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10:1-39절/다시 언약을 맺은 사람들(25.12.01)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행하여”(29절)

​8-10장에서 백성들은 성경을 읽고 회개하면서 과거 역사를 돌아봅니다. 결론은 9:32절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하심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인자하심으로 지키셨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9:34절 “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조상들이 주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며 주의 명령과 주께서 그들에게 경계하신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9:36절 하 “아름다운 소산을 누리게 하신 땅에서 우리가 종이 되었나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서 행복을 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회복해야 합니다. 그 방법이 9:38절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우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열심히 분주하게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지나온 역사를 돌아보며, 무엇이 문제인지를 발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점검하여 바른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정한 회복의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10장에는 언약을 맺은 사람들과 구체적인 언약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27절은 언약맺은 사람들의 명단입니다. 많은 이름이 나오는데 구분해보면 1절은 “하가랴의 아들 총독 느헤미야”입니다. 최고지도자입니다. 그리고 2-8절까지는 제사장들입니다. 9-14절은 레위인들이고 14-27절까지는 백성의 우두머리들입니다. 한마디로 정치와 종교 지도자들이 먼저 언약을 맺고 있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서를 보면 이스라엘 문제의 많은 부분이 지도자들의 문제였습니다. 이방인들과의 통혼 문제도 그렇고, 가난한 백성들을 힘겹게 해서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먼저 하나님과 언약을 세웁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맹세를 합니다. 내용이 29절 “맹세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행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순종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짐을 지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신분, 영광스러운 신분을 가졌으니 그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신10:13절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백성들의 행복을 위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의 율법이 짐이 되고 부담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멀어지므로 발생한 일입니다. 결국 말씀보다는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다 지금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의 행복을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 두지 아니하리라”(39절)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은 구체적인 결단을 합니다. 첫째 이방인과 통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30절). 하나님만 섬기며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도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두 번째는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겠다고 합니다(31-32절). 하나님 백성의 특징은 안식, 즉 쉼입니다. 세상의 특징은 쉼이 없습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멈추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을 신뢰합니다. 그것이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나만 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쉼을 누리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삼분의 일 세겔을 수납하여 성전 예배를 위해 사용하게 합니다. 백성들이 언약을 맺으며 이렇게 결단하는 것을 보면 그 전에는 이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쩌면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하겠지라는 마음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마음이 시간이 흐르면서 성전 예배를 무력화시켰고 그 결과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습니다. 이제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가, 우리가 감당하겠다고 합니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동참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는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립니다(35-37). 토지 소산의 맏물과 과목의 첫 열매를 드릴 뿐 아니라 맏아들들과 가축의 처음 난 것도 드립니다. 특이한 것은 맏아들을 드리는 겁니다. 이것은 출애굽 유월절에서 어린양의 피로 장자들이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직접 맏아들을 성전에 바친 것이 아니고 민18:15-16절을 보면 다섯 세겔을 속전으로 지급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기업이 없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성전 봉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식으로 백성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육신적인 필요를 채우고, 반대로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백성들을 영적으로 채우는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어 잘 세워주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39절 하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 두지 아니하리라” 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성전 중심의 삶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함이 중요합니다. 창조주되시며 인생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다른 것에서 행복의 의미를 찾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먼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런데 회복을 위한 목록 대부분이 물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인데,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니 말씀의 기준대로 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것의 주인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믿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책임져주실 것을 신뢰하며 살아갑시다.

느헤미야8:1-18절/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25.11.28)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1절)

​느헤미야 7장은 11장으로 연결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7장 내용은 성벽을 건축한 후 예루살렘 안에 거주하는 백성이 적어(4절)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성들을 계보대로 등록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11장은 제비를 뽑아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이주시킵니다(11:1절). 그렇다면 8-10장은 7장과 11장 사이에 의도적으로 들어가 있는 부분입니다.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내용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내용이 언제 있었던 사건인지에 대해 많은 의견들이 있습니다. 갑자기 에스라가 등장하기 때문에 2차 귀환 후 일어났던 일을 이곳에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느헤미야의 흐름을 따라 성벽 재건 후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에스라와 느헤미야서를 통해 성경 저자가 강조하는 내용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스룹바벨 중심 성전 건축(스1-6장), 에스라 중심 신앙 건축(스7-10장), 느헤미야 중심 성벽 건축(느1-7장), 에스라 중심 신앙 건축과 언약 맺음(느8-10장)입니다. 이 순서에 따르면 외형적으로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적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신앙회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벽 건축을 마친 백성들이 일곱째 달에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와 낭독해주기를 요청합니다. 일곱째 달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한 해를 시작하는 달이며 여러 절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율법을 낭독하는 초하루는 나팔절로 한 해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10일에는 속죄일이 있고, 15-21절은 초막절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한 해를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특이한 것은 이 말씀 운동이 지도자들의 주도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요청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에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성벽 재건의 과정에서 내외부 적으로 많은 문제들이 있었는데 말씀으로 돌아가야 함을 절실히 깨달은 듯합니다.

수문 앞 광장에 많은 백성들이 모여 새벽부터 정오까지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한마디로 말씀 사경회,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2절과 3절에서 두 번 반복되는 말이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입니다. 말씀이 낭독되는 것도 귀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알아듣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성경이 우리 각자에게 주어져있고 말씀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지만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들을 귀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면 안 되고 7절과 8절에서 또 두 번 강조하는 것이 “그 뜻을 해석하여 … 다 깨닫게 하니”입니다. 낭독하는 말씀을 바르게 해석해서 바르게 깨닫게 합니다. 이 과정이 필요했던 것은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백성들은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긴 포로 생활 동안 히브리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백성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이 해석해서 바르게 깨닫게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르게 해석해서 바르게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 12절과 13절에 반복되는 것은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입니다. 말씀을 계속해서 밝히 알아갑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절기를 지킵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알아 듣는 것이 필요하고 다음은 해석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하며 계속해서 밝히 알아가는 것이 중요함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어느 과정에 머물러 있습니까?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10절)

​많은 백성들이 모인 광장에 에스라가 나무 강단에 섭니다. 율법의 두루마리를 펼 때 모든 백성이 일어섭니다.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경외의 표현입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을 송축하자 백성들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으로 화답하며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이 광경을 상상해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지만 숨죽은 듯 조용합니다. 에스라의 입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활짝 열고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마음에 새깁니다.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율법의 말씀을 들은 백성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말씀을 통해서 지난 온 시간들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속에 의문이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고난을 겪어야 하는가? 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하나님의 성전은 무너졌는가? 왜 이방 땅에서 긴 시간 포로 생활을 해야 했는가?” 그런데 말씀을 통해 이해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돌아와 성전과 성벽을 건축한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의 눈물과 감사의 눈물이 함께 흐릅니다. 어쩌면 광장이 울음바다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러자 지도자들이 권면합니다. 9절 하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고 합니다. 이제 과거의 슬픔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기쁨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미래로 나아가자고 합니다. 그래서 10절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그렇습니다. 성도의 진정한 힘은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모든 백성이 크게 즐거워합니다.

말씀을 밝히 깨달으니 일곱째 달에 초막절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절기를 지키되 형식적 습관적으로 지켜서는 안 되고 온전하게 지켜야 함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초막을 만들고 절기를 지킵니다. 초막절은 과거 출애굽 후 광야 생활 동안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이전에도 분명 초막절을 지켰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절기의 의미를 깨닫고 온전하게 지킴으로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벅찬 감격을 누립니다. 이것을 17절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기뻐하며”라고 표현합니다. 은혜와 감동의 절기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밝히 알고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처럼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는지 돌아봅니다. 말씀으로 인한 감격이 있는지 돌아봅니다. 습관과 의무가 아닌 말씀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순종하므로 큰 기쁨과 힘을 얻는 삶이 됩시다.

느헤미야7:5-73절/내 마음을 감동하사(25.11.27)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계보를 얻었는데”(5절)

​예루살렘 성벽이 52일 만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완성됩니다. 그런데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4절 “그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성읍에 거주하는 사람이 많지 않고 집들도 무너져있습니다. 성벽이 온전해도 사람이 없다면 이전의 영광을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을 성안으로 이주시켜야 할까요? 민감한 문제입니다. 이미 삶의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합당한 이유 없이 이주시킨다면 반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느헤미야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5절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하나님께서 감동하십니다. 지혜를 주십니다. 이 문제는 공평하게 모든 백성이 함께 짊어지고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를 위해 느헤미야는 계보대로 등록하게 합니다. 그 과정에서 5절 하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계보를 얻었는데”라고 합니다. 1차 귀환자들의 계보를 찾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이미 에스라 2장에 나왔던 내용입니다. 같은 내용을 두 번 반복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가 원래 하나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저자는 앞부분과 뒷부분에 긴 계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계보 뒤에 8-10장까지는 말씀 운동을 통한 회개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저자는 이들이 제2의 출애굽 백성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새롭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야 할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다시 계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 2장을 묵상하면서 이미 살펴본 내용이지만 간단하게 계보를 정리하겠습니다. 7절에는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중심으로 한 1차 귀환 지도자 12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내용인 스2:2에는 11명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비교해보면 ‘나하마니’가 빠져 있습니다. 필사자의 실수로 빠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12명의 지도자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합니다. 이것 역시 바벨론에서 놓임을 받고 귀환한 것을 제2의 출애굽으로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라”(7절)

​8-24절까지는 가문별 숫자입니다. 그래서 “바로스 자손”, “스바댜 자손”으로 이어집니다. 25-38절까지는 지역별 숫자입니다. “기브온 사람”, “베들레헴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39-42절은 제사장들의 숫자입니다. 상당히 많은 제사장들이 돌아왔습니다. 이에 비해 43-45절에 기록된 레위 사람의 숫자는 적습니다. 이런 차이는 제사장들은 백성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는 사역을 합니다. 반면 레위인들은 제사장을 도와 힘든 일을 감당해야 하며 이름없이 빛도 없이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레위인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섬기며 성전에서 봉사하는 것보다 이방 땅에 남기를 선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2차 귀환 때는 레위인이 한 사람도 없어 다시 모집해서 돌아오는 일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편하면서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일을 한다면,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궂은일을 하기도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 다 필요한 사역들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기준으로 좋고 나쁨을 구별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를 따라 기쁨으로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불어 서로 돌아보며 힘들 일들을 함께 짊어져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46절부터는 느디님 사람들 명단입니다. 이들은 성전에서 허드렛일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귀환해서 봉사합니다. 61절부터는 이스라엘에 속했는지 알 수 없는 자들, 계보를 찾을 수 없는 자들의 명단입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순수성이 중요하기에 이들을 분류합니다. 특히 제사장들 중에 계보를 확인할 수 없는 자들은 64절 “그들을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합니다. 공동체의 거룩함을 위해서 단호하게 조치합니다. 이렇게 돌아온 사람들의 숫자는 66절 “온 회중의 합계는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입니다.

70-72절까지는 족장들과 총독, 그리고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위해 드린 예물에 관한 내용입니다. 한마디로 많은 재물을 드렸습니다. 1차로 귀환한 백성들의 상황을 보면 아직 제대로 정착하지 못해서 안정적이지 않고 미래도 불안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먼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헌신하며 마음을 모읍니다.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둡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을 것입니다.

순간순간 해결해야 하고, 선택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감동하심으로 지혜롭게 감당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느헤미야6:15-7:4절/하나님께서 이 역사를(25.11.26)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15절)

​성벽 공사 마무리 단계에서 대적들의 공격이 집요했습니다. 느헤미야를 함정에 빠지게 하고 제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성벽 공사가 마무리됩니다. 그 기간이 52일이었다고 합니다. 약140년 동안 무너져있던 성벽이 단기간에 완성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을 16절 하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마음이 있지만 누구도 도전하지 않은 이 일에 대해서 느헤미야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감동하셨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보다 더 처참히 무너진 백성들의 마음을 일으켜 세워 각자 맡은 부분을 건축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완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그리고 느헤미야와 백성들이 능력의 하나님과 함께하므로 이룬 일입니다.

그러자 16절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절대 이루지 못하리라 확신했습니다.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방해하고 위협했습니다. 그런데 완공한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대적들도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알고 인정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누군가가 꿈을 꾸며 협력해서 하나님과 함께 그 일을 이룰 때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그렇게 꿈꾸는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성벽 완공의 기쁨 가운데도 여전히 문제는 있었습니다. 유다의 귀족들이 도비야라는 대적과 동맹하고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일부의 귀족들은 느헤미야와 유다의 상황을 도비야에게 알려줍니다. 한마디로 첩자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도비야가 대책을 귀족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이들의 동맹은 결혼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2:10,19절은 도비야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비야는 이방인입니다. 율법은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합니다. 우상숭배의 위험성 때문입니다.

이미 에스라서9-10장에서는 이방인과의 결혼이 심각한 문제로 등장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스9:2절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이런 죄악에 방백들과 고관들이 앞장섰습니다. 이에 에스라는 속옷과 겉옷을 찢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으로 예루살렘에 모이게 한 후 스10:11절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고 명령하였고 백성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죄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내부와 외부의 문제 중심에 귀족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와 지위를 주신 것은 느헤미야와 함께 하나님의 뜻을 감당하라고 주신 것임에도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대적들과 손을 잡고 느헤미야를 공격하고 하나님의 일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감사한 것은 이런 사람들이 있지만, 그래서 힘들었지만 연약한 많은 백성들이 하나되어 성벽 공사를 완공했다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특별한 몇 사람을 통해서가 아닌 이름 없이 헌신하는 많은 이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 집 맞은편을 지키게 하라 하였노니”(3절)

​성벽이 건축되어 마지막 과정으로 문짝을 답니다. 그리고 7:1절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하는데, 문지기, 노래하는 자들, 그리고 레위 사람들은 성전과 관련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성벽을 완성하고 세웠다는 것은 성벽 재건의 일차 목적이 성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전은 아무나 함부로 접근해서는 안되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런데 성벽이 없을 때는 성전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함부로 가까이했을 것입니다. 이제 성벽을 세워 바르게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회복의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바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바른 예배여야 함을 알게 됩니다. 또한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성벽을 세우듯 방해하는 것을 막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선순위를 예배에서 빼앗아가는 것이 있다면 막아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데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면 벽을 세워야 합니다. 지켜야 할 것들을 잘 지켜나갈 때 복된 인생이 됩니다.

성벽이 세워지므로 예루살렘 공동체가 이루어집니다. 이곳을 다스리도록 하나니와 하나냐를 세웁니다. 하나니는 1장에서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 소식을 전한 형제입니다. 하나냐를 소개하면서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뛰어난 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을 지키는 일은 3절 하 “자기 집 맞은편을 지키게 하라”고 합니다. 성벽을 건축할 때도 이런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래서 빨리 완공이 되었습니다. 지키는 것도 같은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모든 성벽을 지킬 수 없지만 각자 맡은 부분을 성실하게 지킬 때 결국 성을 온전하게 지키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어떤 일을 감당할 때 한 사람이 모든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각자가 자신이 맡은 일을 잘 감당할 때 아름답게 이루어집니다.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이나 비난 혹은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묵묵히 잘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느헤미야는 성문을 언제 열고 닫아야 할지 알려줍니다. 해가 높이 뜬 후 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해가 지기 전에 닫으라고 합니다. 어둠을 틈타 누군가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4절은 예루살렘 성읍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성읍은 크지만 주민이 적고 집도 아직 건축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 역시 또 하나의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하나님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 과정을 통해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다시 꿈꾸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느헤미야6:1-14절/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25.11.25)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2절)

​느헤미야는 공동체 내부에서 일어난 갈등을 해결하였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높은 이자를 받았던 귀족들을 꾸짖고 이자 받기를 그치게 하였습니다. 그 일에 느헤미야가 본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내부 문제가 해결되자 다시 외부에서 공격이 시작됩니다. 산발랏과 도비야 그리고 아라비아 사람 게셈입니다. 이들은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는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다 공사가 진행되자 건설 현장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이제는 공사가 진행되어 마무리 단계에 이르자 지도자인 느헤미야를 제거하고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성벽 공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입니다. 이제 성문 문짝만 달려 끝이 납니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임무를 잘 감당하였습니다. 수고의 열매가 맺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이 대적들에게는 두려운 일입니다. 느헤미야를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웁니다. 2절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 오노 평지에서 만나자고 합니다. 이곳은 유대와 사마리아 경계 지역입니다. 이들은 서로 의논하기 위해서 만나자고 그럴듯하게 포장했지만 실은 느헤미야를 해하기 위함입니다. 느헤미야의 영향력이 크기에 느헤미야만 제거하면 모든 것을 와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느헤미야는 이들의 의도를 간파합니다. 그래서 성벽 공사 마무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4번이나 사람을 보내 만나자고 제안합니다.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들의 몸부림이 대단합니다. 느헤미야가 여전히 거절하자 이제는 새로운 방법을 선택합니다.

편지를 보내는데 5절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보냅니다. 봉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안에 기록된 내용은 누구든지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소문이 퍼지도록 의도한 것입니다. 그 안에 기록된 내용은 거짓으로 가득합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건축하는 이유가 반역을 하기 위함이며, 느헤미야 자신이 왕이 되어 다스리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페르시아 왕에게 반역에 해당하는 중죄라고 편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거짓말로 느헤미야를 자극해서 기어이 만나 공격하려고 합니다.

느헤미야가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요? 고국의 어려운 형편을 듣고 자신의 편안한 자리와 보장된 미래를 내려놓고 어려움 속에서도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모함을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대로 직접 만나서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고 그들의 거짓됨을 공격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그들의 의도를 알고 있습니다. 9절 “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여기에 휘말리면 두려움 속에서 성벽 공사를 중단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들을 상대하지 않고 대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9절 하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 기도 내용을 보면 느헤미야도 인간인지라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많이 지쳐있는 듯합니다. 거기에 대적들의 거짓 소문과 살해 위협은 느헤미야를 낙심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모든 것 아시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께서 힘을 주셔서 이겨내고 감당하길 기도합니다.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14절)

​그런데 대적들의 공격이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의 측근을 뇌물로 포섭해서 함정에 빠지게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들이 지금까지 그곳에서 어떻게 힘을 유지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권모술수로 가득합니다.

느헤미야와 가깝게 지냈던 선지자 스마야가 보이지 않자 만나러 가보니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대적들이 느헤미야를 죽이러 밤에 올 것이니 피해야 한다. 가장 안전한 곳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곳으로 가서 숨어있자.”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제사장만 들어갑니다. 함부로 들어가면 율법을 어기는 일입니다. 느헤미야는 제사장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떤 이유가 되었든 성전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느헤미야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성전에 숨었다는 이야기가 백성들에게 알려진다면 지도자를 향한 신뢰가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대적들의 공격이 집요하고 교묘합니다.

사람은 죽음의 문제 앞에 서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내 생명을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대답합니다. 새번역 11절 “나 같은 사람더러 도망이나 다니란 말입니까? 나 같은 사람이 성소에 들어갔다가는 절대로 살아 나올 수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는 못합니다.” 사람들의 공격을 피하겠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에게 이런 유혹은 한 사람이 스마야만이 아니었습니다. 14절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곧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합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대적들과 하나되어 느헤미야를 두렵게 하였습니다. 이들 역시 뇌물에 매수가 되었다고 보여집니다.

느헤미야는 다시 기도합니다. 14절 하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하나님께서 해결하시고 하나님께서 갚아주시길 기도합니다.

느헤미야가 당한 일이니까 그렇지 이런 문제들이 우리 앞에 놓인다면 낙심하고 주저 앉을 것 같습니다. 자칫 사람과 싸우느라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느헤미야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웁니다. 문제의 뿌리를 잘 파악하고 지혜롭게 대처합니다.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로 맡깁니다.

느헤미야5:1-19절/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25.11.24)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1절)

​성벽 재건 공사가 진행되는데 4장에서는 외부적, 내부적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대적들이 조롱하며 비웃더니 이제는 직접 공격해서 공사를 멈추게 하겠다고 위협합니다. 그러자 백성들도 두려움 속에서 공사를 더 진행하기 힘들 것 같다고 낙심합니다. 위기의 순간에 느헤미야는 대적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당하자고 독려했습니다(4:14절). 이를 힘입어 백성들이 한 손에는 무기를 들고 한 손으로는 일을하며 성벽 공사를 진행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더 심각한 내부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문제는 자칫 어렵게 이끌어오던 성벽 재건 공사를 멈추게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를 분열과 갈등으로 몰아 넣을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처럼 삶은 문제의 연속입니다. 어떻게 해결해가느냐가 중요합니다.

백성들이 누군가를 원망하며 크게 부르짖습니다.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입니다. 이들의 원망 대상은 이방인들이 아닌 형제 유다 사람들입니다. 도대체 무슨 문제가 발생한 것일까요? 백성들은 울며 자신들의 형편을 이야기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인 먹고사는 문제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어려운 형편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핵심은 7절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라고 느헤미야가 지적합니다. 양식을 빌려주며 높은 이자를 받고 심지어는 자녀들을 종으로 삼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레25:35-36절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 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라고 합니다. 레25:39절도 “너와 함께 있는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동족 형제에게는 이자를 받지 않고, 종으로 부려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준이 지켜지지 않습니다. 이 문제의 뿌리에는 신앙의 문제, 즉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기득권 세력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누군가는 자녀가 많은데 먹을 것이 없어 양식을 빌어 먹어야 하는 처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흉년에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또는 세금을 바치기 위해 밭과 포도원과 집을 저당 잡힙니다. 자녀들을 종으로 파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해결할 힘이 이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니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나되어 공사를 감당해도 쉽지 않은데 큰 문제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요? 6절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분노를 참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7절 “깊이 생각”합니다. 흥분해서 백성들의 이야기만 듣고, 혹은 겉으로 드러난 문제만 보고 결정해서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멈춰서서 기도하며 생각합니다. 근본 원인을 찾고 해결책을 찾습니다. 느헤미야는 신중하고 지혜로운 지도자입니다.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7절)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부르짖게 한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습니다. 그리고 대회를 열고 그들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지적합니다. 이것은 위험부담이 있는 일입니다. 기득권 세력이 반기를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을 단호하게 처리합니다.

느헤미야는 이들의 잘못을 몇 가지로 지적합니다. 9절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지금도 이방인들이 조롱하고 있는데 이런 내부적인 문제로 백성들이 나누어지고 공사가 중단된다면 이방인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세상과 다름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9절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라고 합니다. 이것은 돈 문제가 아니고 신앙의 문제라는 겁니다.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행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이제 이자 받기를 그치고, 받은 이자를 돌려주자고 합니다. 그러자 감사하게도 12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보내고”라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제사장들을 불러 맹세를 하게 하고 옷자락을 털며 경고합니다. 이 말대로 행하지 않는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집과 산업 모두를 털어버리실 것이라고 합니다. 백성들은 이 경고의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큰 문제가 일단락되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자기 이득을 채운 귀족과 민장들과 다른 느헤미야의 삶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총독으로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 12년 동안 총독의 녹을 먹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전 총독들의 모습과는 완전 다른 것입니다. 총독들은 백성들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은 40세겔을 빼앗았다고 합니다. 빼앗았다는 표현을 통해서 보면 세금을 많이 거두어 일부는 바치고 나머지는 착복한 것입니다. 아랫사람들 역시 백성들을 압제하였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오히려 희생하며 섬깁니다. 백성들과 함께 먹고 나눕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15절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말씀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희생과 수고가 따르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함께 하는 형제와 지체들을 이익의 도구로 생각할 때 공동체는 위기를 맞습니다. 하나님 나라 정신을 버리고 세상의 가치관으로 욕심이 앞설 때도 그렇습니다. 느헤미야가 아름다운 본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체들을 섬김과 사랑으로 함께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