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20:1-15절/왕 노릇 하리라(25.07.31)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2절)

​19장 후반부는 백마 타신 예수님께서 짐승과 거짓 선지자를 유황불 못에 던지셨습니다. 그렇다면 두 짐승에게 권세를 주고 부리던 악의 우두머리인 용은 어떻게 될까요? 본문이 용과 그 추종자들의 결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절에 한 천사가 등장합니다.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내려와서 용을 결박합니다. 그런데 이 용의 정체가 2절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도들을 공격해서 믿음에서 떨어지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이 용이 결박되는데 그 기간이 천년이라고 합니다. 이제 용은 더 이상 만국을 미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3절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고 합니다.

이렇게 잠깐 놓이면 또 용의 세상이 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는데 그 결과가 7-10절에 나옵니다. 잠깐 놓인 용이 이전에 하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땅의 사방 백성들을 모아 대적합니다.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이 많다고 합니다. 성도들을 공격하려 합니다. 그런데 9절 갑자기 하늘에서 불이 내려 그들을 태워 버립니다. 그리고 10절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고합니다. 이미 두 짐승이 들어가 있는 유황불 못에 최종적으로 용이 들어갑니다. 이렇게 모든 게임이 끝이 납니다. 사탄의 완전한 패배입니다.

1-3절에서 강조하는 내용은, 그렇게 천하를 호령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도들을 무섭게 공격했던 용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한 천사가 쇠사슬로 결박하니 천 년 동안 결박을 당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천 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요한계시록의 해석이 달라집니다. 보통 네 가지의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전천년설입니다. 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후천년설은 반대로 천년 후에 재림하십니다. 셋째, 무천년설은 계시록에 많은 상징들이 등장하는 것처럼 천년이라는 숫자도 하나의 상징으로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마지막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비성경적인 해석으로 역사를 7시대로 나누어 성경의 내용들을 조립해서 마지막 때 일어날 일들을 만들어 냅니다. 계시록의 잘못된 해석이 대부분 여기서 나왔고 시한분 종말론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설명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요한계시록은 당시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위해 기록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현재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용기를 잃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20장 말씀도 천년왕국이 언제 올지 논쟁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시록의 강조점처넘 “교회와 성도의 승리”에 관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교회가 그런 승리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6절)

​그래서 용이 결박된 천년의 기간은 성도들에게는 왕노릇하는 기간입니다. 4절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번 보좌가 나옵니다. 4절의 “보좌”와 11절의 “흰 보좌”입니다. 완전히 반대입니다. 4절의 보좌는 승리한 성도들이 왕 노릇하는 곳이라면, 11절의 흰 보좌는 용과 짐승을 추종하던 자들이 최종적으로 심판을 받는 장소입니다.

4절에서 천년 동안 왕노릇하는 자들은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라고 합니다. 어떤 이단은 이 말씀으로 영사불사를 주장합니다. 하늘에 있는 순교자들의 영혼과 이 땅에서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만나 죽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하늘에 있는 순교자들과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을 구분하는 내용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순교자들이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아 순교를 당했고 그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순교해서 하늘에 있든지, 아니면 믿음으로 순교의 길을 걷고 있는지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셔서 사탄을 결박하셨습니다. 결박된 사탄은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미 성도는 승리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존재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으로 살아갑니다. 이처럼 성도는 이긴 싸움을 싸우는 존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주어진 승리를 확신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용과 짐승을 따라 우상을 숭배하고 세상 정신을 따라 살아간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11절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흰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그 앞에는 두 종류의 책이 있습니다. 하나는 복수로 되어 있고 하나는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책들”은 12절 하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입니다. 이들은 기록된 행위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모든 행위가 기록되어 있기에 책들입니다.

하지만 다른 책은 “생명책”입니다. 생명책에는 성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위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검은 우리를 주님의 보혈의 흰 세마포 옷으로 입혀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영광이며 특권입니다. 지금이 사탄이 결박된 천년의 기간이고 성도들이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는 기간입니다. 성도의 정체성을 확신하고 승리의 삶을 살아갑시다.

요한계시록19:11-21절/백마 탄 자(25.07.30)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11절)

​18장은 큰 성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특징은 크고 거대한 성이 한 시간에 망해 버립니다. 또한 결코 다시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바벨론의 멸망은 교회와 성도의 승리입니다. 그래서 19장 앞부분은 할렐루야 찬양이 울려 퍼졌고 또한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열립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승리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통해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말씀합니다. 바로 백마를 탄 자를 통해서입니다. 11절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어두운 현실 속에서 바라보아야 할 분이 계십니다. 흰색이 승리를 상징하는데 여기 백마 탄 자는 바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백마 탄 왕자처럼 등장하십니다. 그런데 6장에서도 인 재앙이 시작될 때 흰 말을 탄 자가 나왔는데, 이 분도 예수님일까? 6장은 흰 말만 나온 것이 아니라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이 나와서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세상을 심판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6장의 흰 말 탄 자는 예수님은 아닙니다.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백마를 타고 등장하시는 장면은 오늘 본문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11절 하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주님은 타협하지 않으시고 말씀의 기준을 따라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12절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1:14절에서도 “그의 눈은 불꽃 같고”라고 했는데, 불꽃 같은 눈으로 온 세상을 감찰하십니다. 본문은 심판과 관련되기에 불꽃 같은 눈으로 사람의 마음 깊은 곳까지 살피시기에 주님의 심판은 정확합니다. 많은 관들은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적혀 있다고 하는데, 16절에도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십니다. 당시 로마 황제가 온 세상의 왕으로, 또 주인으로 경배를 받던 시대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왕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유일한 주인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12절에 적혀 있는 이름은 예수님만 아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예수님께서 이루실 일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한 이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13절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예수님은 “피 뿌린 옷”을 입고 계십니다. 15절을 보면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라고 했는데 짐승과 추종자들을 심판하시면서 피가 옷에 뭍은 것입니다. 이런 묘사는 주님께서 철저히 심판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14절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고 합니다. 백마를 탄 예수님을 따르는 하늘 군대가 있습니다. 이들은 피뭍은 옷이 아닌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주님을 따릅니다. “깨끗한 세마포 옷”은 8절에서 어린양의 신부가 입는 옷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바른 행실로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은 성도들이 승리하신 주님과 함께 백마를 타고 승리의 전쟁에 함께 합니다. 싸움은 주님이 하시고 성도들은 그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 성도들의 영광과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13절 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천지 만물이 창조될 때 말씀으로 함께 하셨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주님이시며, 말씀으로 온 세상을 심판하실 주님이십니다. 그러기에 15절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라고 하는데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은 말씀의 검입니다. 히4: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본문 21절은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라고 합니다. 말씀이 예리한 기준이 되어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17절)

​이렇게 예수님께서 승리하시면 바벨론과 추종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17-21절입니다. 한 천사가 모든 새들을 향해 외치는데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고 합니다. 마치 전쟁이 끝난 후 승리자들이 떠나고 난 자리 죽은 자들의 시체를 새들과 짐승들이 먹는 장면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큰 잔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19장에는 두 개의 잔치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9절의 “어린 양의 혼인 잔치”와 17절의 “하나님의 큰 잔치”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을 따른 성도들은 어린양의 신부가 되어 할렐루야 찬양하며 영광의 잔치에 참여합니다. 반면 예수님을 외면하고 짐승을 따르며 풍요와 쾌락을 추구하던 자들은 새들에게 먹히는 심판의 잔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주님 재림하실 때 모든 사람은 두 잔치 중 하나에 반드시 참여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로마, 즉 세상의 신부가 되어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어린양의 신부가 되어 살아갈 것인가?

또한 무너질 바벨론 세상을 주도했던 짐승과 또 다른 짐승인 거짓 선지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자신의 군대를 모아 백마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하는데,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과의 싸움은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결국 패배하여 산 채로 유황불 못에 던져집니다. 그런데 여기에 다시 설명하는 내용이 20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고 합니다. 이런 거짓 선지자의 심판은, 그 당시 짐승의 표를 받고 우상에게 경배하며 세상으로 나가려는 자들에게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그 결과가 이렇다는 겁니다.

최후 승리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승리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와 교회의 승리입니다. 그런데 이 승리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닌 수고와 인내의 열매입니다. 십자가 뒤에 얻게 되는 영광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어린양의 신부로서 주님과 함께 거룩한 삶을 살아갑시다.

요한계시록18:20-19:10절/할렐루야(25.07.29)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20절)

​큰 성 바벨론을 따르던 땅의 왕들과 땅의 상인들 그리고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그들은 음행하고 사치하며 치부했습니다. 울며 애통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의 심판은 바꿔 말하면 큰 성 바벨론의 지배 아래서 고통 당하던 성도들에게는 승리의 날입니다. 그래서 20절은 성도들과 사도들, 선지자들에게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 인내하는 성도들을 주목하셨습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계셨습니다. 24절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 중에서 발견되었느니라”고 하시면서 이에 대한 보응으로 땅의 사람들에게 심판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 같았지만 다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하심이 이처럼 분명하게 나타날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성도들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벨론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큰 맷돌을 바다에 던지는 장면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결코 다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18:21-24절까지 “결코 다시”라는 말이 6번이나 반복됩니다. 심판으로 인해 결코 다시 들리지 않는 소리, 보이지 않을 모습들이 있습니다.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기쁨의 시간이 끝이 났다는 겁니다. 또한 세공업자가 결코 다시 보이지 않습니다.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로(12절) 돈을 모으고 사치했는데 그럴 수 없습니다. 모든 경제가 무너집니다.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들리지 않습니다. 풍요의 시대가 가고 핍절의 시대가 옵니다. 등불 빛도 결코 다시 비치지 않습니다. 저녁이 되면 등불 빛을 켜는 것이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인데 그런 일상이 무너집니다. 가장 슬픈 일은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들리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결혼의 기쁨이 없어지고 뿐만 아니라 미래가 절망입니다.

왜 이런 심판을 받게 되었는지를 다시 설명합니다. 23절 “너의 상인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로 말미암아 만국이 미혹되었도다”라고 합니다. 이들은 스스로 왕이 되어 교만하며 하나님께 도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존귀한 성도들을 박해하였습니다. 또한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우상을 숭배하도록 하였습니다. 세상 정신을 따라 살게 하였습니다. 멸망의 길로 인도한 것입니다. 그러니 심판이 마땅합니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6절)

​그렇다면 큰 성 바벨론과 추종자들의 심판으로 결코 다시 기쁜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이때 성도들은 어떤 소리, 어떤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인가? 그것이 19장의 내용입니다. “할렐루야”를 외쳐 부릅니다. 19:1절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1-6절까지 “할렐루야”가 4번 반복됩니다. “할렐루야”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의미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영광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글로 기록된 본문 속에서 할렐루야 찬양하는 승리한 성도들의 감격과 기쁨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참되고 의로운 심판으로 큰 음녀인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피 흘린 성도들에게 승리를 주셨으니 그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6절은 이 찬양 소리가 얼마나 큰지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라고 합니다. 우렛소리와 같은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대한 감격입니다. 이 찬양에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동참합니다.

이 시대 우리가 회복해야 할 찬양이 바로 “할렐루야”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통치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승리와 영광의 날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께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으로 “할렐루야” 찬양으로 영광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주일에 모여 예배할 때마다 이 은혜와 감격을 가지고 할렐루야 소리 높여 하나님께 경배합시다.

헨델이 작곡한 ‘메시아’ 중에 그 유명한 ‘할렐루야’라는 곡이 있습니다. 메시아를 작곡하기 전 1741년 헨델은 파산과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거기다 중풍과 류마티스 등으로 자신이 음악가로서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절망의 시기에 한 단체로부터 자선 음악회에서 연주할 곡을 써 달라는 의뢰를 받고 곡을 쓰게 됩니다. 놀랍게도 260쪽에 해당하는 악보를 단 24일 만에 완성합니다. 헨델은 메시아 완성 직후 “나는 내 앞에서 하늘을 보았고 또한 위대한 하나님을 분명히 보았다.”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악보 끝에 SDG라고 기록을 했는데 이 말은 라틴어로 ‘Soli Deo Glroria’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의 줄임말입니다.

1742년 영국에서 초연될 당시 영국 국왕이 참석을 했는데 ‘할렐루야’가 연주 될 때 그 웅장함에 감동되어 앉아 있을 수가 없어 기립을 한 후로 ‘할렐루야’가 연주될 때는 모든 청중이 기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웅장한 헨델의 ‘할렐루야’가 바로 오늘 본문을 근거로 작곡이 되었다고 합니다. 헨델은 본문 속에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그로 인해서 할렐루야 목소리 높여 찬양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의 기쁨이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7절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입니다. 어린양이신 예수님과의 결혼입니다. 예수님이 신랑시신데, 그렇다면 신부는 바로 교회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아내를 위해 예수님은 어린양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어린양의 신부가 얼마나 존귀한 자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신부가 입는 드레스는 8절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어야 하는데 이는 성도들의 올바른 삶이라고 합니다. 구원받았다고 우리가 함부로 살 것이 아닌 더욱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룩한 어린양 예수님의 신부로서 매일 깨끗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여전히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께 맡깁시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통치하십니다. 성도의 삶은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든 할렐루야 찬양으로 하나님을 경배합시다.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한 신부입니다. 올바른 삶으로 깨끗한 세마포를 준비합시다.

요한계시록18:9-19절/한 시간에 망하였도다(25.07.28)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10절)

​일곱 대접 재앙 이후 17장부터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큰 성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내용입니다. 큰 성 바벨론은 무엇을 추구했으며 그 결과 어떤 심판이 임하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17장에서는 바벨론을 “큰 음녀”로 표현했고, 18장에서는 성도들은 거기서 나와 바벨론의 죄에 참여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바벨론의 멸망으로 바벨론을 따르던 자들에게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지를 설명합니다. 세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9-10절은 땅의 왕들, 11-16절은 땅의 상인들, 그리고 17-19절은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입니다.

먼저 땅의 왕들은 바벨론과 음행하고 사치했습니다. 세상 정신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 나라가 영원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10절에는 바벨론을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라고 표현합니다. “견고한”이라는 단어가 새롭게 들어가 있는데 땅의 왕들의 기대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절대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나님의 진노로 불에 타 연기가 올라옵니다. 그것을 보고 자신들에게도 재앙이 올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렇게 견고한 큰 성 바벨론은 10절 하 “한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고 합니다. 본문에 반복되는 말들이 많은데, 가장 중요한 말은 10절과 17절, 19절에 반복되는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입니다. 사람들이 견고하다고 생각한 바벨론이 한 시간 만에 망해버린다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겉보기만 크고 화려했지 실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전3:12-15절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렇습니다. 불 타 없어질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한 부가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17절)

​땅의 상인들도 바벨론을 위해 울고 애통합니다. 그런데 이유가, 바벨론의 심판을 보면서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함이 아닌 더 이상 매매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치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이들의 관심은 땅이 전부입니다. 12-13절은 상인들이 매매했던 품목들을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금, 은과 보석은 물론이고 고급 옷감과 그릇들입니다. 특히 주목을 끄는 품목은 13절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입니다. 사치와 치부는 새롭고 고급스러운 부분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관심을 끝이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들의 치부로 인해서 다른 많은 사람들은 고통을 겪게 된다는 겁니다. 이들이 매매하는 것들 중에는 “종들과 사람들의 영혼들”까지 있습니다. 새번역은 “노예와 사람의 목숨”으로 번역했습니다. 사람을 노예로 사고 파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람의 목숨도 돈으로 거래하는 무자비한 세상입니다. 한마디로 돈이면 못하는 일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 사람들이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 14절 “바벨론아 네 영혼이 탐하던 과일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라고 하는데 입으로 맛보는 맛있는 과일이나 음식, 그리고 눈으로 보는 빛난 것들입니다. 꼭 우리 시대를 보는 것 같습니다. 먹방 시대입니다. 맛있는 음식에 관심이 많습니다. 또한 눈으로 보는 것에 집중합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비슷합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들에 시대 정신이 반영되어 있고 그것을 주도하는 것이 큰 성 바벨론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잘 분별해야 합니다. 롬12:2절 말씀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마지막으로는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입니다. 이들 역시 울며 애통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땅이 아닌 하늘에, 그리고 순간이 아닌 영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세상은 사치와 치부에 관심이 있지만 성도는 영적인 부요함을 누려야 합니다. 3장에서 주님은 라오디게아교회를 책망하셨습니다. 부요해서 부족함이 없다고 자랑하는 자들을 향해 계3:17절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이 시대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오늘 하루를 영원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갑시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는 모든 것이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 견고한 삶이 됩시다.

요한계시록16:12-21절/깨어 자기 옷을 지키라(25.07.25)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15절)

​오늘 본문은 일곱 대접 재앙 가운데 여섯째와 일곱째입니다. 여섯째 천사가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습니다. “유브라데”는 9:14절 여섯째 나팔 재앙 때도 등장했던 강입니다. 이곳은 로마와 로마가 두려워한 파르티아 군대의 경계선입니다. 여섯째 나팔 재앙은 파르티아 군대가 로마로 쳐들어와 공격하는 전쟁 상황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또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고 합니다. 로마와 파르티아 간의 전쟁이 아니라 이들이 연합군을 형성합니다. 말라버린 유브라데 강은 동방에서 오는 왕들이 쉽게 건너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연합군을 형성하는 이유는 13절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여기 개구리가 등장합니다.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 중 두 번째 재앙이 개구리 재앙입니다. 개구리는 부정한 짐승입니다. 그래서 “세 더러운 영”을 개구리에 비유합니다. 이 더러운 영들이 용과 짐승, 그리고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옵니다. 14절은 다시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고 하면서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내용이 귀신, 즉 사탄이 주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흉내내어 용과 짐승, 거짓 선지자로 활동하면서 그들의 입으로, 또는 이적으로 왕들을 모아 하나님과 전쟁을 합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14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고 합니다. 사탄의 나라가 연합군을 형성하여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교회를 공격합니다. 그런데 그 전쟁의 날을 “하나님의 큰 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날입니다. 세상 군대가 아무리 많고 거대해도 결코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미 승부는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의 승리요 세상 나라의 패배입니다. 이들이 모이는 곳이 16절 “아마겟돈”입니다. 원어로 ‘하르므깃도’로 “므깃도의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곳은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왕들이 패배한 곳이며(삿4-5장) 거짓 선지자들이 패망한 장소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은 영적 전쟁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핵심은 용과 짐승, 거짓 선지자가 패배하는 장소입니다.

이런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성도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15절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그런데 도둑같이 갑자기 오십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는 삶은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않는 삶입니다. 이것은 3장에서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에 권면한 말씀과 비슷합니다. 사데교회는 안타깝게도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면서 3:3절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이어 3:4절은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도둑같이 오십니다. 그러니 옷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유한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은 미지근한 상태였고 더 큰 문제는 자신들의 영적인 상태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곤고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3:18절은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하십니다. 이처럼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이 권면 속에 당시 성도들의 고민과 기도가 들어 있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연합합니다. 거대합니다. 세상이 이길 것 같습니다. 세상이 영원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살기 위해서는 세상 편에 서야 하고, 그들과 어울려야 하고 그들의 길을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성도들에게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 주님께서 반드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성도들에게 승리는 주실 것이니 항상 깨어 거룩한 옷을 입고 세상 앞에 흔들리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19절)

​마지막 일곱째 대접은 공중에 쏟아집니다. 공중은 사탄이 권세를 잡은 곳입니다. 이곳에 진노의 대접이 쏟아지자 성전 보좌에서 음성이 들리는데 “되었다”고 합니다. “다 이루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결과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큰 지진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집니다. 세상의 모든 성이 무너집니다.

특히 19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받습니다. 이미 14:8절은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고 했는데 그것이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서 기억하신 바 되어”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죄악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시고 그에 합당한 보응을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수고와 눈물과 인내도 빠짐없이 기억하시고 복으로 갚아주시지만, 죄에 대해서는 기억하시고 갚으십니다. 큰 성 바벨론은 창11장에서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처럼 하나님께 도전하고 하나님 없는 삶을 추구하였습니다. 거룩함이 아닌 거대함을 추구하였습니다. 스스로가 신이 되어 살아가려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여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런 바벨론이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게 됩니다.

21절부터는 다시 한번 바벨론과 그를 따르는 세상에 임하는 심판을 설명합니다. 무게가 한 달란트(26-41kg)되는 우박이 떨어집니다. 이 재앙을 피해 살아날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입술은 어떤 도구인가를 생각합니다. 전쟁을 위해 사람을 모으는 입술이 아닌 복음을 전하고 평화를 이루는 입술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 언제 오실지 모르는 마지막 때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거룩한 옷을 입고 구별된 성도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거대한 세상을 따라 살지 않고 거룩한 성도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요한계시록16:1-11절/의로운 심판(25.07.24)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2절)

​일곱 대접 재앙이 시작됩니다. 성전에서 큰 음성이 들립니다. 1절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진행하시는 일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는 곳이 “땅”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용과 짐승이 왕 노릇하며 자신들이 주인인 것처럼 행동했던 장소입니다. 하나님 흉내를 내던 곳입니다. 그런데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2절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라고 하는데 오늘 본문은 다섯 번째 천사까지 대접을 쏟는데 그 장소가 다릅니다. 첫 번째는 “땅”이고 두 번째는 “바다”이며, 세 번째는 강과 물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해이고, 다섯 번째는 짐승의 왕좌입니다. 세상 모든 곳에 예외 없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설명합니다. 2절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입니다. 우리가 계시록을 묵상하면서 잊어서는 안되는 내용입니다. 심판의 대상은 고난 속에서 믿음을 지킨 소수의 성도들이 아닌, 짐승의 세상에서 짐승을 따르고 짐승을 우상처럼 경배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그 안에서 부와 안전을 누렸습니다. 성공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 세상이 영원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곳에, 그 사람들에게 진노의 대접이 쏟아집니다. 독한 종기가 나서 고통을 당합니다.

둘째 천사는 대접을 바다에 쏟습니다. 그러자 3절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피”가 네 번 반복됩니다(3,4,6). 3절과 4절의 “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바다와 강물이 피로 변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6절에 두 번 반복되는 “피”는 성도들과 선지자들이 흘린 피입니다. 그 결과로 바다와 물이 피로 변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짐승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도들을 핍박하고 조롱했습니다.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선지자들의 외침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이들이 피를 경험하게 됩니다.

3절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단어는 “모든”입니다. 대접 재앙으로 모든 생물이 죽게 됩니다. 이것은 8:8-9절과 비교됩니다.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더라”고 합니다. 계속 강조했듯 나팔 재앙은 삼분의 일이 피해를 당합니다. 나팔 재앙 앞에 일어난 인 재앙은 사분의 일이 피해를 입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 것이 죽게 됩니다. 최종적인 심판입니다.

세 번째 천사가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은 후 이렇게 선포합니다. 5절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7절도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어제 본문인 15:3,4절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대접 재앙을 비롯한 모든 재앙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의롭지 않은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준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사람들과 세상이 정해 놓은 기준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따라 살아야 하는지가 분명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9절)

​넷째 천사가 대접을 해에 쏟자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웁니다. 사람들에게 온기를 주고 에너지의 원천인 해가 심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사실 해는 위험한 것입니다. 해가 우리와 조금만 가까워도 우리는 태워집니다. 반대로 조금만 멀어져도 얼어 죽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따뜻한 햇볕 아래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적정한 거리를 유지해서 운행하시기 때문입니다. 해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계가 이렇게 하나님의 완벽한 손길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로 문제가 생기니 해가 사람들 태우는 도구가 됩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9절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고 합니다. 11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섯째 대접이 짐승의 왕에게 쏟아지니 사람들이 아파서 고통하며 심지어 혀를 깨물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11절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고 합니다. 이런 내용이 9:20-21절에도 나왔습니다. 나팔 재앙이 임했는데 그 결과 “회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소속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짐승에게 속한 자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계시록은 심판에 대한 내용이면서도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재앙의 목적도 그런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계속 회개하지 않습니다. 고집을 피우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그렇다면 진짜 문제는 회개하지 않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비난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이 “의로우심”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 기준으로 심판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 진짜 이유는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길을 알려주심에도 돌이키지 않고 고집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과 하나님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말씀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회개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