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냐1:14-2:3절/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25.09.11)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14절)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희생제물로 준비하는 ‘여호와의 날’이 임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14절에서는 이 날을 “여호와의 큰 날”이라고 하고, 세 번이나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라고 합니다(18,2:2,3).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이 컸던 만큼, 그들을 향한 진노 역시 큽니다. 어쩌면 진노의 뿌리 역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14절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고 합니다. 새번역은 “득달같이 다가온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에도 인지하지 못하고 포악과 거짓 속에서 안일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로 앞에서 묵상한 살후 2장은 주님의 재림을 너무 고대해서 혼란이 생긴 것이라면, 오늘 본문은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지 않을 것이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어쩌면 본문의 백성들처럼, 주님 다시 오실 날이 가까이 오고 있음에도 오시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 날은 용사마저 심히 슬피 우는 날이 될 것입니다. 15-16절은 그 날이 어떤 날이 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분노의 날, 환난과 고통의 날, 황폐와 패망의 날, 캄캄하고 어두운 날, 구름과 흑암의 날입니다. 특히 15절은 어둠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창세기에서 어둔 세상에 빛을 만드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어 빛된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빛을 잃어버리고 어둠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런 백성들에게 내리는 심판이 어둠입니다. 16절은 전쟁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전쟁 나팔이 울리고 견고한 성읍과 높은 망대가 무너질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상대로 전쟁을 하십니다. 이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셨습니다. 아무리 강한 대적이라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면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십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17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디로 가며,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망각하고 세상을 따라 살았습니다. 선택된 거룩한 백성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가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맹인이 되게 하시며 티끌과 분토가 되게 하십니다.

이런 진노의 날에 18절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그렇습니다. 은과 금이 건지지 못합니다. 그동안 포악과 거짓으로 은과 금을 모았습니다. 그것이 안전과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무용지물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우리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질 은과 금이 아닙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2:3)

​이렇게 무서운 여호와의 날을 피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있다고 하십니다. 2:1절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모이라고 합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의 의미는 ”하나님을 원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하는 백성“입니다. 모이라는 이유는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함입니다. 기회는 여호와의 진노가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이르기 전입니다. 기회가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모여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3절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이들은 1:17절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는 세상에서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입니다. 다수의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겸손하게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먼저 여호와를 찾습니다. 하나님만 예배합니다. 풍요를 위해 우상을 숭배하고 은금에 관심을 기울이는 세상에서 하나님만 경배합니다. 또한 공의와 겸손을 행합니다. 포악과 거짓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다스리심을 믿고, 악과 불의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또한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내가 주인되어 내 마음대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갑니다. 바로 이들이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습니까? ”가깝고도 빠르도다“라는 선지자의 경고를 귀담아 들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소수의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스바냐1:1-13절/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25.09.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2절)

​지난 8월 우리는 스가랴서를 묵상했습니다. 나라가 멸망하여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예루살렘의 현실을 보면서 절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회복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오늘부터 묵상할 스바냐의 배경은 남유다가 멸망하기 전입니다. 그렇다면 왜 나라가 멸망할 수 밖에 없었는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죄악상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스바냐가 활동한 시기는 1절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입니다. 스바냐를 소개하면서 “히스기야의 현손”이라고 합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 중심으로 나라를 통치했던 왕입니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위기를 극복했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이후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이 되는데, 남유다 역사상 가장 악한 왕입니다. 그는 바알을 위해 제단을 쌓았고 하늘의 일월성신을 경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을 숭배하는 제단을 만들었으며, 가장 악한 일은 인신 제사를 받는 몰렉에게 자신의 아들들을 바쳤습니다. 이 므낫세로 인해서 남유다의 멸망이 확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므낫세를 이어 아몬이 왕이 되었지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반역이 일어나 아몬이 죽고 그의 아들 요시야가 8살의 나이에 왕이 됩니다. 그러니 이전의 우상숭배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바냐서가 시작되자마자 진멸을 선언하십니다. 2-6절까지 “진멸”과 “멸절”이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2,3,4,6). 진멸의 대상은 3절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입니다. 사람이 가장 먼저 나오고 이어 짐승과 공중의 새 그리고 바다의 고기입니다. 이것은 창1장에 나오는 천지창조와 반대되는 순서입니다. 하나님은 새와 물고기에 이어 땅의 짐승을 만드시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다스려야 할 피조물을 경배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멸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거치게하는 자가 되었으며 악인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유다와 예루살렘이 그 중심에 서 있습니다. 4절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라고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손을 펴시는 것은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심판하시기 위해 손을 펴십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죄악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풍요를 위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하나님만 예배해야 할 이스라엘이 ‘그마림’이라는 이방신에게 제사드리는 제사장들을 임명하였습니다. 지붕 위에서 하늘의 뭇별에게 경배하며, 하나님도 섬기고 말감도 섬겼습니다. 여기 말감이 바로 인신 제사를 원하는 몰렉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을 동시에 행하였습니다. 가장 큰 죄악은 6절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무관심하고 우상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이런 일들이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서서히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점점 심각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 경고하시지만 자신들에게는 상관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무 문제없이 잘 살고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잘 돌아보고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7절)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날”이 다가오고 있으니 잠잠하라고 하십니다. 보통 구약의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날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여호와의 날”은 반대로 이스라엘에 심판을 행하시는 날입니다. 7절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희생제물입니다. 마땅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려야 하는데, 이들은 하나님은 외면하고 우상숭배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친히 희생제물을 준비하시는데, 제물이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스라엘 죄악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까요? 8절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지도자들, 권세있는 자들입니다. 또한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은 주변 강대국의 문화와 정신 수용해서 부와 권력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행했던 일이 “포악과 거짓”입니다. 힘으로 사람들을 짓누르고 거짓으로 속여 자신들의 배를 채웠습니다. 이런 지도자들의 악은 결국 모든 백성들의 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시대 기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이 포악과 거짓에 휘말리지 않고 바른 길을 걸어 시대의 혼란을 바로 잡을 수 있도록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결국 예루살렘 곳곳에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모든 곳에 심판이 임한다는 것은 어느 곳 하나 바른 곳이 없다는 슬픔입니다. 특히 상업지역인 막데스가 거론된 것을 보면 이곳이 포악과 거짓의 중심지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13절은 그렇게 모든 재물이나 세운 집들이 노략 당하고 무너질 것을 경고하십니다. 포악과 거짓으로 쌓고 세운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바람같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다시 한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절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혹 인정하지만 하나님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로 인식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하나하나 등불을 들고 찾아내셔서 벌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사람이 누군인지를 알게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심판과 징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감각한 시대를 향해 경고하십니다. 우리 역시 습관적이고 오래된 우상숭배로 무뎌져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고 모든 것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3:1-18절/힘써 일하라(25.09.09)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5절)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해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기도를 부탁합니다. 바울이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대사도이지만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능력과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주고 또한 기도를 부탁하는 관계가 좋은 관계입니다.

바울의 기도 제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1절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곳곳에 전파되어 영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이요 말씀의 영광입니다. 두 번째는 2절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입니다. 가는 곳마다 반대자들을 만납니다. 바울 일행을 부당하게 대하고 심지어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을 심판해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건져달라고 합니다. 그들 역시 언젠가는 주님을 만나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입니다. 누군가에게 생명을 주는 믿음이 누군가는 받아들일 수 없기도 합니다. 특히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인을 바꾸는 일을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주님께서 굳건하게 하시고 지켜주시길, 바울이 전한 것을 신실하게 행하기를, 그리고 5절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인도해주셔야 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이 “사랑과 인내”인데 바울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난무하는 시대에 성도가 기억하고 행동해야 할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자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또한 인내가 필요한데 그리스도의 인내로, 죽기까지 참으시고 십자가에서 생명을 주신 인내입니다. 그러니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말고 인내해야 합니다.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12절)

​바울이 데살로니가후서 편지를 보낸 이유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2장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주님의 재림에 대한 오해로 혼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지금 나오는 게으른 자들에 관한 문제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6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고 합니다. “떠나라”는 명령이 무섭습니다. 14절도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부끄럽게 하라는 겁니다. 그만큼 이 문제가 데살로니가 교회를 혼란하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자신들이 본을 보였던 것을 먼저 설명합니다. 7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8절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가르치는 지도자로 성도들의 섬김을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고 스스로 주야로 수고하면서 생활을 감당했습니다. 그 이유가 9절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본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건강한 신앙은 교회 안에서만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어떻게 일하여 가정을 섬기며,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교인들 가운데 바울이 보여준 본과 정반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게으르게 행하여 일하지 않고 일을 만들기만 합니다. 이들로 인해서 공동체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합니다. 다른 성도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왜 이들은 이처럼 게으른 삶을 살아갈까요? 데살로니가 교회가 주님의 재림 문제로 혼란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떤 이들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왔고, 심지어는 이미 재림하셨다는데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또는 육체적인 노동을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나 하는 일로 생각해서 일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바울은 12절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합니다. 이 권면은 살전4:11절에도 나왔습니다.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자기 일을 묵묵히 감당하라는 겁니다. 손으로 수고해 자기 양식을 먹으라는 겁니다.

기억합시다.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일에 참견하거나, 내 기준으로 함부로 판단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묵묵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일을 감당하며, 자기 신앙을 잘 세워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13절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게으른 자들로 인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성도들, 그것을 통해 누군가를 섬기는 자들이 상처받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평강과 은혜가 있기를 원하는데, 근원이 16절 “평강의 주께서”, 18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할 때 평강과 은혜가 풍성한 삶이 됩니다.

우리도 우리 통해 말씀이 곳곳에 전파되어 영광스럽게 되길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인내로 인내합시다.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수고하며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맙시다.

데살로니가후서2:1-17절/진리를 붙잡으라(25.09.08)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3절)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편지를 보내는 이유는 교회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보면 예수님의 재림 때문입니다. 이것을 1절 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라고 합니다. 주님의 재림에 관한 잘못된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2절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아마 “성령께서 이렇게 말했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현대의 시한부종말론자들처럼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바울의 편지를 거짓으로 이용해서 재림이 임박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혼란과 두려움을 겪습니다.

바울은 2절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3절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도 누가 어떻게 주장해도 미혹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주장들에 미혹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요? 주님의 재림 전에는 반드시 징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4장에서 성전 파괴와 예수님 재림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마24:15절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고 하시면서 다니엘이 말한 것처럼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성전에 세워지는 것을 보면 이것이 성전이 파괴되기 전 임할 징조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 재림 전에도 징조가 나타날 것인데 배교하는 일이 있고, 특히 불법의 사람이 나타납니다. 이 불법의 사람을 본문은 3절 “멸망의 아들”, 4절 “대적하는 자”, 8절 “불법한 자”, 9절 “악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이 불법의 사람 특징은 4절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습니다.

우리는 이 내용들이 혼란스럽지만 5절을 보면 바울은 이미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런 내용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다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런 불법의 사람을 막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온 세상이 용과 짐승이 다스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악의 세력을 결박하고 다스리시는 것처럼 막으십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8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예수님께서 승리하시고 불법한 자를 폐하십니다.

그런데 이 악한 자의 배후가 등장하는데 바로 사탄입니다. 이들이 사용하는 도구는 9절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이며, 10절 “불의의 모든 속임”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영과 말과 편지 내용을 악용해서 재림에 대한 거짓 내용을 전하고, 거기다 능력과 표적과 기적을 동원해서 사람들을 속입니다. 그러니 흔들리고 미혹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나냐면 12절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합니다. 즉 진리가 아닌 불의를 좋아하는 자들이 미혹되고 결국 멸망의 길로 걷게 된다는 겁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와 불의를 따르는 자가 이 과정에서 분리됩니다. 생명과 사망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15절)

​오늘 본문의 강조점은 분명합니다. 이런 미혹과 혼란의 시대에 성도들이 붙잡아야 할 것은 바로 “진리”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진리”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10,11,13). 14절에서는 진리를 “우리의 복음”이라고 표현하고 15절에서는 “가르침을 받은 전통”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전통’은 사도의 모든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이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에는 2절의 거짓된 “영과 말과 편지”가 있고, 15절에는 바른 “말과 편지”가 대조를 이룹니다. 사도가 가르쳐준 진리의 말씀 말고 새롭고 이상한 가르침이 성도들을 미혹하고 관심을 끕니다. 이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단들이 사람을 유혹하는 방법이 그렇습니다. 기존 교회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을 알려준다고 합니다. 자신들에게만 진리가 있다고 미혹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가르침이나 신비한 능력에 현혹되지 말고,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 66권을 붙잡고 매일 묵상하며 진리 안에서 걸어가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진리 안에 굳게 서기를 바라면서, 성도들이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언제 주님이 오신다, 누가 그렇게 꿈을 꾸고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 등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말고, 13절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즉 택하심과 거룩하게 하심과 구원받게 하심에 집중하고 감사하라는 겁니다.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재림의 때에 관심 기울이지 말고 구원받은 성도의 삶을 살아가라는 겁니다. 그것이 살전5:5절처럼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인 성도들의 삶이라는 겁니다. 살전5:8절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이렇게 믿음과 사랑, 소망으로 늘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바른 삶입니다. 언제 주님이 오셔도 기쁨으로 맞이하는 삶입니다.

특히 본문 16-17절에는 “위로”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어쩌면 재림에 대한 관심은 박해와 고난 속에서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이 위로를 얻고자해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진정한 위로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위로의 근원이 되시고 우리 마음을 위로해주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고난 가운데 있다하여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는 위로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로 충분합니다.

여전히 거짓된 가르침이 많은 혼란한 시대에 진리의 말씀을 굳건하게 붙잡고, 그 말씀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4:13-5:11절/깨어 정신을 차릴지라(25.09.05)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14절)

​본문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궁금해하는 문제에 답을 줍니다. 첫 번째는 먼저 죽은 자들에 관한 것입니다. 15절 하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는 말을 하는데 의미가 지금 살아있는 성도들이 이미 죽은 성도들보다 앞서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이런 설명을 한다는 것은 성도들은 반대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 오시기 전에 이미 죽은 성도는 불쌍한 자들이고, 살아서 주님을 만나는 성도가 복된 성도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을 강하게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시 철학이 “소망은 산 자의 것이지 죽은 자는 소망이 없다”고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수님을 신실하게 믿다가 박해로 인해서 죽음을 당한 성도가 있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이 일은 머지않아 자신들의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먼저 죽은 자들의 문제가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이야기로 답을 줍니다. 14절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먼저 죽은 자들 역시 부활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말합니다. 즉 먼저 죽은 자들이 이미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겁니다. 육체는 죽어서 사라지고 없지만 영혼은 주님 품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먼저 죽은 자들 때문에 걱정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 오실 때 그들을 데리고 오십니다.

이어 바울은 주님 오심의 구체적인 과정을 설명합니다. 16절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호령”, “천사장의 소리”, “하나님의 나팔”이라고 세 번이나 주님 강림의 날 울려퍼질 큰 소리를 강조합니다. 이 날은 위대한 날입니다. 하나님의 날입니다. 승리의 날이며 역전의 날입니다.

이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납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성도가 죽으면 곧바로 천국에 간다고 하는데 바울은 그 이전에 어떤 과정으로 만남이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공중으로 내려오시면 먼저 죽은 자들이 부활의 몸을 입고 일어나서 공중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이후 살아있는 성도들이 들어올려져 함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단어가 “함께”입니다. 17절 “그들과 함께”, “항상 주와 함께 있으니라”고 합니다. 함께 주님의 일에 헌신했던 성도들을 만나 함께 합니다. 그리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 역시 죽음 이후에 대한 많은 궁금증들이 있습니다. 다 알수 없지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확신한면서 부활의 소망으로 살아갑시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5절)

​두 번째 질문은 “때와 시기”에 관한 것입니다. 즉 주님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입니다. 바울은 이미 성도들이 알고 있음을 전제하면서 두 가지 예를 듭니다. 하나는 밤에 도둑같이 오십니다. 두 번째는 임신한 여인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르는 것처럼 오십니다. 공통점은 갑자기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때에 오십니다. 그러니 결코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내용은 믿지 않는 성도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어둠속에 있는 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4절은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라고 합니다. 성도들에게는 주님이 도둑같이 오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5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본문에서 대조되는 것이 “밤과 어둠”, “빛과 낮”입니다. 성도는 빛과 낮에 속한 자들입니다. 빛과 낮에 속한 성도들에게는 주님이 도둑같이 오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언제 주님이 오셔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내용이 6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고 합니다. 8절에도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를 반복합니다.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밤에 속한 세상 사람들이 잠을 자고 취해 있기 때문입니다. 깨어있지 않고 이들과 함께 세상 정신에 취해 살아간다면 우리 역시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지 않고 깨어 있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10절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잠을 자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이를 위해 8절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고 합니다. 1:3절에 이어 다시 “믿음과 사랑, 소망”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호심경(갑옷)과 투구라는 단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은 영적 전쟁입니다. 사탄의 세력이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지 못하도록, 세상에 취하도록 유혹합니다. 이런 때 영적으로 무장해서 승리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더욱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우리에게 질문해 봅니다. 우리는 이 땅보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주님 오신다면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가? 빛의 자녀들로서 깨어 있어 언제 주님 오셔도 기쁨으로 맞을 수 있도록 늘 준비된 삶을 살아갑시다.

데살로니가전서 4:1-12절/더욱 힘쓰라(25.09.04)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1절)

​데살로니가 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 이제 시작하는 교회이지만 바울의 가르침을 받은 대로, 복음 중심으로 세워지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에 본이 되는 교회입니다. 하지만 좋은 교회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시작은 열정으로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 방향을 잃고 열정이 식어 세상과 다르지 않은 공동체를 이루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권면합니다.

1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바울은 우리 인생의 목적, 신앙의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입니다. 바울 자신이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도는 모두가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는 그런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을 창조주와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섬기며 하나님의 기쁨이 될 때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은 자신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 살아가지만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우리가 기쁨을 누립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은혜가 크고 놀랍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받아 새로운 신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입니다. 전부를 주신 사랑입니다. 이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로서 마땅히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소요리문답 제1문은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 그리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삶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가장 복된 삶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살았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바울은 1절 하 “더욱 많이 힘쓰라”, 10절 하 “더욱 그렇게 행하고”라고 하면서 잘 하고 있는 부분 더 잘 감당하도록 격려합니다. 자칫 우리는 열심을 내다가 멈추고 안주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 이유 때문입니다. 상처를 받기도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할 이유가 있는지 갈등하고, 혹은 대중 속에 묻혀 쉽고 편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멈추고 안주하면 우리는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더 소중한 것을 잃게 됩니다. 바울의 권면 “더 많이 힘쓰라”를 기억해야 합니다. 장애물을 넘고, 안주하려는 마음을 이기고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의 수고 이상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함께 나누는 일을 강조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더욱 힘써야 합니다. 하지 않을 이유를 찾지 말고, 어떻게 더 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3절)

​3절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합니다. 보통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많은 봉사와 헌금, 열심히라고 생각하는데 바울은 “거룩”을 강조합니다. 거룩함 중에서도 음란을 버리고 세상처럼 잘못된 욕망을 추구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를 위해 아내를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대하라고 합니다. 여기 ‘아내’로 번역된 단어는 ‘몸 혹은 그릇’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몸을 거룩하게 통제하라”는 의미도 됩니다.

이런 강조는 당시 문화가 성적으로 문란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욕망 추구를 악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 시대에 이방인과 다른 삶을 살아가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음란의 문제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기준, 방향과 달라야 함을 말해줍니다. 음란은 형제를 해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가정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악에 대해 징벌하시고 심판하십니다.

다시 한번 거룩을 강조하면서 8절 하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 거룩하신 성령님께서 거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전입니다. 그런 성도가 어떻게 음란과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시대 역시 성적으로 혼란한 시대입니다. 성도는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존재임을 기억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가정을 세워가야 합니다.

형제 사랑에 대해서는 너무 잘 하고 있다고 격려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내용은 9절 하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입니다. 1절도 배운대로 행하고, 사랑도 가르침을 받아 행하고 있습니다. 즉 모든 행동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의 사랑이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해 사랑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1:3절에서 “사랑의 수고”가 있다고 했는데 아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 누군가 방문하면 최선을 다해 섬긴 듯합니다.

끝으로 11절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조용히 자기 일을 하라”는 의미는 시끄럽게 다른 사람들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신의 일은 잘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 일에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덕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너희 손을 일하기를 힘쓰라”고 하는데 게을러 일하지 않아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정말 도와야 할 사람을 돕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이 외인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게 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 합시다.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이 됩시다. 서로 사랑합시다. 묵묵히 우리 일을 잘 감당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