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16:1-16절/나를 살피시는 하나님(26.01.22)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2절)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하늘의 뭇별들을 보여주시며 후손에 대한 약속을 해주셨고, 쪼갠 고기 사이를 홀로 지나가시는 횃불 언약으로 땅에 대한 약속을 확증해주셨습니다. 이제 이 약속을 붙잡고 믿음으로 인내하면 됩니다. 그런데 위기가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루려합니다. 그 결과 한 가정에 비극이 찾아옵니다.

1절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라고 합니다. 분명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라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래를 통해서 약속의 자녀를 주신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그것을 다 아시고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인간의 능력이 조금도 포함되지 않는 오직 은혜로,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약속을 받은지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시지 않자 사래는 불안합니다. 10년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의 방법,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사래의 마음이 이해됩니다. 자신이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닌지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한 방법이 자신 곁에 있는 하갈이라는 여종을 통해서 자녀를 얻으려 합니다. 당시에 이런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혼한 신부가 2년 안에 아이를 낳지 못하면 노예를 사서 후손을 잇도록 했습니다. 그러니 사래가 선택한 방법은 세상적으로는 문제가 없는지 모르나 하나님의 방법은 아닙니다.

사래는 2절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라고 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서운함을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안 주시니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래는 출산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알았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생명의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은 외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위대하고 하나님의 방법은 무한한데 유한한 인간은 자신의 한계, 자신의 방법 안에 갇혀 선택할 때가 많습니다. 문제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문제에 집중할 때 이런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더 심각한 일은 이런 사래의 요청에 아브람이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그대로 따랐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늘의 뭇별을 보았고, 감동적인 횃불 언약을 경험한 아브람이 멈추게 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매일 괴로워하고 한숨짓는 사래의 요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2절 하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는 마치 3장에서 먼저 선악과를 먹은 하와가 남편 아담에게도 주자 순순히 받아 먹은 것과 비슷합니다. 멈추어야 할 기회를 놓친 것이고 그 결과는 심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말씀을 기준으로 가야 할지, 멈추어야 할지를 잘 결정해야 합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니 하갈이 임신을 하고 여주인 사래를 멸시합니다.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로인해 사래가 불평을 하자 아브람은 자신이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일을 사래에게 맡겨버립니다.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고 하갈은 견디지 못하고 도망합니다. 아이를 잉태한 여인이 집을 떠나 광야를 방황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합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믿음으로 기다리지 못하고 사람의 생각으로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한 결과가 이렇습니다.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14절)

​사래의 학대를 피해 도망하는 위태로운 여인 하갈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납니다. 가련한 한 여인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장소가 7절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이라고 합니다. 여기 “술 길”은 애굽 근처 지역입니다. 그렇다면 하갈은 자신의 고향인 애굽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묻습니다. 8절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마치 범죄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3:9)라고 물으신 것과 비슷합니다. 하갈의 현주소를 묻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분명하게 하갈의 정체성을 “사래의 여종”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갈이 가장 염려하고 있는 뱃 속에 있는 자녀에 대한 약속을 줍니다. 11절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아들 이름을 ‘이스마엘’로 지으라고 합니다. 의미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고통과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찾아오시며 인생의 벼랑끝에서 해결책을 제시해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마엘의 미래를 알려주시는데 12절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들나귀처럼 자유분방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다른 사람과 대항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이 말씀처럼 이스마엘의 후손들로 인해서 늘 갈등과 전쟁이 계속되는 것을 봅니다.

하갈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13절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두 번이나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얼마나 큰 감동이 되었는지를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그곳 샘 이름을 ‘브헬라해로이’라고 부르는데 의미가 “나를 살펴보시는 살아계신 자의 우물”입니다. 하갈은 여호와의 사자 권면처럼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낳습니다.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부릅니다.

어쩌면 하갈의 고백은 아브람과 사래가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하는지를 알게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고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지만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문제 앞에서 우리의 고통을 들으시고 우리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간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인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해결하십니다.

창세기15:1-21절/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26.01.21)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절)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롯을 구한 후,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1절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에게 두려움이 있습니다. 승리했지만 상대는 동쪽에 위치한 강대국 네 나라 연합군이었습니다. 이들이 보복을 한다면 아브람 혼자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아브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나는 네 방패요”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아무리 대적이 많고 강해도 하나님께서 막으시면 건들 수 없습니다.

또한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십니다. 아브람은 소돔 왕이 주는 전리품을 거절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것으로 살아가는 존재이지 세상의 왕을 통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님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지극히 큰 상급이 되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이 상급은 이어지는 내용인 자녀(후손)과 땅을 주셔서 큰 민족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주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상급을 이야기하시자 아브람은 자신에게 자녀가 없음을 하소연합니다. 민족을 이루려면 우선은 자녀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아직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자녀를 낳는 것이 쉽지 않은데, 시간이 흐르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조급합니다. 아브람은 만약에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시지 않는다면 엘리에셀이라는 집에서 길린 자를 양자로 삼아 상속자로 삼을 계획까지 세우고 있습니다. 아브람의 답답한 마음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4절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아브람의 씨앗으로 후손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약속에는 아브람과 사래를 통해서 주시는 자녀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16장에 가면 하갈이라는 여종을 통해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현실로 해석해서 자신의 방법으로 이루려 한 것입니다. 결과는 큰 갈등과 혼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을 때 주의해야 할 내용입니다. 우리의 상황에 따른 우리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따른 우리의 능력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방법을 믿음으로 기대해야 합니다.

그래서 6절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것을 의로 여기십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의로 여기시고”는 “기준에 맞다, 도달하다”의 의미입니다. 즉 믿음으로 자손과 땅의 약속을 받을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3:6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설명합니다. 어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하늘의 뭇별들을 보여줍니다. 이 무수한 별들처럼 자손이 많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아브람의 마음에 감동이 넘쳤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반드시 이루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요, 이루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17절)

​자손에 대한 약속에 이어 땅에 대한 약속을 하십니다. 7절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이 말씀은 당시 언약을 체결하기 전에 전제했던 내용의 형식입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내용은 하나님과 아브람이 언약을 체결하는 장면입니다. 아브람은 8절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불신하는 것이 아닌 붙잡을 증거를 요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3년 된 동물들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동물들을 10절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쪼개 놓으라고 하지 않았지만 아브람이 알아서 쪼개고 서로 마주 대하여 놓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려는지를 알았습니다. 당시 이렇게 언약을 맺었습니다. 짐승을 쪼개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사이를 언약 당사자들이 지나갑니다. 의미를 언약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이 짐승처럼 쪼개질 것을 약속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맺기 전 앞으로 펼쳐질 이스라엘의 미래를 알려주십니다. 이방에서 객이되어 400년 동안 괴롭힘을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때가되면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를 징벌하시고 이스라엘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와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16절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나님은 가나안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는데, 그 땅은 가나안 백성들이 잘 살고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 사람들을 진멸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하는 것은 부당해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아모리 족속의 죄악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도구로 아모리 족속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이 가득 차니 하나님은 바벨론을 들어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서 떠나게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아브람과의 약속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민족을 준비하시고, 그 민족으로 땅을 차지할 때를 기다리십니다. 이 모든 일은 아브람이 세상을 떠난 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람은 약속을 신뢰하고 평안히 눈을 감으면 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은 이처럼 유한한 우리의 시간을 초월해서 일하십니다.

17절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횃불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신 겁니다. 그래서 횃불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 언약의 특징은 아브람은 지나가지 않았다는 겁니다. 무엇을 의미하냐면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신다는 겁니다.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쪼개질 것을 약속하시는 것이지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횃불 언약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쪼개시면서까지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이 은혜와 사랑을 누리며 살아간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방패가 되시고 상급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갑시다. 말씀으로 약속하시고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이 됩시다.

창세기14:1-24절/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26.01.20)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12절)

​아브람과 롯이 헤어졌습니다. 롯은 눈을 들어 보기 좋고 물이 넉넉한 땅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롯은 13:12절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점점 소돔 안으로 들어갑니다. 소돔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이었습니다. 반면 아브람은 13:18절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아브람은 장막을 옮기며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롯은 세상을 향하여 갔다면 아브람은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결과가 어떠한지를 보여줍니다.

전쟁이 일어납니다.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전쟁입니다.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중심으로 한 네 나라의 왕과 소돔 왕 베라를 중심으로 한 다섯 나라 사이의 전쟁입니다. 이유는 소돔 왕을 비롯한 다섯 나라가 12년 동안 그돌라오멜에게 조공을 바치고 섬겼습니다. 그런데 배반을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쟁 이야기는 세상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줍니다. 힘있는 자들이 지배하고 보복하는 세상입니다. 가인의 후예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은 하나님께서 꿈꾸신 세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셔서 복을 주시고, 아브람을 통해 모든 민족을 복을 받아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닌 함께 복을 나누는 세상을 만드시길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은 포로로 잡힌 롯을 구하면서 작게나마 그런 역할을 감당합니다.

강력한 동방의 네 나라가 요단 동편 지역을 순식간에 점령하고 싯딤골짜기에 이릅니다. 소돔 왕을 비롯한 다섯 나라 왕이 상대하지만 역부족입니다. 군사들이 도망하다 역청 구덩이에 빠지고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합니다. 그러자 네 나라 연합군은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을 비롯하여 사람들까지 사로잡아 갑니다. 그중 소돔에 거주하던 아브람의 조카 롯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을 떠나 눈에 보기에 좋은 땅을 선택한 결과가 이렇습니다.

도망하던 사람 중 하나가 이 소식을 아브람에게 전달합니다. 13절은 아브람을 “히브리 사람 아브람”이라고 합니다. 여기 ‘히브리’의 의미는 다양하게 설명됩니다. “강을 건너온 사람”, 혹은 ‘아피루’(노예)에서 나온 말, 또는 셈의 후손 가운데 ‘에벨’이 있는데 에벨의 후손을 의미하는 ‘에베르’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합니다.

아브람은 롯이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서 훈련된 군사 318명을 이끌고 연합군을 추격합니다. 아브람 입장에서 보면 롯은 이기적인 조카입니다. 아브람이 선택권을 주었을 때 먼저 아브람이 선택하도록 양보할 법도 한데 좋은 땅을 먼저 선택하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런 롯이 어려움을 당했다면 외면할 수도 있는데 아브람은 위험을 무릅쓰고 군사를 이끌고 추격합니다. 상당한 거리인 단까지 쫓아가서 빼앗겼던 재물과 사람들, 그리고 롯과 가족을 구합니다. 상식적으로 네 나라의 연합군을 아브람이 자신의 군사들을 데리고 가서 승리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를 통해 몇 가지를 알 수 있는데, 첫째는 아브람이 하나님의 복을 누려 강성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왕은 아니지만 왕들을 상대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둘째, 애굽에서의 아브람이 아닙니다. 두려움 때문에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는데 이제는 담대하게 전쟁을 합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아브람의 믿음이 성장했습니다. 이전에는 세상 왕들이 두려웠다면, 애굽 왕에게 큰 재앙을 내리셔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면서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시고 책임지시며 복주시는 분임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 왕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서 담대하게 싸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람의 믿음에 보이지 않는 손길로 도우시고 승리를 주십니다.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19절)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람을 대조되는 두 왕이 맞이합니다. 소돔 왕과 살렘 왕입니다. 소돔 왕은 앞에서 등장했지만 갑자기 살렘 왕 멜기세덱이 등장합니다. 멜기세덱은 “의로운 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를 소개하는데 18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인간 제사장 제도가 확립되지 않은 때에 그는 하나님의 제사장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축복합니다. 19절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그는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만왕 왕으로 영광을 받기 합당하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아브람에게 큰 은혜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브람도 소돔 왕에게 22절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라고 합니다. 본문 후반부에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네 번 반복됩니다(18,19,20,22). 이처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함께 하십니다. 복을 주십니다. 지금까지도 주셨지만 앞으로도 주실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은 히브리서로 가면 중요한 인물로 등장합니다. 의의 왕이시며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제2의 멜기세덱으로 소개합니다. 히5:8-10절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줍니다. 이 승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인정하는 겁니다.

반면 소돔 왕은 사람은 자신에게 보내고 물품은 아브람이 가지라고 합니다. 호의를 베푸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전리품은 승리한 사람의 몫입니다. 아브람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주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소돔 왕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23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을 책임져주시고 채워주신다는 확신에서 소돔 왕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됩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오늘 하루도 담대하게 믿음의 삶을 살아갑시다. 사람의 방법과 도움이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됩시다.

창세기11:10-30절/때가 차매(26.01.16)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10절)

​아담의 범죄 이후 셋의 족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처럼, 노아 이후 하나님은 셈을 선택하시고 그의 후손을 통해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가십니다. 이미 10장에 셈의 족보가 등장했습니다. 오늘 본문과의 차이점은 11:16절 “에벨은 삼십사 세에 벨렉을 낳았고”입니다. 10:25절은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라고 했는데, 벨렉의 이름 뜻은 ‘분열’이고 이때 바벨탑 사건이 일어나 사람들이 세상 곳곳으로 흩어졌다고 했습니다. 이후 10장의 족보는 벨렉이 아닌 욕단의 후손들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벨렉의 계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계보 끝에 드디어 아브람이 등장합니다.

오늘 족보에서 반복되는 단어는 “낳았다”입니다. 족보니까 당연한 것이지만 이것을 5장의 족보와 비교해보면 차이가 있습니다. 5장은 아담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는데, “낳았다”는 말도 반복되지만, “죽었다”는 단어가 계속 반복됩니다(5,8,11,14…). 죄의 결과 죽음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이 절망적입니다. 노아의 가족을 제외하고 죄악이 온 세상에 가득하고, 홍수 심판 이후에도 여전히 바벨탑을 쌓으며 하나님께 도전합니다. 죄악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죄의 결과는 당연히 죽음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한 사람을 선택하시고 그를 통해 창3:15절에서 이미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을 이 땅에 보내 죽음 가운데 있는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실 계획을 진행하십니다. 그 사람이 아브람입니다. 이처럼 온 땅에 죄가 가득하고, 가인의 후예들, 니므롯과 같은 자들이 세상을 주도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됩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벨렉 시대에 바벨탑 사건이 있었다면, 이후 아브람이 등장하기까지 년도를 계산해보면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약200년이란 시간 후에 이스라엘 민족을 시작할 아브람이 태어납니다. 이 시간은 혼란의 시대에 구원자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긴 시간으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일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방법이 이해되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인내하며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27절)

​데라는 70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습니다. 27-30절은 앞으로 전개된 아브람 이야기의 몇 가지 중요한 배경을 설명합니다. 27절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라고 하는데 롯은 아브람의 조카입니다. 롯은 아브람과 일정기간 동안 동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롯의 아버지 하란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이들의 고향이 어디인지를 알려줍니다. 28절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입니다. 매일성경 설명을 보면 갈대아인의 우르는 수메르 문명의 중심도시로 매우 번성했지만 당시 많은 도시들과 같이 풍요와 번성을 위한 우상숭배가 만연한 곳이었습니다. 그 우상의 땅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선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황무지에서 장미꽃을 피우신 것입니다.

이어 아브람의 아내가 ‘사래’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30절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계속 이어지는 족보에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사래가 임신하지 못해 자녀가 없습니다. 계보가 중단될 위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실 것인지를 기대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에게도 숱한 위기와 문제가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자기 백성을 위해 문제를 해결해 가시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족보를 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이들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이 특별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선택하신 사람들이라고해서 특별한 기적이나 능력을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니므롯과 같은 사람들이 주도하는 세상에서 미약하게 묵묵히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시며 하나님의 계획과 때를 따라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더디지만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의 구원의 그림이 하나씩 보여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아름답게 완성하십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그려가실 것입니다.

특별하지 않지만 우리의 일상 속에 여전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말씀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아갑시다. 또한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문제와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 과정이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경험하는 과정임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인내하고 승리하는 삶이 됩시다.

창세기11:1-9절/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26.01.15)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4절)

​하나님은 노아의 아들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길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함이 범죄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흩어지는 과정에서 하나의 문제가 생깁니다. 1절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원어로 보면 “한 입술”과 “한 말”입니다. 하나됨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됨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됨을 통해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면 그것처럼 복된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죄로 오염된 인생들은 하나됨을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고 도전하는데 사용합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옳지 않은 일에 더 잘 뭉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2절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라고 하는데 “동방으로 옮기다가”의 의미는 “동쪽으로 동쪽으로 동쪽으로” 향했다는 뜻입니다. 동쪽은 분리를 의미합니다. 가인도 하나님을 떠나 “에덴의 동쪽”인 놋 땅에 거주했습니다(4:16절).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진 사람들이 도착한 곳이 시날평지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10:10절 보면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로 용감한 사냥꾼, 즉 폭군이요 독재자였던 니므롯이 다스리는 곳입니다.

이들이 서로 의논합니다. 3절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건축 재료로 벽돌을 견고히 만들고, 역청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건축기술을 비롯한 문명이 상당히 발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술을 가지고 이들이 계획하는 일이 4절입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성읍과 탑”을 건설합니다.

보통 우리는 바벨탑을 쌓았다고 하는데 본문은 두 번이나 “성읍과 탑”이라고 합니다(4,5). 이것을 8절은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계획한 것은 하늘에 닿는 탑을 가진 거대한 도시입니다. 이처럼 도시를 건설하려 한 것은 흩어짐을 면하기 위함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9:1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땅 곳곳에 흩어져 하나님의 창조 명령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가인이 성을 쌓고 하나님 없이 스스로 안전을 지키려 한 것처럼 도시를 건설하려 합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아무 문제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 겁니다.

또한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라고 하는데, 지금 건축술이 놀랍게 발달한 시대에도 하늘에 닿는 탑을 쌓는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렇게 계획합니다. 이들의 마음 상태를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이름을 내고”, 즉 자신들의 명성과 업적을 길이길이 남기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인생들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도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다시 선악과를 따먹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시대는 변하지만 인간이 추구하는 방향은 다르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먹고 있습니다.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7절)

​5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고 합니다. 저자의 유머가 담겨있다고 생각됩니다. 사람들이 쌓는 성읍과 탑은 인간들이 보기에는 거대한 건축물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땅을 보시는데 인간들이 무언가를 꼼지락거리며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 작아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려오셔서 살펴보십니다. 무엇을 말하냐면? 인간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쌓아 올리는 바벨탑이 아무리 거대하다 해도 영광과 능력의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도전하는 일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원인이 같은 말을 사용하는 한 백성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계획하고 진행한 겁니다. 6절 하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즉 한 언어가 계속되면 이런 일들이 반복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됨을 죄악된 인간은 절대 좋은 방향으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일에 힘을 모은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7절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사람들이 3절과 4절에서 서로 의논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도전했다면 하나님께서도 의논의 방식, 즉 천상 회의를 통해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기로 결정하십니다. 인간의 계획이 하나님에 의해 무너집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대단한 힘을 사용하신 것이 아닌 언어 하나만을 혼잡하게 하셨을 뿐인데 사람들은 혼란을 겪고 모든 일은 순식간에 중단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손가락 하나만 드셔도 세상은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하나되어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언어를 혼잡하게 해서 흩으십니다. 9절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그렇습니다. 자신들의 이름(명성)을 내려하였는데, 그들이 얻은 이름은 바벨, 즉 혼란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도전하며 자신이 주인되어 살아가는 삶의 결과는 혼란입니다.

다시 한번 사람의 제일된 목적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이 됩시다. 우리의 힘든 문제들도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해결해주실 것을 신뢰하며 맡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