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6:1-16절/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것(25.12.2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2절)

​1-2절에는 ‘변론’이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법정에 세우시고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시는 장면이 연상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문제가 심각한데 이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증인으로는 2절의 “산들과 견고한 지대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산과 땅이 항상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보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답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변론하시는 이유는 3절 때문입니다.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괴롭게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6절부터의 말씀을 통해 보면 아마도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을 무거운 짐으로 느낀 것 같습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안식일에 그리고 절기마다 다양한 제물과 방법으로 제사드리는 일이 부담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언약백성으로 세상과 다르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 섬기는 것이 괴롭고 힘들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없이 쉽게 살면되는데 왜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 하느냐고 불만을 토합니다.

이런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무엇인 문제인지를 알려주십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잊은 겁니다. 그래서 5절에는 “기억하라”가 반복됩니다. 백성들이 기억할 것은 먼저 4절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입니다. 400년 애굽 노예생활하던 백성들을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자유를 주셨습니다. 백성들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또한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 인도자를 세워주셔서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5절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발람의 이야기를 자주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기 위해 모압 왕 발락이 거짓 선지자인 발람을 돈을 주고 매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발람이 저주가 아닌 축복을 하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싯딤은 본격적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2명의 정탐을 보낸 장소입니다. 그리고 길갈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머문 곳으로 가나안 정복의 전초기지가 된 장소입니다.

그렇다면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항상 함께 하였습니다. 이 은혜를 기억한다면 하나님을 향한 제사가 부담이 아닌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면서 꼭 기억하고 회복해야 할 부분이 이것입니다.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십자가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예배가 부담이 아닌 하나님과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지는 기쁨과 감격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향한 섬김이 은혜와 영광이 될 것입니다.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8절)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일 년된 송아지 아니면 천천의 숫양, 만만의 기름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맏아들을 드린다해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8절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제물이 아닌 백성들의 삶을 원하십니다. 정의의 하나님을 본받아 정의를 행하는 삶입니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제물은 필요가 없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의를 행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삶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으로 제물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로 이어집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과거에 신앙이 좋다는 분들을 보면 자신만 신앙이 좋다고 교만하여 다른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말도 함부로 합니다. 자기 주장과 자기 영광을 위해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이것은 바른 신앙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9절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잠9: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습관과 형식이 됩니다. 그러자 바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불의한 재물과 가증한 에바가 있습니다. 거짓 저울추를 사용해서 사람들을 속이고 강포와 거짓으로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 결과가 13절 “그러므로 나도 너를 쳐서 병들게 하였으며 네 죄로 말미암아 너를 황폐하게 하였나니” 이들의 노력, 기대와 전혀 다른 피폐한 삶을 살아갑니다.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쌓아도 보존되지 못합니다. 씨를 뿌려도 추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진정한 만족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예법을 지킨다고 책망하십니다. 북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이 아합이며, 아합의 아버지가 오므리입니다. 악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남유다도 이들의 길을 걷고, 이들의 삶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무엇을 기억하며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늘 기억하며 사랑에 감사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섬김과 헌신이 은혜에 기초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제물이 아닌 정의를 행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매일 동행하는 삶입니다.

미가4:1-13절/네 뿔을 무쇠 같게 하며(25.12.24)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2절)

​미가 선지자는 3장에서 지도자들의 죄악을 고발했습니다. 정의를 미워하고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결과 3:12절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심판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4장으로 오면 갑자기 회복에 대한 메시지가 이어집니다. 2장에서도 그랬습니다. 2:1-11절까지는 침상에서 죄를 꾀하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힘있는 자들의 죄악과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2:12-13절은 남은 자를 모으시겠다는 회복의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이처럼 선지자들의 외침에는 심판과 회복의 메시지가 번갈아 등장합니다. 이것이 말하는 것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반드시 회복으로 이어집니다. 바꿔말하면 회복을 위해서는 징계를 통한 정화가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스스로 변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변화시키십니다.

그래서 본문의 시작은 1절 “끝날에”입니다. 심판의 끝이 아니고 회복이 끝입니다. 승리가 끝입니다. 고난이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끝날에 수풀만 우거졌던 하나님의 성전이 산 꼭대기에 높이 서게 됩니다. 많은 민족들이 성전으로 몰려듭니다. 이들이 성전을 향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2절은 이것을 ‘도’, ‘율법’, ‘말씀’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하나님 없이 행하고 자신의 소견대로 행하던 사람들이 인생의 문제와 한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어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께로 나와 인생의 길을 찾고 흔들리지 않는 삶의 기준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와 생명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임하면 칼과 창으로 서로 전쟁하는 나라가 아닌 보습과 낫을 사용하는 평화의 나라가 임합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4절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가장 평화롭고 풍요로운 삶을 표현하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두렵게 할 자가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5절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겼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친히 온 세상에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십니다. 영광을 선포하십니다. 이를 통해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복된 삶임을 깨닫습니다.

이처럼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내가 머무는 가정과 일터 그리고 공동체 안에 함께 하시며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머무는 곳이 칼과 창이 난무하는 곳이 아닌 평화와 기쁨이 가득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나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7절)

​범죄한 이스라엘은 해산하는 여인이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할 것입니다. 아름다웠던 성읍은 무너지고 이방 바벨론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을 조롱하며 함부로 대할 것입니다. 뼈저리게 죄악의 결과를 경험하게 될 것이며 소망이 사라지는 절망을 경험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절망의 자리에서 이스라엘을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회복하십니다.

돌아오게 하시는데 6절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라고 합니다. 저는 자와 환난 받는 자들을 모으십니다. 연약한 자들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을 남은 백성이 되게 하시며 이들로 강한 나라가 되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께서 만들어가십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셔서 야곱의 가족 70명을 이루게 하시고,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힘과 능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서 회복하시고 만들어가십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은 8절 “너 양 떼의 망대요 딸 시온의 산이여 이전 권능 곧 딸 예루살렘의 나라가 네게로 돌아오리라” 이전의 영광과 권능을 회복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13절 “딸 시온이여 일어나서 칠지어다 내가 네 뿔을 무쇠 같게 하며 네 굽을 놋 같게 하리니 네가 여러 백성을 쳐서 깨뜨릴 것이라”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여 거침없이 달리고, 거침없이 승리하는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합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의 하나님이시오,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쇠의 뿔처럼, 놋 굽처럼 달리고 승리케 하실 것을 기대합시다.

미가3:1-12절/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25.12.23)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1절)

​미가 2장에서는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날이 밝으면 그것을 행하는 손에 힘이 있는 자들에 죄악과 그에 따른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손에 힘이 있는 자들은 누구이며 구체적으로 어떤 악을 행할까요? 3장이 그 내용입니다.

먼저 1절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고 합니다. 왕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이 죄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통치자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과 선택이 한 나라에 어떤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우리도 경험하였습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선포하십니다.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로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이런 통치를 하나님을 대신하는 왕들을 세우셔서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길 원하십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 특히 통치자의 본분입니다. 하나님은 2절에서 ‘정의’를 쉽게 정의하십니다.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라고 하는데 이와 반대되는 것이 정의입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과 악의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은 반대로 행동합니다.

2-3절은 악한 지도자들의 행동을 너무 리얼하게 설명합니다. 이들은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살을 뜯습니다. 뼈를 꺾어 솥에 넣는 고기처럼 생각합니다. 백성은 사랑과 섬김의 대상이 아니고 착취와 억압의 대상입니다. 백성은 목적이 아닌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을 채우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러면서도 4절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삶과 신앙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백성들만 수단이 아닌 하나님 역시 자신들의 이익을 채우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상관없이 나의 욕망을 부르짖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주기도문에는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절)가 나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함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찾고 부르짖어야 할 기도 제목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기도를 통해 내가 이루고자 하는 ‘나의 나라와 나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의 길을 걷는 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삶과 분리된 악한 지도자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얼굴을 가리십니다.

우리 역시 가정과 일터, 교회 공동체의 리더, 지도자로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본분은 정의를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우리가 머무는 곳에 임해야 하겠습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8절)

​정치지도자들이 거침없이 무자비한 악을 행하는데는 선지자들의 침묵이 있습니다. 스스로 바른길을 걷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고해야 하는데, 침묵하고 동조합니다. 이유는 5절 “이에 물 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먹을 것을 물려주면 평강을 외칩니다. 반면 선지자의 입에 물려줄 것이 없이 고통당하는 백성들에게는 전쟁과 심판을 경고합니다. 이런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은 경고하십니다. 6절에 반복되는 말은 ‘밤’, ‘어둠’, ‘캄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돈을 준 사람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해주는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합니다. 이들에게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런 거짓 선지자들의 가득한 세상에서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8절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오직 나는”이라는 표현을 통해 아무리 많은 선지자들이 그런 길을 걷는다 해도 오직 나 한 사람은 하나님의 길을 걷겠다는 겁니다. 비록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길이어도 하나님의 뜻만 선포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힘만으로 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사명을 감당하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능력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정의를 선포해야 합니다. 거침없이 바른 말씀, 들어야 할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열왕기상 22장에 등장하는 아합왕 시대 미가야선지자가 생각납니다. 시드기야를 중심한 400명의 어용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전쟁에 나가려는 아합왕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아합이 듣고 싶어하는 예언을 합니다. 전쟁에 나가면 승리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미가야 선지자는 사람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합니다. 전쟁에 나가면 죽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로 인해 옥에 갇히는 고난을 당합니다. 하지만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어 아합이 죽게 됩니다. 우리도 성령의 충만함으로 능력과 용기를 가지고 정의를 선포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9-12절은 지도자들의 죄악을 정리합니다. 10절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정의와 공의가 아닌 피와 죄악으로 나라를 건축합니다. 그 중심에는 11절 보면 정치지도자와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추구하는 것이 ‘뇌물, 삯, 돈’입니다. 돈이 이들의 행동과 말의 이유입니다. 인생의 기초입니다. 하나님보다 돈이 우상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돈이 행복한 삶을 주리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외면하고 돈을 추구한 인생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12절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오히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시대 외적으로는 화려하고 거대한데 내적으로는 무너지고 황폐한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정의를 행하지 않는 정치지도자들, 그들과 함께하는 종교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침묵과 방관이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미가선지자처럼 “오직 나는”의 삶을 살고, 성령 충만으로 능력과 정의 용기의 삶을 살아갑시다.

미가2:1-13절/초장의 양 떼 같이(25.12.22)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1절)

​미가 선지자는 1:1절 “유다의 왕들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북이스라엘 사마리아와 남유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선지자입니다. 남유다 히스기야 왕 시대에 북이스라엘의 멸망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렇다면 지금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앞두고 경고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경고를 듣느냐 듣지 않느냐가 이들의 미래를 좌우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적하셨던 죄악은 우상숭배입니다. 그것을 1:7절에서는 “음행의 값”, “기생의 값”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러한 우상숭배는 한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온 나라 모든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상숭배가 위험한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하고 백성들을 향해야 하는 마음이 우상을 향하고 자신을 향할 때 억압과 착취가 일어나고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런 죄악은 가진 자, 힘있는 자들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1절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우상에 빠진 백성들이 늘 생각하는 것은 죄와 악을 꾸미는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것입니다. 연약한 백성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그것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들에게 힘과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배달 노동자들이 과로로 세상을 떠나는 것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면서도 로비를 위해서는 수많은 돈을 투자하는 이 시대 거대 기업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2절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탐하여 빼앗고, 탐하여 차지하며 강탈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토지는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것입니다. 함부로 빼앗아서도, 팔아서도 안 됩니다. 만약 부득이하게 팔았다면 희년이 되면 반드시 다시 돌려주어 회복시켜주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탐하여 빼앗습니다. 집과 사람들 그리고 산업을 강탈하는 것은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을 어기는 일입니다. 출20:17절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없고, 말씀이 없습니다. 욕망으로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멈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멈추게 하십니다. 재앙을 계획하시고 내리십니다. 3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라고 하는데, 백성들의 목에 굴레를 씌웠는데, 이제는 자신들의 목에 하나님께서 굴레를 씌우십니다. 절대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심은 대로, 행한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이들이 강탈한 산업을 하나님께서 이제는 다른 사람이 강탈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들이 빼앗은 밭을 패역자들의 손에 넘기실 것입니다. 자신들이 백성들에게 주었던 고통을 그대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잃어버린 밭과 산업은 다시는 그들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중요합니다. 작은 생각, 작은 행동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좋은 생각을 심고, 사랑의 생각을 심고 그것이 아름다운 행동으로 이어지는 매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야곱아 내가 반드시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12절)

​그런데 백성들은 선지자의 경고에 이렇게 반응합니다. 6절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거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 그런 예언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7절 “너희 야곱의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영이 성급하시다 하겠느냐”고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성급하시다”는 의미는 성경에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이렇게 급하게 자기 백성을 심판하실 리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은 말씀을 알면서 듣고 행해야 할 말씀은 외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을 합리화하는 일에 이용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께서 지금 심판을 경고하신다면 그동안 오래 참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이렇게 뻔뻔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다시 설명하십니다. 힘과 권력이 있는 자들이 해야 할 일은 백성을 보호하고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도록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방의 포악한 대적들처럼 백성들을 대하고 있습니다. 이들로 인해 고통받는 자들이 부녀와 어린 자녀들입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이들은 선지자의 바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주어 귀를 즐겁게 해주는 자들의 거짓에 귀를 기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했음에도 안일하다, 평안하다, 전혀 문제없다고 예언하며 백성들로 무감각하게 멸망의 길을 걷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할 때 말씀이 우리를 찌르고 부담스럽게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묵상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성경을 읽으면서 복과 관련된 메시지에만 집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바른 신앙의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찌르는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말씀임을 기억하고 힘들지만 말씀 따라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처럼 재앙을 내리시는 이유는 완전한 끝을 위함이 아닙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백성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새롭게 시작하게 하시려고 심판을 내리십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절대 변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징계의 시간이 지나면 12절 “내가 반드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의 양 떼 같이 하며 초장의 양 떼 같이 하리니”, 13절 “그들의 왕이 앞서 가며 여호와께서는 선두로 가시리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다시 모으시고 선두에 서셔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생각들이 우리를 만들어갑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를 통해 이루어가실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며 작은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때론 불편하고 부담이 되지만 마음에 새기고 순종할 때 복된 삶입니다.

유다서 1:1-16절/다시 생각하고 싸우라(25.12.19)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3절)

​유다서를 기록한 ‘유다’는 예수님의 동생입니다. 유다는 자신을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라고 소개합니다. 육신적인 관계보다 예수님과의 영적인 관계 속에서 자신을 ‘종’으로 소개합니다. 유다가 편지를 보내는 대상은 “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아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켜주시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의미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특별한 선택을 받은 것이요, 예수님께서 항상 동행하시고 지켜주시는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미 주신 큰 은혜를 늘 기억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3절부터는 편지를 보낸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성도들에게 편지 쓰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핵심은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타협하거나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3절 하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를 보냅니다. 성도가 집중해서 분명히 이해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주어진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구원으로 우리가 어떤 존재, 신분이 되었으며, 그런 신분을 가진 성도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이것은 힘써 싸워야 할 문제입니다.

이런 표현을 보면 당시 상황이 매우 위험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누가 이런 문제를 일으켰는가? 4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고 하는데, 조용히 들어와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입니다. 처음에는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 그들의 기초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심판을 받기로 작정된 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도리어 구원받았으니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이는 예수님의 구원을 부인하는 악한 모습입니다.

이런 거짓을 분별하고 싸우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는 심각한 혼란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5절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고 합니다. 사실 유다가 편지로 기록한 내용은 이미 사도들과 지도자들을 통해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성도들이 희미해지면서 분별하지 못하고 동화되는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다시 생각나게”하려고 편지를 씁니다. 그렇습니다. “다시” 내가 받은 구원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기준을 선명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매일 “다시”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받을 심판은 출애굽한 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받은 것과 같을 것입니다. 교만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떠난 천사들이 흑암에 갇히는 것과 같을 것이며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과 같을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11절)

​그렇다면 거짓 교사들이 문제는 무엇일까요? 8절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하는도다” 여기 “꿈꾸는 사람”이 나옵니다. 아마 꿈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을 현혹하고 말씀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주장하며 음란과 정욕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권위를 무시합니다. 교회와 지도자의 권면을 듣지 않습니다. 영광을 비방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사들을 비방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10절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입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비방하고 악한 본능을 따라 행동합니다. 결과는 멸망입니다.

이어서 구체적으로 거짓 교사들의 실상을 열거합니다. 이들은 구약에 나오는 가인과 발람, 그리고 고라와 같습니다. 가인은 자신은 돌아보지 않고 시기심으로 동생을 죽인 자입니다. 발람은 돈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려 했던 거짓 선지자입니다. 고라는 당을 지어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하다 죽은 자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특징을 6가지로 설명하는데 첫째는 12절 “애찬에 암초”입니다. 애찬은 성도들이 함께 식사 교제를 하며 하나됨을 확인하는 시간인데 이들은 하나됨을 깨뜨립니다. 끼리끼리 모이고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일들을 합니다. 두 번째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입니다. 지도자인데 양들을 돌보지 않고 오히려 양들을 이용해서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입니다. 구름이 떠오르면 비를 기대하는데 이들은 겉모습은 그럴듯한데 진리가 없습니다.

네 번째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입니다. 겉모습은 그럴듯한데 뿌리가 뽑혀 죽어있습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니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다섯 번째는 13절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입니다. 거품을 뿜는 바다처럼 가식과 허풍이 많습니다. 거친 물결처럼 거칠게 말하고 함부로 행동합니다. 이를 통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함입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입니다. 결국은 정처없이 이리저리 떠돌다가 소멸해버리는 존재입니다.

거짓 교사들과 관련된 본문을 살펴보니 이것이 당시 거짓 교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대 많은 교회 안에 있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자신의 문제입니다. 우리도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진 것입니다. 세상 정신과 동화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비판하고 정죄하기 이전에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힘써 싸워야 합니다. 다시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시편147:1-20절/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25.12.18)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1절)

​본 시편이 어떤 배경에서 기록되었을까요? 2-3절에 힌트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하나님께서 흩어진 자들을 모으셨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셔서 예루살렘을 다시 세우게 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고레스를 비롯한 바벨론 왕들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을 짓게 하시고,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성벽을 완공하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백성들의 상심한 마음과 상처를 고쳐주셨습니다. 본 시편의 배경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문에는 3번의 “찬양하라”는 요청이 나옵니다(1,7,12). 그리고 이어서 찬양해야 할 이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절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옳고 당연하다고 합니다. 앞에서 설명했듯 흩어진 백성 모으셔서 예루살렘 다시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뒤에 이어지는 4절은 갑자기 ‘별’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4절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하나님은 별들의 숫자를 세시고 하나하나 이름대로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5절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과 지혜를 찬양합니다. 그렇다면 시인이 갑자기 별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신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하늘의 수많은 별들 하나하나 하나님은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벨론을 비롯한 이방 나라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해와 달과 별을 우상으로 숭배하며 그것들이 나라와 개인들을 지켜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은 그들이 숭배하는 별들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만왕의 왕이심을 고백합니다. 이 하나님은 6절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한 자를 붙들어주시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교만한 악인들은 무너뜨리십니다.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10절)

​7절은 두 번째 찬양의 요청입니다.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감사함으로 찬양하라고 하는데 무엇을 감사해야 할까요? 다시 시인은 자연으로 눈길을 돌립니다. 8-9절 “그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구름에서 비를 내려 산에 풀을 자라게 하십니다. 비가 오고, 해가 뜨며, 바람이 부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것 같지만 시인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고 하십니다. 산의 풀 한 포기, 들꽃 하나도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들짐승과 까마귀 새끼도 먹여주십니다. 까마귀 새끼는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는 어쩜 하찮은 존재입니다. 그런 새끼도 하나님께서 먹여주십니다.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이런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오, 우리 하나님이시라면 우리가 무엇을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6:25-31절까지 염려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30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시인은 이어서 까마귀 새끼와 대조되는 ‘말의 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10절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말의 힘과 용사의 다리를 의지합니다. 한마디로 군사력이지요. 이것을 키우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합니다. 이것을 개인으로 적용해본다면 이 시대는 힘과 부를 가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 교만입니다. 그런 자들을 엎드러뜨리십니다(6절). 대신 하나님은 11절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라고 하십니다.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15절)

​세 번째 찬양 요청은 12절부터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찬양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문빗장을 견고하게 해주시고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며 예루살렘 경내를 평안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무너졌던 성벽이 세워져서 안정을 찾고 보호를 받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15절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에는 ‘말씀’이 반복해서 강조됩니다. 특히 “말씀이 속히 달린다”는 의미는 왕의 명령이 선포되면 말을 타고 달려 전하는 자들을 통해 명령이 실행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입에서 나가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다시 자연을 통해 설명합니다. 많은 눈과 우박이 봄이 되면 다 녹고 새싹이 돗아 납니다. 이것을 18절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늘 반복되는 자연현상을 바라보면서 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발견하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별들, 구름, 까마귀 새끼, 눈과 우박 등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하나님을 만나고 알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창조물들입니다.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능력과 손길을 바라보는 믿음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19절 “그가 그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의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말씀을, 약속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이 시대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이루어가십니다. 또한 백성들 역시 율례와 규례를 따라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사는 삶이 가장 복된 삶입니다.

오늘 하루도 일상 속에 담긴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섭리를 발견하며 감사와 찬양의 삶이 됩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되었음에 감사하며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