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04 | 매일성경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2절)
고국으로 돌아온 백성들이 7월에 모여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회복하고 절기를 지킵니다. 이어 성전 건축을 준비하고 드디어 공사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1절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대적들이 듣습니다. 이 대적들은 현재 예루살렘과 주변에 사는 이방인들입니다. 이들의 구체적인 정체에 대해 2절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라고 합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했는데 앗수르의 포로 정책은 혼합정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 곳곳에 흩어져 살게 합니다. 또한 앗수르 백성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이주해서 살게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통혼하게 되고 혼합되는 일이 발생한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순수성을 위해 이방인들과 결혼하지 말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후손이 신약시대 등장하는 ‘사마리아인들’입니다.
반면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했지만 혼합되지는 않고 순수함을 이어왔습니다. 이처럼 앗수르 땅에서 이주하여 혼합된 백성들이 예루살렘과 주변 지역에 거주하면서 이미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귀환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다는 것은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자칫 기득권을 빼앗길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2절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고 합니다. 함께 성전 건축에 동참하겠다는 겁니다.
이들의 고백을 들어보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이방 신을 섬기면서 하나님은 그중 한 신 정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절 “너희 하나님을”이라고 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들이 함께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한 이유는 성전 공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며, 혹 지어진다 해도 자신들의 수고를 주장하며 여전히 기득권을 주장하려는 목적입니다.
스룹바벨을 비롯한 족장들은 그들의 의도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절합니다. 3절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과거의 실패가 이방의 우상을 숭배하며, 그런 자들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신앙의 순수성과 정체성을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단호히 거절합니다. 거절하면 분명 방해가 있을 것을 알았지만 타협하지 않습니다. 지금 성전 건축은 무너진 신앙을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불신앙의 사람들과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정체성을 지켜야 할지 아니면 이익과 편리를 위해 타협을 해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설 때가 많습니다. 어려움이 있고 홀로 감당해야 하는 외로운 길이지만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고, 또한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믿음의 삶입니다.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4절)
함께 성전을 건축하겠다는 제안이 거절 당하자 이들은 본색을 드러냅니다. 4절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합니다. 사기를 떨어뜨립니다. 비난하고 조롱하며 주변에 악한 소문을 퍼뜨리는 겁니다. 또한 5절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라고 합니다. 세상의 방법, 즉 돈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불법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이 하나님을 찾고 경배하는 사람이었다는 이들의 말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납니다.
이런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방법은 같은 방식으로 상대하는 겁니다. 더 많은 뇌물을 주어 해결하는 겁니다. 더 악한 소문과 강한 비난으로 상대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돌아온 백성들이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습니다. 방해로 오랫동안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지만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도 방해와 어려움이 있다는 겁니다. 귀환한 백성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페르시아 땅에서 평안하고 풍요로운 삶을 포기하고 황량한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감동과 뜻에 순종해서 왔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려 합니다.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순조롭게 진행되어도 쉽지 않은데 방해하는 세력, 장애물을 만납니다. 이로 인해 약 15년이나 성전 건축이 중단됩니다. 마음 속에 원망과 불평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혼란과 의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여정에는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런 방해와 장애물을 극복하는 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성전 건축의 방해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무시하고 한참 뒤에 일어날 성전이 아닌 성벽 재건을 방해한 일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왕에게까지 상소를 올려 방해하였습니다. 아하수에로 왕과 아닥사스다 왕 때 일어난 일입니다. 과정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여러 지역에서 조직적으로 반대를 합니다. 이런 기록을 통해 악한 세력들의 방해가 한두 번으로 그치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동일한 방법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본문을 통해 이 시대 영적 싸움을 보습을 봅니다. 여전히 강력한 사탄의 세력이 다양한 방법을 통해 성도들을 공격합니다. 비난과 조롱으로 약하게 하고, 장애물을 놓아 믿음의 길을 실족하게 합니다. 한번 승리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더 큰 문제를 만나기도 합니다. 이런 공격을 이겨내는 것이 신앙이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과정에 함께 하시고 승리케 하실 것을 신뢰하며 나아갑시다.
2025.11.03 | 매일성경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1절)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일곱째 달에 예루살렘에 모입니다. 지금까지의 여정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바사와 고레스의 귀환 명령이 내려진 해에 돌아올 백성들은 귀환을 위해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해 1월 첫날에 고국을 향해 출발했고 약 1500km이상의 거리를 4개월 정도 걸려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스7:9절). 그리고 각자의 성읍에 흩어져 머물다가 2개월의 시간이 지난 7월에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 것입니다. 아직 정착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지만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7월은 이스라엘 달력으로 하면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달이며 여러 절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날은 새해를 시작하는 나팔절이고, 10일은 속죄일이며, 15-21일은 오늘 본문에서 지키는 초막절입니다. 그래서 2절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먼저 제단을 만듭니다. 지금 성전은 무너지고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배를 위해서는 제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3절은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라고 하는데, 이전에 번제단이 있었던 터에 제단을 세우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과정이 2절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라고 합니다. 4절도 “기록된 규례대로”, 10절은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긴 시간 동안 드리지 못했던 예배를 회복하는데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이전에 행하였던 규례를 따라 진행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3절에는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라는 말이 있는데, 새번역은 “그들은, 그 땅에 사는 백성들이 두렵기는 하지만”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 비어있던 예루살렘에 주변 나라 백성들이 들어와 거주하며 정착하였습니다. 긴 시간 동안 이들이 기득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온 것입니다. 경계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이 된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제단을 세우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일을 할 때 이처럼 장애물도 있고 두려움도 있습니다. 믿음으로 헌신해서 고국으로 돌아왔다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다 해결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 역시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이겨나가야 합니다.
백성들이 회복한 예배는 초막절 절기와 매일 드리는 번제, 초하루에 드리는 번제 등이었습니다. 6절 하 “그 때에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한지라”고 합니다. 아직 성전 공사는 시작되지 않았지만 없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럼에도 중요한 것부터,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10절)
이어 성전을 짓기 위해 기초를 놓습니다. 이때가 8절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 년 둘째 달”이라고 합니다. 이를 위해 기술자들에게 돈을 주고 특히 성전을 지을 때는 고급목재인 백향목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솔로몬 성전을 지을 때도 그렇게 했던 것처럼 비용을 지불하고 두로와 시돈에서 백향목을 공급받습니다. 또한 레위 사람들을 세워 공사를 감독하게 합니다. 9절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 일꾼들을 감독하니라”
성전을 기초를 놓으면서 다윗의 규례를 따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찬양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11절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의 고백으로 보면 놀랍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서운함이나 원망이 아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것 같습니다.
과거 아름다운 성전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습니다. 그 성전을 우상으로 가득 채운 왕들도 많았습니다. 그 결과 멸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회복하십니다. 그렇다면 멸망한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포로 기간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고 작정된 시간이 되니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결과입니다. 이것을 깨달으니 다시 성전의 기초를 놓는 이 시간이 감격입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즐거이 찬양합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전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대성통곡을 합니다. 한편으로는 감격하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움 때문입니다. 시작되는 성전의 기초가 이전 성전에 비하면 작고 초라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쁨의 찬송과 통곡의 소리가 뒤섞여 있습니다.
본문을 정리해보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일은 예배하며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마음의 성전을 잘 세우는 것입니다. 우상으로 채우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만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장애물과 문제를 만납니다. 이때 주저 앉지 않고 극복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일은 “다 함께 일제히” 마음을 모으는 것이 중요합니다(1,2,9). 공동체가 중요하게 여기는 일, 즉 예배와 묵상에 일제히 동참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2025.10.31 | 매일성경
●“그 땅의 백성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세워”(1절)
요시야의 죽음 이후 남유다는 급속도로 멸망의 길을 걷습니다. 백성들이 요시야의 아들인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웁니다. 하지만 그는 3개월 만에 애굽에 의해서 물러납니다. 아마 므깃도에서 요시야를 죽인 애굽 왕 느고가 갈그미스까진 진격해서 바벨론과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런 일을 행한 것을 보입니다. 이제 유다는 스스로 나라를 지킬 수 없고 외세의 영향을 받아야 하는 나라로 전락했습니다. 애굽은 벌금까지 부과합니다. 그리고 엘리아김을 왕으로 임명하면서 그의 이름은 ‘여호야김’으로 고칩니다. 마음대로 왕을 세우고, 왕의 이름도 바꾼다는 것은 이제 애굽의 지배 아래 들어간 것입니다.
여호야김은 25세에 왕이 되어 11년간 통치합니다. 그런데 5절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고 합니다. 예레미야서를 통해 보면 그는 애굽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과도한 세금을 거두고 억압과 강포로 통치하였습니다. 또한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지금 유다는 멸망 직전입니다.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며 강대국들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이라고 마음을 찢고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마지막 남은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강대국을 바라보며 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바벨론 느부갓네살이 올라와 여호야김을 잡아갑니다. 바벨론이 드디어 패권을 잡은 것입니다. 6절 “그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잡아가고”라고 합니다. 왕이 이처럼 비극적으로 끌려간 것은 머지않아 있을 유다 백성들의 미래를 보여줍니다. 여호야김을 대신해서 아들인 여호야긴이 왕이 됩니다.
여호야긴은 8살에 왕이 되어 3달 10일을 다르시며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고 합니다. 8살짜리가 어떻게 악을 행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왕의 곁에서 보필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바르게 인도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여호야긴도 바벨론으로 잡혀가고 숙부인 시드기야가 왕이 됩니다. 그는 남유다의 마지막 왕입니다.
본문은 11-16절까지 길게 시드기야의 죄악을 열거합니다. 어쩌면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를 설명하면서 그동안 유다 왕들의 죄악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죄악 첫 번째는 12절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일러도 그 앞에서 겸손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을 전해주었음에도 순종하지 않습니다. 이때 전한 말씀이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겁니다. 그것이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순종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13절 하 “목을 곧게 하며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세 번째는 왕이 잘못하니 제사장들과 백성들 역시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게 합니다(14절). 마지막 네 번째는 16절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신들을 비웃고 그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의 선지자를 욕하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멸망 직전의 유다를 그럼에도 긍휼히 여기십니다. 아끼십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말씀의 사람들을 보내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말씀을 전하는 사신들을 비웃고 말씀을 멸시하며 선지자들을 욕했습니다. 마지막 기회를 외면한 것입니다.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23절)
결국 멸망당합니다. 이것을 17절은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그들을 다 넘기시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넘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하고 불순종한 결과입니다. 그 결과 많은 백성이 처참하게 죽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의 보물들과 왕궁의 보물들을 다 빼앗깁니다. 가장 충격적인 일은 19절 “또 하나님의 전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벽을 헐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불패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에게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그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기에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백성들과 하나님은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 성전을 떠나십니다. 하나님이 떠난 성전은 그저 건물에 불과하고 결국 불에 타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지 않으시니 예루살렘 성벽도 무너지고 맙니다. 죽음을 면한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노예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역대기 저자는 이 과정에서 특이한 말씀을 하나 합니다. 21절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 안식년을 누림같이 70년 동안 안식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백성들이 이방 땅에서 노예 생활하는 70년은 약속의 땅이 안식하는 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매 주 안식일을 지키고, 7년마다 안식년을 지키며, 50년째가 되면 희년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모두가 더불어 쉼을 누리는 나라입니다. 누군가를 억압하거나 착취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쉼을 누려도 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식년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욕심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약속의 땅에서 자유와 평화는 사라졌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강제로 70년 쉼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라도 지키게 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지키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매주 주일을 지키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임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나라 정신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남유다는 멸망합니다. 그런데 역대하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고 22-23절에 소망의 메시지를 줍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70년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설명합니다. 남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도 페르시아에 멸망 당하는데 페르시아 고레스 왕을 하나님께서 감동시키십니다. 그래서 명령을 내리는데 23절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고 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때가 되니 하나님은 이방 왕을 감동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게 하십니다. 새로운 소망을 시작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2025.10.30 | 매일성경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22절)
오늘 본문은 안타깝게도 요시야 왕의 죽음에 관한 내용입니다. 8세에 왕이 되어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특히 하나님 중심, 성전 중심의 회복을 이루었습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진노 앞에 놓은 유다에 유일한 소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요시야의 업적을 20절은 한마디로 “요시야가 성전을 정돈하기를 마친 후”라고 합니다. 이처럼 내적으로는 회복과 안정을 누리고 있는데 외부의 상황이 혼란스럽습니다.
당시 국제정세를 간단히 정리하면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앗수르는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 직전입니다. 바벨론이 신흥 강대국으로 강력하게 부상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애굽이 위기를 느낍니다. 위기에 처한 앗수르와 바벨론을 견제하려는 애굽이 함께 갈그미스에서 바벨론을 상대로 전쟁을 하려 합니다. 그런데 애굽이 갈그미스로 가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땅인 므깃도를 지나야 합니다.
그런데 요시야는 앗수르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히스기야 왕 때 남유다를 공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군대가 지나가는 길을 군대를 이끌고 가서 막아섭니다. 그러자 애굽 왕 느고가 사신을 보내 상황을 설명합니다. 21절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내가 오늘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와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쉽게 설명하면 애굽은 이스라엘을 공격할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바벨론을 상대하기 위해 지나가는 과정이니 싸움을 걸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왕인 애굽 왕의 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일까요?
그런데 22절에서 역대기 저자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즉 애굽 왕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온 세상의 통치자시며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과 여러 환경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11월에 묵상할 에스라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왕인 고레스를 감동시켜셔서 포로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국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이 과정을 설명하는 고레스 왕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는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의 왕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제국의 왕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요시야에게도 애굽 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시야는 자신의 뜻, 결정이 있지만 내려놓고 하나님께 물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하나님께서 알려주셨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묻지 않고, 애굽 왕의 말을 무시하고 전쟁터에 나갑니다. 결국 죽임을 당합니다.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를 슬퍼하고”(24절)
그런데 본문은 요시야가 전쟁에 나가 죽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먼저 22절 “오히려 변장하고” 전쟁터에 나갑니다. 그런데 23절 “활 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이로 인해 23절 “내가 중상을 입었으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우리가 앞에서 묵상했던 한 왕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바로 아합입니다. 18장에서 북이스라엘 왕 아합은 남유다 여호사밧과 함께 아람과의 전쟁에 참가합니다. 아합은 변장을 했는데 한 병사가 무심코 쏜 화살이 아합의 갑옷 솔기에 꽂힙니다. 그렇게 부상을 당하고 결국 죽게 됩니다.
저자는 이런 설명을 통해 경건한 요시야 왕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 이런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요시야의 죽음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요시야가 죽은 후 남유다는 급속도로 혼란을 겪다가 결국 멸망합니다. 이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신실했던 요시야의 한 번의 불순종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 비극입니다.
이어 본문은 요시야의 죽음을 길게 평가합니다. 반복되는 단어가 “슬픔”(24,25)과 “애가”(25)입니다. 한마디로 깊은 슬픔입니다.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슬퍼합니다. 이런 설명은 요시야의 신실했던 삶에 대한 반증입니다. 므낫세와 같이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가득한 사람이 55년을 통치했는데, 요시야는 한번의 불순종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 인생의 아이러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래 살고 짧게 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을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요시야의 생애 전반에 대한 평가는 26절 “여호와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행한 모든 선한 일”이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말씀따라 신실하게 산 사람”입니다. 요시야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과 사람들의 평가입니다.
인생의 끝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어야 할까요? 또한 사람들은 우리 삶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요시야처럼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 붙잡고 살아간 인생으로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해서 모두를 사랑한 사람으로 남는다면 복된 인생입니다.
2025.10.29 | 매일성경
●“요시야가 예루살렘에서 여호와께 유월절을 지켜”(1절)
성전 수리 과정에서 율법책을 발견한 후 하나님의 뜻을 묻고, 모든 백성들과 더불어 하나님과 언약을 새롭게 한 요시야는 이제 유월절을 지킵니다. 그 날짜를 1절 “첫째 달 열넷째 날에 유월절 어린 양을 잡으니라”고 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절기를 지켰습니다. 히스기야도 유월절을 지켰지만 그때는 준비가 부족해서 한 달을 연기해서 2월14일에 지켜야 했습니다. 요시야는 절기는 지키는데 제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세워 임무를 부여합니다. 특히 2절은 “왕이 제사장들에게 그들의 직분을 맡기고 격려”하였습니다. 여기 ‘격려’(하다크)는 강하게 하고 용기를 북돋아 준 것입니다. 이처럼 요시야는 격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역대기 다른 부분과 같이 레위인들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3절에서는 레위인의 정체성을 “또 여호와 앞에 구별되어서 온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이라고 합니다. 다른 지파들과 달리 구별된 자들입니다. 또한 백성들을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왜 이런 임무가 주어졌는지를 설명합니다. 과거 성막 시대에는 성막과 성전 기물을 옮기는 일이 레위인들 담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성전이 세워지고 더 이상 움직이는 일이 없어졌기에 이제는 각 지파들이 살고 지역으로 레위인들이 흩어져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는 죄악을 저지른 것은 레위인들이 사명을 잘 감당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백성들도 레위인을 잘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레위인과 백성들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시야는 레위인들을 준비시키면서 4절 “다윗의 글과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글을 준행”하라고 합니다. 다윗과 솔로몬이 성전에서의 레위인들의 직무를 정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은 유월절을 지키는 과정에서도 6절 하“모세를 통하여 전하신 말씀을 따라”, 12절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13절 “규례대로”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과 그 기준 안에서 역사적으로 구체화된 기준을 따라서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세상의 경험이나, 실용적인 방식을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가 역사적으로 행해왔던 내용들을 통해서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레위인들에게 강조되는 것은 4절 하 “스스로 준비하고”, 6절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입니다. 자발적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가장 중요한 사람, 즉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준비되었습니다.
●“레위 사람들이 그들을 위하여 준비하였음이더라”(15절)
그렇다면 이제는 제물이 필요합니다. 출애굽기에는 유월절 양을 가정별로 준비해서 잡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먼저 요시야 왕이 헌신합니다. 양과 염소 30,000마리입니다. 수소는 3,000마리입니다. 대단히 많은 제물입니다. 이어서 방백들도 그리고 제사장들도, 레위 사람의 우두머리들도 제물을 드립니다. 드려진 제물의 양이 히스기야 때보다 2배 정도 많은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헌신은 말이 아닌 실제적은 드림으로 이루어집니다. 또한 드림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회복에 대한 열정만큼 드리게 됩니다. 먼저 베푸신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드려진 제물로 유월절이 시작됩니다. 제사장들은 11절 “유월절 양을 잡으니 제사장들은 그들의 손에서 피를 받아 뿌리고”, 레위인들은 “잡은 짐승의 가죽을 벗기고” 이렇게 각각 맡은 직무를 감당하며 질서있고 순조롭게 유월절이 진행됩니다.
그 가운데 본문은 레위인들의 헌신을 세 가지로 강조합니다. 첫 번째는 모든 백성을 위한 헌신입니다. 12절 “그 번제물을 옮겨 족속의 서열대로 모든 백성에게 나누어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백성들이 드리는 일을 돕습니다. 또한 규례대로 유월절 양을 먹도록하기 위해 솥과 가마와 냄비에 삶아서 백성들에게 분배합니다. 드려진 많은 제물을 잡고 삶고 분배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두 번째는, 제사장들과 레위인 자신들을 위해서도 준비합니다. 왜냐하면 14절 “그 후에 자기와 제사장들을 위하여 준비하니 이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번제와 기름을 저녁까지 드리므로 레위 사람들이 자기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을 위하여 준비함이더라” 백성들을 위해 계속 제물을 드려 제사를 집례해야 했기 때문에 제사장들이 자신들을 위해 준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이 준비해줍니다.
세 번째는,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을 위해서도 준비합니다. 유월절이 진행되는 동안 악기를 연주하고 찬양하는 자리를 지켜야 하고, 문지기들 역시 그 자리를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15절 하 “이는 그의 형제 레위 사람들이 그들을 위하여 준비하였음이더라” 이처럼 레위인들의 수고와 헌신, 섬김, 다른 이들의 부족을 채워주는 과정을 통해 유월절 절기가 아름답게 진행됩니다. 규례를 따라 유월절을 지키고 이어 7일간 무교절도 지켰습니다.
그 결과 이전에 온전하게 지켜지지 못했던 유월절이 요시야 왕 때에 지켜졌습니다. 18절 “이스라엘 모든 왕들도 요시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인 온 유다와 이스라엘 무리와 예루살렘 주민과 함께 지킨 것처럼은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였더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요시야는 그 동안의 전례에 비하면 이 정도면 괜찮겠지가 아니라 온전한 회복을 위해 힘을 썼습니다.
우리 신앙에도 이런 모습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기준으로 통해 우리 신앙을 날마다 새롭게 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함으로 회복하는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025.10.28 | 매일성경
●“모세가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고”(14절)
요시야 왕의 명령으로 성전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율법책이 발견됩니다. 이 율법책은 구약성경 일부가 기록된 두루마리였을 것입니다. 율법책이 숨겨져 있었던 이유는 이전 왕들인 므낫세와 아몬이 극심한 우상숭배를 하였고 하나님의 성전도 더럽히며 우상을 세웠기에 만약 율법책이 있었다면 훼손될 우려가 있어 누군가가 숨겨둔 것으로 보입니다.
율법책을 제사장인 힐기야가 발견하고 서기관 사반에게 전달합니다. 그리고 사반은 율법책을 들고 왕에게 나아갑니다. 서기관 사반은 먼저 성전 수리 과정이 잘 이루어졌음을 설명합니다. 수리에 필요한 비용도 감독과 일군들에게 잘 전달되었습니다. 그런 후 발견한 율법책을 요시야 왕 앞에서 읽습니다. 왕은 말씀을 듣고 자기 옷을 찢습니다. 옷을 찢는다는 것은 애통의 표시입니다. 요시야가 이런 반응을 보인 이유는 들은 말씀의 내용 때문입니다. 21절 “우리 조상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쏟으신 진노가 크도다” 그 책에는 불순종한 백성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요사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하나님 중심으로 신앙 개혁을 위해 힘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의 기준으로 돌아보니 지금 남유다의 상태가 심각합니다. 그동안 행했던 일들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한 상태입니다. 안일하게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래서 옷을 찢으며 애통해 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발견한 율법책을 읽고, 들으며 애통함이 회복의 출발점입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여러 가지 상상을 해봅니다. 만약 성전을 수리하지 않아서 율법책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누군가 발견했음에도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버리거나 방치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발견한 율법책을 읽거나 듣지 않았다면, 그리고 들었음에도 반응하지 않고 흘려 듣거나 외면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양한 생각을 해봅니다. 감사한 것은 말씀의 소중함을 아는 자들에 의해 발견되고 왕에게까지 전달되었다는 겁니다. 또한 요시야 왕도 말씀을 듣고 바르게 반응하므로 그동안 무너졌던 신앙이 더 바르고 빠르게 회복됩니다.
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힐기야를 중심으로 대표단 5명을 세웁니다. 21절 “너희는 가서 나와 및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은 자들을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고 합니다. 더 바르고 깊이 있게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생각하게 됩니다. 본문은 이런 과정으로 이어집니다. 먼저 말씀을 발견하고, 다음으로 읽고 듣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뜻을 묻습니다. 우리에게는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인 66권의 성경이 이미 주어져있습니다.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우리가 읽고, 듣고, 묵상하지 않는다면 숨겨진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열어야 합니다. 묵상해야 합니다.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깊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공부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반응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풍성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31절)
대표단이 찾은 사람은 여선지자 훌다입니다. 본문은 훌다를 자세히 소개합니다. 22절 “그는 하스라의 손자 독핫의 아들로서 예복을 관리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살았더라” 훌다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안타깝게도 재앙과 저주에 대한 말씀입니다. 24절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 앞에서 읽은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하리니” 여기서 우리는 발견된 책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는데 재앙과 저주가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발견된 율법책은 구약 신명기의 일부였을 것이며, 특히 신28:15-67절의 불순종의 결과들이 기록된 내용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에는 저주의 말씀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먼저 1-14절까지 말씀 순종에 대한 축복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저주가 아닌 복을 원합니다. 그런데 복은 원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통해 옵니다. 순종의 결과가 은혜와 복입니다. 반명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와 재앙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복이 아닌 저주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은 요시야 왕의 미래에 대해서도 알려주십니다. 요시야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묻고 옷을 찢으며 애통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내리실 재앙을 보지 않고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요시야 이후에 이런 재앙이 임할 것이라 하십니다.
율법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요시야는 모든 장로들을 비롯하여 모든 백성들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 30절 하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려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들려 줍니다. 이후 언약을 세웁니다. 29-33절까지 반복되는 단어가 ‘언약’입니다(30,31,32). 그리고 31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 이제 회복과 생명의 길은 오직 마음을 다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역시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겸손하게 마음을 찢으며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의 길로 나아갑시다. 하나님의 언약백성다운 삶을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