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0:22-42절/빼앗을 자가 없느니라(26.03.05)

●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6절)

오늘 본문의 배경은 ‘수전절(성전 봉헌절)’이며, 계절은 ‘겨울’입니다. 수전절은 주전 164년경 마카비 혁명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더럽혀졌던 성전을 되찾아 깨끗하게 한 후, 하나님께 다시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굳이 22절 “때는 겨울이라”고 명시한 것은, 단순히 날씨가 춥다는 사실을 넘어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을 향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차갑고 냉랭한 영적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성전 안 솔로몬 행각을 거니시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다그칩니다. 24절을 새번역은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로 번역했습니다. 언뜻 보면 이 질문은 메시아에 대한 순수한 갈망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속마음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힘 있고 정치적인 메시아”만을 원했기에, 양의 문이요 목자로 오신 예수님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수많은 말씀과 표적으로 당신이 누구신지 증명하셨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되었던 자가 눈을 뜬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믿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를 주님은 이렇게 진단하십니다. 26절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즉, 증거나 기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자신들이 정해놓은 율법적 세계관과 욕망의 틀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대하고 원하는 방식의 예수가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는 영적인 교만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입니다.

●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8절)

반면, 예수님의 참된 양들은 거짓 목자들의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음성을 따르는 양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가장 위대한 두 가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첫째는 ‘영생’을 주어 영원히 멸망하지 않게 하신다는 것이고, 둘째는 28절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는 절대적인 안전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이 29절에서는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로 이어집니다. 즉, 우리를 붙들고 계신 “예수님의 손”은 곧 온 우주를 창조하신 만유보다 크신 “아버지 하나님의 손”과 완벽하게 동일함을 선포하십니다. 세상의 어떤 위협이나 실패, 심지어 사탄의 세력조차도 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우리를 결코 끊어내거나 훔쳐 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안전한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나 행위가 강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붙들고 계신 주님의 손이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양들의 절대적 안전을 보증하시며, 예수님은 위대한 선언을 하십니다. 30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이는 예수님의 사역과 뜻, 생명을 주시는 권능이 곧 성부 하나님과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선언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향해 신성모독이라며 분노하여 돌을 들어 치려 합니다. 생명의 주님이시며, 참된 성전이신 창조주가 눈앞에 계시건만, 기득권과 자기중심적인 신앙에 갇힌 그들은 오히려 구원자를 죽이려 드는 치명적인 영적 소경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41절)

결국 예수님은 돌을 드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떠나, 과거 세례 요한이 사역하던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 안의 사람들은 그 수많은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요단강 저편의 무리들은 41절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고 합니다. 요한은 표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말씀으로 예수님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말씀에 반응해서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들이야말로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자신의 유익만을 좇는 신앙이 아니라, 말씀 자체에 반응하여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진정 선한 양들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 현주소를 돌아봅니다. 나는 혹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처럼 내 욕망과 내 방식대로 응답해주시는 메시아만을 원하며 주님과 다투고 있지는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당장의 문제 해결이 없다고 해서 쉽게 주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강한 손으로 오늘 하루도 우리를 굳게 붙들고 계십니다. 내 삶에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추운 겨울이 찾아올지라도, 나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크신 손을 굳게 신뢰합시다. 요단강 저편의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기적이 없을지라도 오직 ‘말씀’만으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기쁨으로 순종하는 생명력 넘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요한복음10:1-21절/나는 선한 목자라(26.03.04)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3절)

10장은 9장 내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9장에서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 되었던 사람을 고쳐주신 사건을 통해, 육신의 눈은 떴으나 영적으로는 맹인인 바리새인과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10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참된 목자가 아닌 거짓 목자임을 밝히시며 예수님 자신이 ‘참된 목자’이심을 설명하십니다. 당시 많은 백성들이 길잃은 양과 같이 방황했던 이유는 바로 목자가 되어주어야 할 종교지도자들의 잘못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에스겔 34장을 배경으로 합니다. 하나님은 당시 지도자들의 문제점을 지적하십니다. 2-3절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은 한 목자를 세우시겠다고 합니다. 겔34:23절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선한 목자가 되실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양의 우리와 목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중동 지역에서는 밤이 되면 여러 주인의 양들을 하나의 우리에 모아두고 문지기가 지킵니다. 아침이 되어 문을 통해 당당히 들어가는 이가 참 목자이며, 울타리를 넘어가는 자들은 절도며 강도입니다. 참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해 내고, 앞서 걸어가며 양들을 이끕니다. 실제로 목자들은 양들의 숫자가 많아도 이름을 알고 부른다고 합니다. 또한 양들도 앞서가며 부르시는 목자의 음성을 알고 그 뒤를 믿고 따라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를 잘 아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항상 함께 하시면 우리의 길을 인도해주십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모두는 ‘양’이라는 사실입니다. 양은 자신의 힘을 키움으로, 자신의 지식을 쌓음으로, 자신의 지위를 높임으로 스스로를 지킬 수 없습니다. 어떤 목자를 만나느냐가 삶과 죽음을 결정합니다. 예수님만 목자로 삼고 예수님의 음성을 따라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9절)

바리새인들이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자,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양들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는 ‘양의 문’이심을 구체적으로 밝히십니다. 화재 현장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반드시 문을 찾아야 하듯, 죽음이 도사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유일한 구원의 문이신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9절에서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선언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하십니다. 10절에 보면,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지만, 예수님이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는 이단이나 우리를 이용하려는 거짓 목자들의 달콤한 유혹이 많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의 음성,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묵상하며 순종하여 따라갈 때에만 우리는 멸망의 길이 아닌 풍성한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1절)

이어서 예수님은 두 번째로 “나는 선한 목자라”고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의 가장 큰 차이는 위기의 순간에 나타납니다. 삯꾼은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도망가지만,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립니다. 반복되는 말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입니다(11,15,17,18).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양 몇 마리를 지키기 위해 목자가 죽는다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행동처럼 보입니다. 양 수백 마리가 죽어도 목자는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18절에서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하시며, 양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세상의 가치로 양을 계산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처럼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창세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누리셨던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됨처럼 우리를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양과 같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스스로 생명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6절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라고 하십니다. 여기 다른 양들은 장차 복음을 듣고 주님게 돌아올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 막힌 담을 허시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모든 자들이 하나가되는 구원의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관심은 잃어버린 양들입니다. 그리고 한 마리의 양을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버리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이 사랑을 받아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버리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이 바로 나의 선한 목자이심을 기억합시다. 세상의 복잡하고 유혹하는 소리들을 뒤로하고, 내 이름을 아시고 나를 푸른 초장으로 앞서 인도하시는 주님의 음성에만 귀 기울이며 순종하는 풍성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요한복음9:24-41절/맹인에서 보는 자로(26.03.03)

●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25절)

​요한복음 9장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를 예수님께서 실로암 연못에 씻게 하심으로 고쳐주신 표적으로 시작합니다. 눈을 뜬 이 사람은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서 거센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병을 고친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가기 위해 먼저 이 사람의 부모를 불렀지만, 부모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사형 선고와도 같은 가혹한 형벌인 출교가 두려워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라며 대답을 회피했습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맹인이었던 자를 두 번째로 다시 부릅니다.

그들이 이 사람을 두 번째 부른 이유는 자기들이 정해놓은 답, 즉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가 아니고 죄인이다”라는 대답을 강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24절에서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윽박지릅니다. 이는 좋은 뜻이 아니라, “우리가 듣고 싶은 진실, 즉 예수가 죄인이라는 것을 말하라”는 위협적인 요구였습니다. 평생 앞을 보지 못해 구걸하며 살았던 그에게 당대 최고 권력자인 종교 지도자들의 위협은 엄청난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치료함을 받은 그는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강압에도 위축되지 않고 25절에서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자신이 직접 겪은 부인할 수 없는 은혜의 체험을 바탕으로 굽히지 않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참된 증인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30절)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한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눈을 뜨게 했는지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자, 이 사람은 27절에서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라며 오히려 그들을 조롱하듯 반문합니다.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미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제자가 되는 길에 들어섰음을 당당히 드러낸 것입니다. 분노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모세의 제자’라 칭하며, 이 예수는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고 비난합니다. 요한복음은 반복적으로 예수님께서 모세가 했던 일들을 완성하신 분으로 묘사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먹인 것처럼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광야에서 목마른 자들에게 물을 마시게 한 것처럼 예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되십니다. 특히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 죽어가는 자들을 살린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죄로 인해 죽어가는 자들을 살리실 것입니다. 모세를 제대로 안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율법을 잘 안다고 자부하던 이들은 모세보다 크신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 맹인’의 상태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억지에 맹인이었던 자는 자신이 아는 상식을 바탕으로 정확하게 반박합니다. 30-33절에서 그는 “창세 이후로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적이 없는데,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들으시겠습니까? 이 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며 확신에 찬 선포를 합니다.

이처럼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궁지에 몰린 바리새인들은 결국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며 인신공격을 가하고 그를 쫓아냅니다. 그는 진실을 말하면 출교당할 것을 알면서도, 그 불이익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끝까지 증거하는 담대함을 보여주었습니다.

●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38절)

자신을 증거하다가 출교를 당해 버림받은 그 사람을 예수님께서 친히 다시 찾아가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35절에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물으시며, 당신이 장차 십자가를 지고 모든 사람의 구원을 완성하실 분, 즉 ‘인자’이심을 분명하게 계시해 주십니다. 자신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눈앞에 계신 예수님이심을 깨달은 그는 38절에서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며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평생의 소원이었던 육신의 눈을 뜬 것에만 머물지 않고, 예수님을 온전한 나의 주인으로 알아보는 ‘영적인 눈’까지 완전히 떠지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의 결론으로 예수님은 39절에서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자신은 죄인이며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무지를 인정하는 자들은 영적인 눈을 뜨게 하시지만, 바리새인들처럼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교만하게 주장하는 자들은 영원히 눈먼 자로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맹인인가”라고 발끈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산앙을 돌아보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서 스스로 성경을 알고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하며, 남을 정죄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영적 교만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늘 겸손하게 말씀 안에 머물며,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영적인 눈을 매일매일 새롭게 떠가야 합니다. 또한 맹인이었던 자처럼 세상의 위협과 불이익 앞에서도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증거하는 참된 증인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요한복음5:1-15절/일어나 걸어가라(26.02.13)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2절)

​4장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성을 방문하셔서 한 여인을 만나주셨습니다. 여인을 통해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떠나 유대 갈릴리로 오시는데, 사마리아와 전혀 다른 반응입니다. 이들은 표적을 구합니다. 예수님을 그런 태도를 책망하시면서도 병들어 죽어가는 왕의 신하 아들을 말씀으로 고쳐주십니다.

오늘 말씀은 1절 “그 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어느 명절인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습니다. 양문은 양들이 지나다니는 문으로 제물로 바쳐질 양을 씻기 위해 사용되던 문입니다. ‘베데스다’의 의미는 “자비의 집”입니다. 그런데 그곳은 자비가 넘치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행각 다섯 개가 있는데, 그 안에 많은 병자들이 누워있습니다.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아마 곳곳에서 앓는 소리가 나고 절망이 깊은 장소였을 겁니다. 죽음의 냄새가 가득한 곳이 아니었을까요?

이 병자들이 모여 있는 이유는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4절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기가 막힐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연못의 물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물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립니다. 그러다 물이 움직이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요? 지옥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서로 먼저 들어가기 위해서 달려야 합니다. 누군가를 제쳐야 하고, 누군가는 밟고 지나가기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1등을 해야 치료가 됩니다. 한때 유행했던 말처럼 “1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시 절망입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은 정말 천사가 내려와서 물이 움직였을까요? 학자들에 따르면 이 연못에 가끔 온천수가 솟아 올라왔다고 합니다. 그것을 천사가 물을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했고, 또한 연못 물에 철분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간혹 치료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것이 미신같은 이야기로 이어진 겁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육신은 멀쩡하지만 죄의 영향력 아래 신음하며 살아갑니다. 헛된 소망을 붙잡고 서로 경쟁하며 달려갑니다. 이런 세상에 유일한 소망은 누구일까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

​그곳에 38년 된 병자가 있습니다. 참 긴 시간입니다. 지금과 다른 당시 평균 수명을 생각해본다면 이 사람은 거의 평생을 질병의 짐을 지고 살았습니다. 이 연못에 얼마 동안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도 먼저 들어가지 못하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한마디로 완전한 절망입니다. 그런 병자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이 사람의 질병이 오래 된 줄 아시고 물으십니다. 6절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나 마나한 이야기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병자는 다른 대답을 합니다. 7절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대답 속에 세상에 대한 원망이 담겨있습니다. 내 곁에 힘 있고 발 빠른 사람들이 있다면 내가 1등으로 연못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데 그럴 수 없어서 답답하다는 겁니다. 어쩌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라도 곁에 머물면서 그런 도움을 주면 좋겠다는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이 병자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자기 앞에 있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겁니다. 바로 앞에서 죽어가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말씀으로 살려주신 분입니다. 죽을 자를 살리시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알지 못하니 엉뚱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을 처음보았기 때문이요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병자보다 이 시대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잘 알고 있는데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의 모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실 능력의 주님이신데, 우리는 그저 사소한 몇 가지만 해결할 분으로 믿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선포하십니다. 8절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참으로 당혹스런 말씀인데 병자는 순종합니다. 9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말씀의 능력입니다. 이 기적이 특이한 것은 보통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실 때 “네가 낫고자하느냐”라고 물으시고 믿음의 반응을 보이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혹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시며 치유하시는데 이 사람은 그냥 치유하십니다. 병자의 믿음과 상관없이 예수님은 치유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합니다.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은 육신의 질병의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적인 치유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신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문제를 제기합니다. 안식일인데 병을 고치는 것도 문제요, 병자가 치유되었다고 자기 자리를 들고 가는 것도 문제라는 겁니다. 참 냉혹한 사람들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이들의 이웃이었을 겁니다. 얼마나 고통스런 삶을 살았는지 너무 잘 압니다. 하지만 병자의 치유를 기뻐하고 감사하기보다 안식일 규정으로 그를 정죄하고 있습니다. 사실 안식일은 안식을 누리는 날입니다. 병자에게 안식은 질병의 짐을 벗는 겁니다. 드디어 참된 안식을 누린 겁니다. 그런데 정죄합니다.

본문이 강조하려는 것이 이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들보다 더 심각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육신은 멀쩡한데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를 망각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진짜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이런 유대인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지적에 당황한 병자는 누가 자리를 들고 가라고 했는지 대답을 못합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고, 자신이 치유되어 기뻐하는 사이 예수님이 사라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시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4절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육신의 질병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외칩니다. 15절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예수님만이 베데스다 연못과 같은 세상에서 유일한 소망이 되심을 선포합니다.

어디에 소망을 두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소망이 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누리고 있다면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요한복음4:43-54절/말씀을 믿고 가더니(26.02.12)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44절)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떠나 갈릴리로 향하십니다. 그런데 갈릴리에 도착하시기도 전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44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막상 갈릴리에 도착하니 45절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예수님을 영접한 이유가 45절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입니다. 2장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셔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셨습니다. 동시에 표적도 행하셨습니다. 2:23절은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갈릴리 사람들이 본 것은 예수님의 표적이었고 이것이 예수님 환영의 이유였습니다.

이 모습이 어제 묵상 말씀인 사마리아 사람들의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사마리아 지역에서 예수님은 어떤 표적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한 여인을 통해 예수님을 소개받고 나와서 말씀을 듣고 믿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 머무시면서 말씀 전해주기를 요청해서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그 결과를 41절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절 하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표적이 아닌 말씀을 듣고 믿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인정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을 인정하지 않고 짐승처럼 생각하며 무시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표적에 관심을 가집니다. 이런 신앙의 위험성을 지적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48절에서 갑작스럽게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표적 중심의 신앙을 책망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에 대한 오해를 낳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습니다(1:29절). 그것을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고, 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멸망하지 안하고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죄의 세력 아래 신음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참 생명과 참 자유를 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 십자가를 향해 예수님은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이것을 바로 알고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땅에서 몇 개의 표적을 경험하는 것보다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인 죄의 문제 해결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표적과 기사 중심의 신앙은 예수님을 오해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보다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길 기대합니다. 표적에 집중할수록 잘못된 기대가 커집니다. 예수님이 정치적, 경제적 메시아가 되어주길 원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아들도 외면하고 버릴 것입니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기대했던 사람들에 의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표적 중심의 신앙이 아닌, 말씀 중심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50절)

​이처럼 말씀과 말씀에 대한 순종의 중요성을 두 번째 표적에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표적을 행하신 갈릴리 가나에 도착하십니다. 결혼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왕의 신하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습니다.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의 거리는 약 30km이고 걸어서 8시간 정도가 걸립니다. 이 신하가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먼 길을 달려와 간청합니다. 47절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그리고 다시 절규하듯 부르짖습니다. 49절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이 신하는 예수님께서 함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대 치유해주시길 간구하고 있습니다. 다른 방법은 머릿속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함께 가는 대신에 5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라고 하십니다.

이제 신하는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갈 것인지, 아니면 기어이 예수님을 끌고라도 갈 것인지. 놀랍게도 신하는 50절 하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표적을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갑니다. 그리고 아들이 낫는 표적을 경험합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고 싶으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표적이 앞서고, 표적이 우리 신앙을 이끌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갑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뜻을 이루려 합니다. 하지만 표적보다 말씀이 앞서갈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오직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가는데, 아이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올라오던 종들을 만납니다. 종들이 전한 소식은 아이의 열이 떨어져 살아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52절 “어제 일곱 시”입니다. 우리 시간으로 오후 1시입니다. 이때가 예수님께서 아들이 살아있다고 말씀하셨던 그때임을 깨닫고 신하의 모든 집안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표적이 54절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고 합니다. 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도 행하신 많은 표적은 제외하고 갈릴리에서 행하신 표적에 첫 번째, 두 번째라고 순서를 말합니다. 두 표적의 공통점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첫 번째 표적인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2:5절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하인들도 예수님께서 물을 채우라고 하니 가득 채웠고, 물을 떠다주라 하니 그대로 순종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두 번째 표적도 말씀을 믿고 순종해서 갔더니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이 시대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말씀보다는 표적을 따라갑니다. 이로 인해 신앙이 왜곡되고 삶이 안정적이지 못한 경우들이 많습니다. 이런 시대 어렵지만 말씀을 붙잡고, 매일 묵상하며, 함께 말씀을 나누는 삶이 복된 신앙입니다. 무엇보다 말씀의 자리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하루하루가 쌓여 견고한 신앙, 복된 인생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