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29 | 매일성경
●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18절)
야곱은 어제에 이어 나머지 여섯 아들에게 축복합니다. 유다에게 가장 길게, 요셉에게도 길게 이야기했다면, 나머지 아들들에게는 짧게 선포합니다. 그러나 짧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각자에게 맞는 선포를 합니다. 28절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야곱이 한 명 한 명의 삶을 보고, 거기에 알맞은 복을 선포했습니다.
16절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심판’한다는 것은 단 지파가 이스라엘의 기준과 모범이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단은 길의 뱀이요 밭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뱀과 독사의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느껴지지만, 이것은 단 지파의 지략을 말합니다. 숨어서 기다리다가 정확한 순간에 공격하는 능력, 즉 지혜로운 전략으로 적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 뒤에 야곱이 갑작스런 고백을 합니다. 18절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왜 이 고백이 여기에 나올까요? 단 지파가 지혜롭고 지략이 뛰어날 것이라는 말을 하다가, 야곱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 것 같습니다. 야곱 자신도 지략과 꾀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형의 발꿈치를 잡고,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사고, 아버지를 속이고. 그런데 그것이 자신을 혼돈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인생을 하나님은 과정과정을 통해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단 지파가 지혜롭다는 말 뒤에 이 고백을 붙인 것입니다. 인간의 지략이 아무리 탁월해도, 진정한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이것이 야곱이 평생에 걸쳐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방법을 찾아도, 진정한 복과 구원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내 노력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19절 “갓은 군대의 추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갓 지파는 위기에 몰릴 것 같지만 오히려 역전승을 거두는 역할을 합니다. 눈에 띄지 않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반격하는 지파입니다. 20절 아셀은 기름진 것을 생산하여 왕의 수라상을 차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지파들처럼 싸움을 잘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좋은 재료를 생산하여 왕의 식탁을 풍요롭게 채우는 일을 합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 역할입니다.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으로 비유됩니다. 자유롭고 민첩합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것처럼 그 역할을 감당할 것입니다.
갓, 아셀, 납달리는 유다나 요셉처럼 긴 축복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는 한 종류의 사람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눈에 띄는 역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감당할 때 공동체가 온전해집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고, 그것을 통해 함께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가십니다. 서로를 비교하며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내게 주어진 은사를 따라 내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면 됩니다.
●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24절)
오늘 본문에서 요셉에게 가장 풍성한 말씀이 선포됩니다. 22절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무성한 가지는 풍요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냥 무성한 것이 아니라 샘 곁에 있습니다. 생명의 물이 끊임없이 공급되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무성한 것입니다. 시편1:3절 말씀처럼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따라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은 복입니다. 그리고 그 가지가 담을 넘었습니다. 자기 자리를 넘어 다른 곳에도 영향을 끼치는 삶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이런 축복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23절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도다” 이 무성함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형들의 미움, 노예의 삶, 억울한 감옥.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왔습니다. 그런데 24절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요셉이 굳셀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전능자이신 하나님, 반석이신 하나님, 목자이신 하나님이 요셉의 손을 붙잡고 계셨습니다. 야곱은 전능자, 반석, 목자라는 단어를 연이어 사용합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형들에 대한 분노를 품지 않을 수 있었던 것, 노예 생활에서도 성실할 수 있었던 것, 감옥에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은 것.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사람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이 그의 손을 꼭 붙잡고 고난의 길을 함께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줄 수 없는 복을 주십니다.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깊은 샘에서, 생명을 잉태하고 기르는 복까지. 전능자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복입니다.
고난은 끝이 아닙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선포한 이 축복은 고난 없이 온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통과한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 어떤 고난의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무성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26절 “내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리로다” 하나님의 약속은 세대를 거치면서 점점 더 구체화되고 풍성해집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이삭을 거쳐 야곱에게 왔고, 이제 요셉에게 흘러갑니다.
27절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물어뜯는 이리. 강력한 전사의 이미지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용맹한 군사적 지파로 성장할 것이라는 선포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28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새번역은 “그는 아들 하나하나에게 알맞게 축복하였다”입니다. 야곱은 열두 아들 모두에게 같은 복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각자의 삶을 보고, 각자에게 맞는 복을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복은 준비된 사람에게 맞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구하기 전에 먼저 그 복을 담을 그릇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채 받는 큰 복은 오히려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 말씀 안에서 살아가고, 하나님 앞에서 성실한 삶을 사는 것이 복의 그릇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의 고백처럼, 우리의 지략과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내가 먼저 내려놓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비로소 진정한 복이 옵니다.
다른 하나는 고난을 통과하는 자에게 무성한 가지의 복이 옵니다. 요셉처럼 전능자이시고 반석이시고 목자이신 하나님의 손을 꼭 붙잡고 고난의 길을 걸어갈 때, 그 고난이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2026.05.27 | 매일성경
●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9절)
죽음을 앞둔 야곱의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육신이 노쇠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야곱의 영적인 눈은 오히려 더 밝았습니다. 손을 엇바꾸어 축복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고백하고, 죽음 뒤에도 이루어질 약속을 확신합니다. 육신의 눈은 어두웠지만 영적으로는 가장 선명했던 야곱의 고백이 오늘 본문입니다.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해 요셉이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데리고 야곱 앞에 왔습니다. 야곱이 묻습니다. “이들은 누구냐” 요셉의 대답이 눈에 띕니다. 9절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내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므낫세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내 고통을 잊게 하셨다”는 뜻이고, 에브라임은 “하나님이 나를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두 아들의 이름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요셉은 자녀를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내 것인 것처럼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되고, 하나님보다 자녀를 우상처럼 섬겨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존재로 바라볼 때, 부모의 역할도 달라집니다.
야곱은 11절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네 자손까지 내게 보이셨도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들의 얼굴을 보고, 그 아들의 아들들까지 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도한 것보다 더 놀랍게,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이루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드디어 야곱이 두 아들을 축복합니다. 요셉은 이스라엘의 오른손이 장자 므낫세의 머리에, 왼손이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닿도록 아들들을 배치했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오른손은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상징하는 손이었고, 반드시 장자의 머리 위에 놓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14절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야곱이 손을 바꾼 것입니다.
요셉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17절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혹시 눈이 안 보이는 아버지가 실수하신 게 아닐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19절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이것은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영적으로 분명하게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말했습니다.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창세기를 읽다 보면 이 패턴이 반복됩니다. 이스마엘보다 이삭, 에서보다 야곱, 르우벤보다 요셉, 므낫세보다 에브라임. 하나님은 세상의 순서를 따르지 않으십니다. 세상에서 뛰어나고 강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예수님이 12제자를 부르실 때도 세상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연약한 열두 사람을 통해 시작된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입니다. 우리의 뛰어남이 아닌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중요합니다.
●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15절)
축복 기도 중에 야곱이 고백합니다. 15-16절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란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세 가지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대대로 함께하신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이제 야곱의 하나님이 되었고, 그 하나님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하나님이 되어달라는 간구입니다. 신앙은 세대를 거쳐 전해집니다.
둘째, 출생부터 지금까지 기르신 하나님입니다.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두고 돌아보니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목자가 되어 인도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힘으로 살아온 것 같았지만, 하나님이 이끌어 오셨습니다.
셋째, 모든 환란에서 건지신 하나님입니다. 야곱의 인생에는 환란이 많았습니다. 형에게 쫓기고, 외삼촌에게 속이고, 딸이 성폭행당하고,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환란을 억울함으로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환란에서 건져주셨고,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고난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입니다. 야곱처럼 “하나님이 환란에서 건져주신다”는 시각으로 바라볼 때,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진다고 확신할 때 고난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과정이 됩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마지막 말을 남깁니다. 21절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리라” 놀라운 고백입니다. 야곱은 한때 눈에 보이는 축복을 얻기 위해 힘썼던 인생이었습니다. 그런 야곱을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성숙시키십니다.
지금 야곱은 애굽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 아닙니다. 백성의 숫자도 아직 작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확신합니다.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죽는다 해도 하나님의 약속은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 후손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목자이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출생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이 이끌어 오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과정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었습니다. 오늘도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아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야곱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 확신 위에 오늘 하루를 살아갑시다.
2026.05.26 | 매일성경
●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29절)
야곱이 애굽에 온 것은 130세였습니다. 그동안 죽었다고 생각했던 요셉을 만났고, 고센 땅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리고 17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야곱의 나이 147세,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야곱의 인생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험악한 세월이었습니다. 형을 속이고 도망쳤고, 외삼촌에게 속임당하고,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먼저 떠나보냈고, 아들 요셉을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애굽 땅에서 보낸 마지막 17년은 달랐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을 만났고, 고센 땅에서 가족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야곱이 마지막을 준비하는 장면입니다.
27절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어제 말씀과 대조해보면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애굽 백성들은 기근 속에 모든 것을 잃고 바로의 종이 되었습니다. 특권층인 제사장들만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가족은 고센 땅에서 생업을 얻고 생육하고 번성합니다. 총리인 요셉의 배려도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주신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민족을 이루게 하시려고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시고, 총리가 되게 하시고, 야곱 가족이 고센 땅에 오게 하신 모든 과정을 통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기근으로 황폐할 때 하나님의 약속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부릅니다.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앞두고 자녀들에게 유언을 남긴다면 어떤 내용일까요? 분명 가장 중요한 내용일 것입니다. 29-30절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실에 장사하라”
야곱이 원한 것은 단 하나, 애굽 땅이 아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묻히는 것이었습니다. 허벅지 아래 손을 넣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가장 엄중한 맹세의 방식이었습니다. 죽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약속을 의미했습니다. 요셉이 30절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라고 했는데도 야곱은 31절에서 다시 “내게 맹세하라”고 합니다. 그만큼 중요한 부탁입니다.
왜 그토록 가나안 땅에 묻히기를 원했을까요? 야곱에게 애굽은 이 세상이었습니다. 비록 풍요롭고 문명이 발달한 곳이지만, 자신이 머물러야 할 고향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가야할 본향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입니다. 비록 지금은 그곳에 없지만, 죽어서라도 그 약속의 땅에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자기 몸이 묻힌 곳이 어디인지를 통해 자손들에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돌아갈 곳은 이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곳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속한 사람으로 살고 죽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우리도 화려하고 풍요로운 세상 속에 살지만 이 땅이 전부가 아니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야곱이 비록 몸은 애굽에 있지만 마음에 하나님의 약속을 품고 살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돌아갈 본향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임을 항상 소망하며 하나님 앞에 설 날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5절)
48장에서 야곱은 더욱 쇠약해졌습니다. 요셉이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그 야곱이 죽음 직전에 꺼낸 이야기는 세상에서 이룬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3-4절 “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를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루스, 곧 벧엘이었습니다. 형을 피해 도망치던 야곱이 돌을 베개 삼아 잠들었다가 하나님을 만났던 그 자리.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고 하셨던 그 약속. 험악한 세월을 살아오면서도 놓지 않았던 그 약속. 야곱은 죽음 앞에서 그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는지가 우리가 무엇을 붙잡고 살아왔는지를 보여줍니다. 야곱은 한때 세상의 축복을 갈망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 선 야곱이 기억한 것은 벧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비록 험악한 세월을 살았지만 야곱의 인생 전체를 이끌어오셨고, 이제 세상의 축복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셨습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특이한 말을 합니다. 5절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 될 것이라” 요셉의 두 아들을 야곱이 자기 아들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을 ‘장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장자는 두 배의 몫을 받습니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받아들임으로써, 요셉은 한 몫이 아닌 두 몫을 받게 됩니다. 실제로 후에 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가 각각 땅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주어지지만, 앞으로 만들어질 이스라엘 민족의 왕권과 메시아가 오는 조상은 유다가 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우리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애굽이 아닌 가나안 땅에 묻히기를 원했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풍요로워도 그곳이 우리의 최종 고향이 아닙니다.
다른 하나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입니다. 야곱의 험악한 세월이 그를 오늘의 야곱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어려움도 하나님이 우리를 빚어가시는 과정입니다. 죽음 앞에서 벧엘의 약속을 기억한 야곱처럼, 우리도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에 품고 살아갑시다.
2026.05.25 | 매일성경
●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황폐하니”(13절)
오늘 본문은 좀 특이합니다. 야곱 가족의 애굽 이주 이야기가 흘러가다가 갑자기 애굽 백성들이 양식을 구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앞뒤 이야기를 연결해보면 오늘 본문이 없어도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는 왜 이 이야기를 여기에 넣었을까 궁금합니다.
13절 “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 먹을 것이 없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황폐하니” 흉년 7년 중 이미 2년이 지났고 앞으로 5년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5년 동안 애굽에서 일어난 일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먼저 돈을 가지고 와서 양식을 샀습니다. 그런데 기근은 계속됐습니다. 이제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먹어야 삽니다.
요셉이 말했습니다. 16절 “너희의 가축을 내라” 돈이 없으면 가축으로 받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말과 양 떼와 소 떼와 나귀를 가져왔고, 요셉은 그 대가로 양식을 주었습니다. 그래도 기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축도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요셉에게 왔습니다. 18절 “우리에게는 우리의 몸과 우리 토지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면서 스스로 제안했습니다. 19절 “우리 몸과 우리 토지를 먹을 것을 주고 사소서. 우리가 토지와 함께 바로의 종이 되리이다” 요셉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20절 “요셉이 애굽의 모든 토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바치니” 애굽의 모든 토지가 바로의 소유가 되었고, 백성들은 바로의 종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불편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던 지혜롭고 선한 요셉이 백성들의 돈을 거두고, 가축을 거두고, 토지를 거두고, 결국 사람들을 종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극심한 기근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무질서한 죽음을 막기 위한 통제 시스템을 요셉이 구축한 것으로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은 지금 자신이 왕이 아닙니다. 애굽이라는 나라 속에서 총리로서의 직무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이런 위기의 상황 속에서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룰 야곱의 가정을 잘 보존하는 사명이 주어졌고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25절에서 백성들은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착취당했다는 분노가 아니라, 살았다는 감사가 담겨 있습니다. 요셉이 이 과정을 통해 사람들의 생명을 구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요셉이 정한 제도를 보면 24절 “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오분의 사는 너희가 가져가서 너희의 종자도 삼고” 그 당시 어떤 나라는 수확의 삼분의 일을 세금으로 거두기도 했습니다. 극심한 기근 상황에서 오분의 일만 내도록 한 것은 오히려 관대한 제도였습니다. 이처럼 요셉은 위기 속에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합니다.
●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니라”(20절)
오늘 본문에서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애굽 땅과 가나안 땅”(13,14,15).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가나안 땅도 이 기근의 상황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야곱의 가족이 가나안 땅에 그대로 머물렀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애굽 백성들처럼 먹을 것이 없어 황폐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의 가족은 고센 땅에 있습니다. 내일 본문인 27에는 이렇게 기록됩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세상이 기근으로 신음하는 그 시간에 이스라엘은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22절, 26절은 갑작스런 제사장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려줍니다. 애굽의 제사장들은 바로에게 녹을 받기 때문에 토지를 팔지 않았고, 따라서 바로의 소유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의 권력이 얼마나 절대적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사장조차 바로의 녹을 먹으며 바로에게 충성하는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제사장들과 같은 특권층들만 토지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이상의 특권과 안전을 고센땅에서 누렸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기근이라는 위기 속에서도 자기 백성을 가장 안전하고 풍요롭게 보호해주십니다.
한편 모세는 이 이야기를 통해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게 될 환경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센 땅에서 번성하겠지만, 이런 절대 권력 아래 살다 보면 언젠가 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출애굽기를 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노예가 되어 고통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씨앗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세상 나라의 특징입니다. 먹고 살게 해주겠다고 하면서 결국 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돈을 주고 양식을 삽니다. 그러다 돈이 떨어지면 가축을 내주고, 가축이 떨어지면 토지를 내주고, 결국 자기 자신을 종으로 내어줍니다. 세상이 주는 풍요 속에서 정작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제공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돈의 종, 성공의 종, 남의 시선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을 하나씩 내어주면서 자유를 잃어가는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 나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빼앗으시는 분이 아니라 주시는 분입니다. 풍요로 우리를 종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영적 자유와 생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가족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만드시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 나라와 다른 나라, 착취하고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고 나누는 나라를 만드시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세상 나라의 본질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풍요를 약속하지만 그 안에는 종으로 만드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살면서도 무엇이 우리를 종으로 만들고 있는지 깨어 분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착취하고 군림할 때, 우리는 섬기고 나누는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머무는 곳마다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2026.05.22 | 매일성경
● “내가 너희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18절)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형제들과 화해하는 장면이 바로의 궁중에까지 알려졌습니다. 바로와 신하들이 기뻐합니다. 그리고 이 기쁨이 어떻게 야곱에게까지 전해지고, 야곱의 인생에 가장 큰 반전이 어떻게 일어나는지가 오늘 이야기입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명령했습니다. 18절 “너희 아버지와 너희 가족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19절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너희 아버지를 모셔 오라” 어제는 요셉이 애굽 땅으로 오라고 권면했다면 오늘은 최고 권력자인 바로가 동일한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당시 수레는 애굽의 최고 이동 수단으로 왕실 권위의 상징이었고 최첨단 기술의 결정체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바로의 의전 차량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바로는 그것을 내어줍니다. 가나안 땅의 살림들도 미련 두지 말고 버려두고 오라고 합니다. 애굽 땅의 좋은 것을 모두 주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저자가 이 장면을 기록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요셉의 성공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야곱에게 약속하신 민족의 형성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바로 왕을 움직이셨습니다. 바로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셨고, 그 과정에서 요셉을 총리로 세우시며, 이제는 세계 최강국의 왕이 야곱의 가족을 위해 최고의 혜택을 베풀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세상의 가장 강한 권력도 사용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눈에 띄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요셉의 기쁜 소식을 듣고 함께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 사람이 아닙니다. 히브리인 노예 출신입니다. 그런데도 바로의 신하들이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요셉이 총리의 자리에서 자기 유익을 추구하지 않고 나라를 살리는 일에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7년 흉년을 대비해 수많은 생명을 구한 요셉, 그의 헌신을 신하들이 보았습니다. 그러니 그의 기쁜 소식이 자신들의 기쁨이 된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기보다 시기와 질투가 더 자연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믿지 않는 애굽 사람들조차 요셉의 기쁨을 함께 기뻐했습니다. 누군가의 기쁨을 진심으로 기뻐해 줄 수 있는 것, 누군가의 아픔을 함께 아파해 줄 수 있는 것. 이것이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이어 요셉은 형들에게 수레와 길 양식을 주었고, 각기 옷 한 벌씩을 주고,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줍니다. 요셉의 이야기에서 옷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채색옷을 입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던 소년, 형들에게 그 옷이 벗겨지고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그 채색옷에 짐승의 피를 묻혀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요셉이 형들에게 옷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형들은 이 옷을 받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요셉의 채색옷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 옷 하나 때문에 시기하고 미워했던 자신들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요셉이 자신들에게 옷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들을 용서했습니다. 과거의 그 일로 당신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베냐민에게는 은 300과 옷 다섯벌을 주지만 이제 형들은 비교하거나 시기하지 않습니다.
●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28절)
형들을 돌려보내며 요셉이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24절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마십시오” 이제 22년 전의 범죄가 아버지에게 알려질 것입니다. 형들은 가는 길에 그 이야기를 어떻게 꺼낼지 고민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 누가 더 나빴는지 따지다 보면 다툼이 벌어집니다. 요셉이 그것을 미리 차단했습니다. 지난 일에 대해 책임 공방하지 마십시오. 끝난 일은 끝난 일로 두고,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우리 삶에서도 이런 장면이 많습니다.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오래된 일을 다시 꺼내며 싸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는지를 따지다 보면 상처만 더 커집니다. 요셉의 말이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지난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앞으로 함께 걸어갈 방향을 찾는 것이 지혜입니다.
형들이 가나안에 도착해 야곱에게 말했습니다. 26절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나이다” 야곱이 어리둥절했습니다. ‘어리둥절하다’의 의미가 “마음이 무감각하다, 기절하다”입니다. 22년 동안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들이 살아 있다는 것, 그것도 애굽의 총리가 됐다는 것.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수레를 보았습니다. 수레가 요셉이 애굽에 있다는 것과 높은 지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증거가 되었습니다.
28절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야곱의 고백이 우리 마음을 울립니다. “족하도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들이 살아 있다는 것 하나로 충분합니다. 22년 동안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 오셨습니다.
여기서 저자가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른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21,28). 오늘 본문에서 야곱과 이스라엘이 번갈아 등장합니다. 이것은 야곱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어 가는 이야기임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입니다. 바로의 신하들이 요셉의 기쁨을 함께 기뻐했듯, 우리도 서로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고 서로의 슬픔을 함께 아파하는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은 끝났다고 생각해도 하나님은 끝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22년 동안 끝났다고 생각했던 그 일이 오늘 회복되었습니다. 우리가 포기한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