네가 말하는 그 성읍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그렇다면 원래 이 작은 성읍은 멸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롯 때문에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 성의 이름이 ‘소알’입니다. 의미가 ‘하찮은’입니다.
왜 롯은 산이 아닌 성읍으로 도망하려 했을까요? 롯의 말처럼 산으로 가다가 죽을까봐 두려워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가까운 성읍이 사실은 더 위험합니다. 그래서 19:30절을 보면 결국은 다시 산으로 도망합니다. 그렇다면 롯은 여전히 성읍 생활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소돔이 멸망한다면 작은 성읍에서라도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가인의 후예들이 계속 머무는 곳이 성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성은 하나님의 간섭없이 자신들의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 스스로 보호하며 힘을 키울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 성읍의 결과가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롯은 여전히 그곳에 미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안전한 곳은 하나님 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롯의 요청에 22절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롯을 위하여 지체하십니다.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일에서 지체하지 말고 떠납시다. 머물지 말고 돌아보지 맙시다. 또한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입니다. 깨어 준비하며 사라져버릴 것들이 아닌 영원한 것을 쌓아가는 믿음의 삶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