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19:24-38절/아브라함과 롯(26.01.28)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26절)

​하나님께서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십니다. 25절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고 합니다. “온 들”, “모든 백성”, “땅에 난 것을 다”라는 표현을 통해 죄악의 도성과 관련된 모든 것을 멸하십니다. 노아 홍수가 죄로 가득했던 온 세상에 대한 심판이었다면, 소돔과 고모라는 죄로 가득한 도성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죄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 가운데서 롯의 가정만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합니다. 26절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이미 17절에서 천사는 경고했습니다.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결과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뒤를 좀 돌아보았다고해서 이렇게 된다는 것이 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본 이유는 소돔 성에 대한 미련이요 집착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그의 마음과 생각을 채우고 있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것을 포기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그녀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영적인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부와 명예와 자리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것과 높은 자리에 있다 해도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면 실은 죽은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 생명의 삶이요 복된 삶입니다.

오늘 본문은 롯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비극 사이에 아브라함 이야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을 비교하고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어나 27절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보 기도했던 자리에 서서 소돔과 고모라 쪽을 바라보니 거대한 연기가 솟아오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무거웠을 것입니다. 조카 롯에 대한 염려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는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었을 겁니다. 하나님 없는 죄악의 세상을 향하는 삶이 아닌, 더디지만 때론 힘도 들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는 믿음의 삶을 결단했을 겁니다.

29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고 합니다. 앞에서는 롯과 관련해서 여호와께서 자비를 더하셨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생각하신 겁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를 생각하셔서 롯을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생각하시도록 그리고 일하시도록 합니다. 누군가를 돕는 가장 강력하고 위대한 방법은 기도입니다. 우리 기도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게 합니다. 우리 기도가 우리와 자녀들, 가정과 교회 공동체를 살립니다.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32절)

​롯 가정의 비극은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된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롯은 소알 성읍에 거주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산으로 도망해서 굴에 거주합니다. 그런데 큰딸과 작은딸이 하나의 계획을 세웁니다. 이 땅에 배필 될 남자들이 없으니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아버지와 동침하여 후손을 이어가자는 겁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생각을 딸들이 자연스럽게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반대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말하냐면 소돔의 가치관에 자녀들이 물들어 있습니다. 성에 들어온 나그네와 동성애를 하는 것이 일상인 도시에서 이런 딸들의 생각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이 아닌 성경적 가치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변하는 세상의 흐름에 따르지 않고 변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기준으로 세상과 싸우며 살아가야 합니다.

또 하나 딸들의 문제점은 31절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해서 남자가 없지만 온 세상 남자들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눈에 보기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질문이 잘못되니 답이 바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대로만, 우리의 한계 안에서만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이래서 위험합니다.

사실 롯이 소돔 땅을 선택한 이유가 눈으로 보니 좋았기 때문입니다. 물이 넉넉하고 푸른 초원이 있는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죄악의 도성이었습니다.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한 것이지요. 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 내 생각이 전부입니다. 믿음의 눈을 뜨는 것, 영적인 지평을 넓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자녀가 없는 상황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인내하고 있습니다. 롯의 딸들처럼 인위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32절부터는 “술을 마시게 하고”가 네 차례 반복됩니다(32,33,34,35). 노아는 스스로 술을 마시고 벌거벗은 결과 자식인 함을 저주하게 됩니다. 반면 롯은 자녀들이 술에 취하게 합니다. 죄와 술취함이 연결됩니다. 뿐만 아니라 33절과 35절은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합니다. 롯의 영적인 상태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가장인 아버지가 깨어서 자녀들을 바른길로 인도하고 본을 보여야 하는데 영적으로 무감각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버지와의 동침 결과 두 딸이 임신합니다. 큰딸은 아들을 낳고 ‘모압’이라고 하는데 의미가 “아버지로부터 유래한 자”입니다. 둘째 딸도 아들을 낳고 ‘벤암미’라고 합니다. 의미가 “나의 친족의 아들”입니다. 이들이 ‘암몬’족속이 됩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민족들이 이렇게 생겨납니다.

세상을 향하여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나라 꿈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갑시다. 세상 가치관에 흔들리지 말고 말씀의 기준을 선명하게 붙잡읍시다. 이를 위해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적용하는 삶이 됩시다.

창세기19:12-23절/성 밖으로 나오라(26.01.27)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12절)

​소돔 성에서 롯이 영접한 두 명의 나그네를 사람들이 상관하겠다며 찾아와 롯의 집을 에워쌉니다. 롯의 권면도 듣지 않고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 합니다. 긴급한 상황에서 두 천사가 롯을 집안으로 끌어들이고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하여 위기를 모면합니다. 이 과정에서 소돔이 얼마나 심각한 죄악의 도성인지가 드러났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하지만 롯에게는 구원의 은혜가 임합니다.

천사들이 롯에게 “성에 있는 사위나 자녀, 그리고 성 중에 롯에에 속한 사람들은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고 합니다.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냐에 상관없이 롯에게 속해있다면, 그리고 순종해서 함께 이 성을 떠난다면 구원을 베풀어줍니다. 이에 롯이 나가서 딸과 결혼을 앞둔 사위들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14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저녁때에 천사들이 소돔 성에 도착했고 심판은 해가 뜨면서 시작됩니다. 롯이 이 소식을 전한 시간은 늦은 밤이나 새벽녘이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까지 이런 말과 행동을 하지 않은 장인이 다급하게 이런 요청을 한다면 귀를 기울일 법도 한데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어제 본문에서 롯이 소돔 성에서 높은 자리에는 앉아 있지만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살펴보았는데 사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위들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늘 죄악 가운데서 살아왔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갑자기 이런 말을 하니 믿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이처럼 죄악의 일상화가 위험합니다.

예수님은 재림을 설명하시면서 마24:37-39절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하십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홍수로 세상이 심판을 당한다고 해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심판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일상을 살아갔습니다. 롯의 사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우리가 주의해야 할 말씀입니다. 주님 다시 오신다는 것을 알지만, 현실은 그것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오직 이 땅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그 날을 준비하며 깨어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천사들은 다시 한번 소돔 성의 멸망 이유를 설명합니다. 13절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앞에서도 계속 반복된 내용입니다. 소돔의 멸망은 죄악의 결과로 고통당하며 신음하는 사람들의 부르짖음 때문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상실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의미 없는 삶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누군가로 하여금 부르짖게 하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21절)

​드디어 동이 트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천사들은 롯을 재촉합니다. 빨리 이 성에서 나아야 합니다. 그런데 롯은 지체합니다. 그러자 16절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지체하는 롯을 잡아 끌어 성 밖에 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롯은 지체했을까요? 어쩌면 롯 역시 사위들과 마찬가지로 심판에 대한 확신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더 큰 이유는 소돔 성에 대한 미련 때문입니다. 자리와 부를 누렸습니다. 사람들의 인정도 받고 재미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미련이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멸망 당하면 아무 쓸모 없는 것들입니다. 사라져버릴 것들입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관심을 두며, 무엇을 쌓으며 살아가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천사들은 롯에게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면서 17절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고 합니다. 죄악의 도시에 대해 돌아보아서도 안 되고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이러해야 합니다. 돌아보지 말고 머물지 말고, 지체하지 말고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체하며 머뭇거리던 롯이 다급하게 말을 합니다. 그것도 길게 말합니다. 산으로 도망하라는 말에 대한 대답입니다. 산까지 갈 수 없다는 겁니다. 대신 근처 작은 성읍으로 도망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천사 입장에서 보면 자비를 베풀어서 롯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지체하지를 않나, 이제는 새로운 요구사항을 제시합니다. 그럼에도 21절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네가 말하는 그 성읍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그렇다면 원래 이 작은 성읍은 멸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롯 때문에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 성의 이름이 ‘소알’입니다. 의미가 ‘하찮은’입니다.

왜 롯은 산이 아닌 성읍으로 도망하려 했을까요? 롯의 말처럼 산으로 가다가 죽을까봐 두려워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가까운 성읍이 사실은 더 위험합니다. 그래서 19:30절을 보면 결국은 다시 산으로 도망합니다. 그렇다면 롯은 여전히 성읍 생활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소돔이 멸망한다면 작은 성읍에서라도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가인의 후예들이 계속 머무는 곳이 성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성은 하나님의 간섭없이 자신들의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 스스로 보호하며 힘을 키울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 성읍의 결과가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롯은 여전히 그곳에 미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안전한 곳은 하나님 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롯의 요청에 22절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롯을 위하여 지체하십니다.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일에서 지체하지 말고 떠납시다. 머물지 말고 돌아보지 맙시다. 또한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입니다. 깨어 준비하며 사라져버릴 것들이 아닌 영원한 것을 쌓아가는 믿음의 삶이 됩시다.

창세기19:1-11절/복 있는 사람은(26.01.26)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1절)

​두 천사가 저녁 때에 소돔에 도착합니다. 18장에서 아브라함을 만난 나그네는 셋이었습니다. 한 분은 하나님이고 둘은 천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대화를 하였고 천사 둘이 소돔 땅에 도착한 것입니다. 1절 “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롯이 성문에 앉아 있습니다. 구약시대 성문은 재판과 행정이 이루어지는 장소였습니다. 롯이 이곳에 앉아 있었다면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9절에서도 소돔 사람들이 롯을 공격하면서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롯은 죄악의 도시인 소돔 중심에 앉아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떠난 롯은 소돔 근처에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장막을 옮겨 소돔 중심으로, 그리고 이제는 한 자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한때 전쟁의 위기를 겪었지만 여전히 그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롯의 삶을 보면 시편 1편 말씀이 생각납니다. 시1:1-2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죄는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점점 깊어집니다. 악인들의 꾀에서 죄인들의 길로, 그리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이런 삶을 결코 복된 삶이 아닙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로 날마다 더 가까이 나가는 삶입니다. 안타깝게도 롯은 그런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심각한 문제를 만납니다.

나그네를 본 롯은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자신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당시 문화는 이처럼 나그네를 환대하는 문화였습니다. 그런데 천사들이 거절합니다. 그러자 다시 롯이 간청을 했고 천사들은 롯의 집에 들어갑니다. 롯은 무교병을 준비해서 대접합니다. 롯이 대접한 음식이 아브라함이 대접한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세 스아의 가루(30-40리터)로 떡을 만들고, 기름진 송아지를 잡아 요리해서 대접했습니다(18:6-7절). 아마 롯은 시간상 저녁이었기 때문에 무교병으로 대접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다음에 일어납니다. 나그네들이 잠자리에 들려는 시간에 소돔 성 사람들이 롯의 집을 에워쌉니다. 4절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라고 표현합니다. 젊고 나이 들고를 막론하고, 멀리 살고 가까이 살고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 무엇을 위해 모였는가? 나그네를 환대해야 할 때는 외면했던 사람들이 죄를 짓기 위해, 그것도 흉악한 범죄를 위해 모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5절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여기 “상관하리라”의 원어 의미는 “우리가 그들을 알 수 있으리라”입니다. 이 단어는 성적인 결합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계획하는 일은 동성과의 성관계입니다. 그것도 많은 사람이 두 사람을 상대로 그렇게 하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라는 겁니다. 죄악의 도시 소돔에서는 일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소돔의 부패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지경입니다. 죄를 죄로 알지 못하고 즐기는 죄의 일상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욕망에 눈이 멀어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7절)

​소돔 사람들의 요구에 롯이 나가 대화를 시도합니다. 7절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하지만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롯이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8절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당시 문화는 나그네가 일단 집에 들어오면 주인이 생명을 다해서 지켜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그네를 지키려는 롯의 노력이 귀합니다. 그런데 그의 제안은 충격적입니다. 자신의 두 딸을 대신 이 포악한 사람들에게 내어 놓겠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 많은 해석들이 있지만, 핵심은 롯의 제안이 상식적이지 않다는 것이고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롯 역시 소돔의 가치관에 깊이 물들어 있다는 겁니다.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더 심각한 문제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롯의 제안이 소돔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롯은 자신이 이 땅에 들어와 성문에 앉는 위치에 오른 것을 자부심으로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전혀 영향력이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롯의 제안이 오히려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습니다. 이제는 나그네뿐 아니라 롯과 모든 가족들을 해치려합니다. 아브라함을 떠난 롯, 하나님을 떠난 롯의 삶이 비참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가는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롯이 대조됩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천사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소돔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욕망에 눈이 먼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한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죄의 길로, 세상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순종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창세기17:1-27절/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26.01.23)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5절)

​아브람은 그의 아내인 사래를 통해 자녀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때 아브람의 나이가 86세였습니다. 그리고 13년이 지난 99세에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십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침묵하신 13년은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점점 희미해져가고 이스마엘에게 소망을 두며 살아가는 때였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1절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여기 “전능한 하나님”은 ‘엘샤다이’로 무한한 능력의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가장 먼저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아브람의 실패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내가 할 수 없으니 하나님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와 조급함이 실패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앞으로 어떤 말씀을 하시든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하십니다. 엘샤다이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또한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시는데 상황과 환경에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너와 함께 하는 하나님이 무한한 능력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 신뢰해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라. 하나님이 이루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과 다시 언약을 맺어주시는데 2절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본문에 “내 언약”이라는 단어가 9번이나 반복됩니다(2,4,7,9,10,13,14,19,21). 노아와 맺은 언약도 하나님은 “내 언약”이라고 하셨습니다(9:9).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맺으시지만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영원히 지키시는 언약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언약”이라는 말도 반복됩니다(7,13,19). 사랑으로 언약을 맺어주신고 신실하심으로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렇습니다. 은혜로 선택하시고 하나님께서 붙잡아주시고 이끌어주시며 완성하십니다. 그 은혜에 감사함으로 우리는 언약에 신실한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십니다. 이를 위해 이름을 바꿔주시는데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람’의 의미는 “존귀한 아버지”라면 ‘아브라함’은 “여러 민족의 아버지”입니다. 현실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사래 사이 자녀도 없습니다. 현실의 눈으로 보면 말이 안 되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름을 바꿔주시고 그렇게 불러주십니다. 그리고 만들어가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정체성을 우리의 현실로 바라보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들어가실 미래를 약속의 말씀으로 바라보며 정의하고 선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자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언약을 맺어주셨는데, 이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님은 할례를 행하도록 하십니다. 11절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할례를 거부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하십니다.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육체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롬2:29절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라고 합니다. 마음의 할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 다른 말로 인치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할례를 받은 성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19절)

​하나님은 사래의 이름도 바꿔주십니다. ‘사래’는 “공주, 여왕”이라는 뜻인데, ‘사라’로 바꿔주십니다. 의미가 아브라함처럼 “여러 민족의 어머니”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꿔주신 유일한 여인이 ‘사라’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습니다. 비웃음입니다. 17절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86세에 이스마엘을 낳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생산능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사라는 말할 것도 없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약속하신 바를 이루십니다. 즉 인간의 능력이 끝나는 지점에서 하나님은 전능하신 능력으로 약속을 이루십니다. 인간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인간의 절망이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나 돌봐주시길 요청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19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고 하십니다. 낳은 자녀의 이름까지 ‘이삭’이라고 지어주십니다. ‘이삭’의 뜻은 “그가 웃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웃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진정한 웃음, 기쁨을 주십니다. 이삭은 아브라함 한 가정의 기쁨만이 아니라 여러 민족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이 태어날 시기도 정확하게 알려주십니다. 21절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이에 아브라함은 23절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할례를 행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합니다. 완전히 이해되지 않지만 말씀에 순종합니다.

실수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다시 찾아오시고 다시 언약을 맺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차선책이 아닌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을 이루십니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불가능하다고 하나님을 비웃고 포기하고 싶은 그때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때입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붙잡읍시다.

창세기16:1-16절/나를 살피시는 하나님(26.01.22)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2절)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하늘의 뭇별들을 보여주시며 후손에 대한 약속을 해주셨고, 쪼갠 고기 사이를 홀로 지나가시는 횃불 언약으로 땅에 대한 약속을 확증해주셨습니다. 이제 이 약속을 붙잡고 믿음으로 인내하면 됩니다. 그런데 위기가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루려합니다. 그 결과 한 가정에 비극이 찾아옵니다.

1절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라고 합니다. 분명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라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래를 통해서 약속의 자녀를 주신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그것을 다 아시고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인간의 능력이 조금도 포함되지 않는 오직 은혜로,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약속을 받은지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시지 않자 사래는 불안합니다. 10년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의 방법,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사래의 마음이 이해됩니다. 자신이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닌지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한 방법이 자신 곁에 있는 하갈이라는 여종을 통해서 자녀를 얻으려 합니다. 당시에 이런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혼한 신부가 2년 안에 아이를 낳지 못하면 노예를 사서 후손을 잇도록 했습니다. 그러니 사래가 선택한 방법은 세상적으로는 문제가 없는지 모르나 하나님의 방법은 아닙니다.

사래는 2절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라고 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서운함을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안 주시니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래는 출산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알았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생명의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은 외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위대하고 하나님의 방법은 무한한데 유한한 인간은 자신의 한계, 자신의 방법 안에 갇혀 선택할 때가 많습니다. 문제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문제에 집중할 때 이런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더 심각한 일은 이런 사래의 요청에 아브람이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그대로 따랐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늘의 뭇별을 보았고, 감동적인 횃불 언약을 경험한 아브람이 멈추게 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매일 괴로워하고 한숨짓는 사래의 요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2절 하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는 마치 3장에서 먼저 선악과를 먹은 하와가 남편 아담에게도 주자 순순히 받아 먹은 것과 비슷합니다. 멈추어야 할 기회를 놓친 것이고 그 결과는 심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말씀을 기준으로 가야 할지, 멈추어야 할지를 잘 결정해야 합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니 하갈이 임신을 하고 여주인 사래를 멸시합니다.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로인해 사래가 불평을 하자 아브람은 자신이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일을 사래에게 맡겨버립니다.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고 하갈은 견디지 못하고 도망합니다. 아이를 잉태한 여인이 집을 떠나 광야를 방황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합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믿음으로 기다리지 못하고 사람의 생각으로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한 결과가 이렇습니다.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14절)

​사래의 학대를 피해 도망하는 위태로운 여인 하갈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납니다. 가련한 한 여인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장소가 7절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이라고 합니다. 여기 “술 길”은 애굽 근처 지역입니다. 그렇다면 하갈은 자신의 고향인 애굽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묻습니다. 8절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마치 범죄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3:9)라고 물으신 것과 비슷합니다. 하갈의 현주소를 묻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분명하게 하갈의 정체성을 “사래의 여종”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갈이 가장 염려하고 있는 뱃 속에 있는 자녀에 대한 약속을 줍니다. 11절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아들 이름을 ‘이스마엘’로 지으라고 합니다. 의미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고통과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찾아오시며 인생의 벼랑끝에서 해결책을 제시해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마엘의 미래를 알려주시는데 12절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들나귀처럼 자유분방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다른 사람과 대항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이 말씀처럼 이스마엘의 후손들로 인해서 늘 갈등과 전쟁이 계속되는 것을 봅니다.

하갈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13절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두 번이나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얼마나 큰 감동이 되었는지를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그곳 샘 이름을 ‘브헬라해로이’라고 부르는데 의미가 “나를 살펴보시는 살아계신 자의 우물”입니다. 하갈은 여호와의 사자 권면처럼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낳습니다.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부릅니다.

어쩌면 하갈의 고백은 아브람과 사래가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하는지를 알게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고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지만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문제 앞에서 우리의 고통을 들으시고 우리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간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인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해결하십니다.

창세기15:1-21절/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26.01.21)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절)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롯을 구한 후,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1절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에게 두려움이 있습니다. 승리했지만 상대는 동쪽에 위치한 강대국 네 나라 연합군이었습니다. 이들이 보복을 한다면 아브람 혼자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아브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나는 네 방패요”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아무리 대적이 많고 강해도 하나님께서 막으시면 건들 수 없습니다.

또한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십니다. 아브람은 소돔 왕이 주는 전리품을 거절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것으로 살아가는 존재이지 세상의 왕을 통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님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지극히 큰 상급이 되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이 상급은 이어지는 내용인 자녀(후손)과 땅을 주셔서 큰 민족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주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상급을 이야기하시자 아브람은 자신에게 자녀가 없음을 하소연합니다. 민족을 이루려면 우선은 자녀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아직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자녀를 낳는 것이 쉽지 않은데, 시간이 흐르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조급합니다. 아브람은 만약에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시지 않는다면 엘리에셀이라는 집에서 길린 자를 양자로 삼아 상속자로 삼을 계획까지 세우고 있습니다. 아브람의 답답한 마음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4절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아브람의 씨앗으로 후손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약속에는 아브람과 사래를 통해서 주시는 자녀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16장에 가면 하갈이라는 여종을 통해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현실로 해석해서 자신의 방법으로 이루려 한 것입니다. 결과는 큰 갈등과 혼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을 때 주의해야 할 내용입니다. 우리의 상황에 따른 우리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따른 우리의 능력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방법을 믿음으로 기대해야 합니다.

그래서 6절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것을 의로 여기십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의로 여기시고”는 “기준에 맞다, 도달하다”의 의미입니다. 즉 믿음으로 자손과 땅의 약속을 받을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3:6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설명합니다. 어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하늘의 뭇별들을 보여줍니다. 이 무수한 별들처럼 자손이 많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아브람의 마음에 감동이 넘쳤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반드시 이루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요, 이루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17절)

​자손에 대한 약속에 이어 땅에 대한 약속을 하십니다. 7절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이 말씀은 당시 언약을 체결하기 전에 전제했던 내용의 형식입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내용은 하나님과 아브람이 언약을 체결하는 장면입니다. 아브람은 8절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불신하는 것이 아닌 붙잡을 증거를 요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3년 된 동물들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동물들을 10절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쪼개 놓으라고 하지 않았지만 아브람이 알아서 쪼개고 서로 마주 대하여 놓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려는지를 알았습니다. 당시 이렇게 언약을 맺었습니다. 짐승을 쪼개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사이를 언약 당사자들이 지나갑니다. 의미를 언약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이 짐승처럼 쪼개질 것을 약속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맺기 전 앞으로 펼쳐질 이스라엘의 미래를 알려주십니다. 이방에서 객이되어 400년 동안 괴롭힘을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때가되면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를 징벌하시고 이스라엘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와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16절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나님은 가나안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는데, 그 땅은 가나안 백성들이 잘 살고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 사람들을 진멸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하는 것은 부당해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아모리 족속의 죄악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도구로 아모리 족속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이 가득 차니 하나님은 바벨론을 들어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서 떠나게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아브람과의 약속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민족을 준비하시고, 그 민족으로 땅을 차지할 때를 기다리십니다. 이 모든 일은 아브람이 세상을 떠난 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람은 약속을 신뢰하고 평안히 눈을 감으면 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은 이처럼 유한한 우리의 시간을 초월해서 일하십니다.

17절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횃불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신 겁니다. 그래서 횃불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 언약의 특징은 아브람은 지나가지 않았다는 겁니다. 무엇을 의미하냐면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신다는 겁니다.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쪼개질 것을 약속하시는 것이지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횃불 언약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쪼개시면서까지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이 은혜와 사랑을 누리며 살아간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방패가 되시고 상급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갑시다. 말씀으로 약속하시고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