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15 | 매일성경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4절)
하나님은 노아의 아들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길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함이 범죄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흩어지는 과정에서 하나의 문제가 생깁니다. 1절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원어로 보면 “한 입술”과 “한 말”입니다. 하나됨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됨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됨을 통해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면 그것처럼 복된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죄로 오염된 인생들은 하나됨을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고 도전하는데 사용합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옳지 않은 일에 더 잘 뭉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2절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라고 하는데 “동방으로 옮기다가”의 의미는 “동쪽으로 동쪽으로 동쪽으로” 향했다는 뜻입니다. 동쪽은 분리를 의미합니다. 가인도 하나님을 떠나 “에덴의 동쪽”인 놋 땅에 거주했습니다(4:16절).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진 사람들이 도착한 곳이 시날평지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10:10절 보면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로 용감한 사냥꾼, 즉 폭군이요 독재자였던 니므롯이 다스리는 곳입니다.
이들이 서로 의논합니다. 3절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건축 재료로 벽돌을 견고히 만들고, 역청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건축기술을 비롯한 문명이 상당히 발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술을 가지고 이들이 계획하는 일이 4절입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성읍과 탑”을 건설합니다.
보통 우리는 바벨탑을 쌓았다고 하는데 본문은 두 번이나 “성읍과 탑”이라고 합니다(4,5). 이것을 8절은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계획한 것은 하늘에 닿는 탑을 가진 거대한 도시입니다. 이처럼 도시를 건설하려 한 것은 흩어짐을 면하기 위함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9:1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땅 곳곳에 흩어져 하나님의 창조 명령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가인이 성을 쌓고 하나님 없이 스스로 안전을 지키려 한 것처럼 도시를 건설하려 합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아무 문제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 겁니다.
또한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라고 하는데, 지금 건축술이 놀랍게 발달한 시대에도 하늘에 닿는 탑을 쌓는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렇게 계획합니다. 이들의 마음 상태를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이름을 내고”, 즉 자신들의 명성과 업적을 길이길이 남기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인생들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도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다시 선악과를 따먹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시대는 변하지만 인간이 추구하는 방향은 다르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먹고 있습니다.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7절)
5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고 합니다. 저자의 유머가 담겨있다고 생각됩니다. 사람들이 쌓는 성읍과 탑은 인간들이 보기에는 거대한 건축물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땅을 보시는데 인간들이 무언가를 꼼지락거리며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 작아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려오셔서 살펴보십니다. 무엇을 말하냐면? 인간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쌓아 올리는 바벨탑이 아무리 거대하다 해도 영광과 능력의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도전하는 일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원인이 같은 말을 사용하는 한 백성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계획하고 진행한 겁니다. 6절 하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즉 한 언어가 계속되면 이런 일들이 반복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됨을 죄악된 인간은 절대 좋은 방향으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일에 힘을 모은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7절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사람들이 3절과 4절에서 서로 의논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도전했다면 하나님께서도 의논의 방식, 즉 천상 회의를 통해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기로 결정하십니다. 인간의 계획이 하나님에 의해 무너집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대단한 힘을 사용하신 것이 아닌 언어 하나만을 혼잡하게 하셨을 뿐인데 사람들은 혼란을 겪고 모든 일은 순식간에 중단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손가락 하나만 드셔도 세상은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하나되어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언어를 혼잡하게 해서 흩으십니다. 9절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그렇습니다. 자신들의 이름(명성)을 내려하였는데, 그들이 얻은 이름은 바벨, 즉 혼란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도전하며 자신이 주인되어 살아가는 삶의 결과는 혼란입니다.
다시 한번 사람의 제일된 목적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이 됩시다. 우리의 힘든 문제들도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해결해주실 것을 신뢰하며 맡깁시다.
2026.01.14 | 매일성경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1절)
창세기에는 10개의 톨레돗(족보)가 등장합니다. 보통 중요한 사건을 앞두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장에는 창세기의 전환점이 되는 바벨탑 사건이 등장합니다. 이 사건 이후 믿음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이 등장하는데, 바벨탑 사건 이전에 10장의 톨레돗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읽기 힘든 족보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족보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했습니다.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를 읽었던 백성들은 애굽 노예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땅을 향하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과거의 역사는 비참하고 현실은 광야이며 미래는 불안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성경을 통해서 자신들의 뿌리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음을 확인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오늘 족보도 그렇습니다. 시작이 1절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그리고 32절은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그 땅의 백성들이 나뉘었더라”고 합니다. 노아에게서 온 땅의 사람들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노아는 아담으로부터 이어진 자이고, 아담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온 세상 나라와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주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야벳의 후손들이 기록됩니다. 아들은 7명이요(2절), 손자도 7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3-4절). 이처럼 10장의 족보는 완전수인 ‘7’이 반복되고, 전체 70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야벳 14명, 함 30명, 셈 26명). 이를 통해 9:1절에서 홍수 후에 선포하신 하나님의 복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그래서 본문에서 반복되는 말이 5절 하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입니다(5,20,31). 야벳의 후손들은 “바닷가 땅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보통 유럽지역에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다음은 함의 후손입니다. 9장에서는 함의 아들로 가나안만 등장했는데 4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구스’는 에티오피아, ‘미스라임’은 이집트입니다. 그런데 함의 후손 가운데 특이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8-9절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니므롯’이라는 사람입니다. 이름의 뜻이 “우리가 반역하리라”입니다. “첫 용사”이며 “용감한 사냥꾼”이라고 하는데 의미가 강한 힘으로 나라들을 침략하고 정복하는 폭군, 독재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사냥꾼이라는 의미가 그냥 동물을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행사해서 사람을 사냥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9절에는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이 두 번 반복됩니다. 하나님이 평가하시기에도 그런 존재였다는 의미로 니므롯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과신하며 하나님께 도전하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0절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라고 되어 있는데, 이곳이 바벨탑을 쌓은 장소입니다. 그렇다면 11장의 바벨탑 사건을 주도한 인물이 니므롯입니다. 탑을 쌓아 하늘에 닿게하고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그는 12절 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고 하는데, 과거 가인이 하나님을 떠나 성을 쌓고 자신의 안전을 누리려했던 것처럼 큰 성읍을 만듭니다. 하나님 없는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어갑니다. 이들이 세상을 주도합니다. 가인의 후예였던 라멕처럼 잔인하게 사람들을 폭력으로 상대합니다.
15절에는 가나안의 자녀들이 등장하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이스라엘이 진멸해야 할 가나안 족속들의 이름입니다.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25절)
마지막으로 셈의 후손입니다. 9:26-27절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이 되시고 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어가십니다. 그렇다면 셈의 후손 가운데서도 누가 하나님 사람의 길을 가는가?
25절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에벨이 ‘벨렉’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의미가 ‘분열’입니다. 벨렉의 시대에 “세상이 나뉘었다”고 하는데 바로 이때 바벨탑 사건이 일어나 언어가 나누어지고 그 결과 사람들이 곳곳으로 흩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벨렉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워가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벨렉의 족보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11:10-3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족보 끝에 드디어 ‘아브람’이 등장합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가인과 후예들이 만들어가는 화려한 세상 문화와 폭력의 시대에, 하나님은 셋의 후손인 에노스를 통해 묵묵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셨습니다(4:26절). 함의 후손 니므롯이 주도하는 폭력의 시대, 하나님께 도전하는 시대에 하나님은 셈의 후손인 벨렉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어가십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화려한 문화와 강력한 힘과 권력으로 주도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같은 길을 걷자고 유혹합니다. 하나님처럼 되자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믿음의 소수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말씀을 통해 우리의 길을 늘 확인해야 합니다.
2026.01.13 | 매일성경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22절)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입니다. 그런데 18절은 함을 소개하면서 특이하게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본문에 가나안이 계속 반복됩니다(18,22,25,26,27). 오늘 사건을 통해 앞으로 전개될 미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9절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하나님은 죄악 된 세상을 심판하시고 노아와 아들들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1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이 만들어질 것 같은 기대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대를 무너뜨리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다른 사람이 아니라 노아입니다. 20절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라고 하는데 여기 “농사를 시작하여”가 원어로 보면 “땅의 사람”(하아다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아담을 생각나게 합니다. 아담이 먹어서는 안 되는 선악과를 먹고 벌거벗은 수치를 느낀 것처럼 노아는 마시고 취하면 안 되는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벗고 누워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은 창세기 3장과 연결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노아의 모습이 말해주는 것은 홍수심판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죄가 계속해서 확산되고 결국은 사람이 사람을 저주하는 데까지 나갑니다.
노아가 이런 행동을 했다는 것이 의아합니다. 6:8-9절은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당시에 의인이요 완전한 자이며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홍수 이후 그는 성령 충만한 삶이 아닌 술에 취한 삶을 살아갑니다. 왜 그랬는지 성경이 설명하지 않지만, 홍수 이전에는 영적 긴장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방주를 만들고 심판을 기다려야 하는. 그런데 심판 이후 하나님께서 무지개 언약을 맺어주면서 영적 긴장감이 사라지고 그 틈새를 포도주로 채우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노아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긴장하며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부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를 지켜주는 방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힘들어도 하나님을 감당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다른 길로 가지 않게 합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있는 것을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보게 됩니다. 22절은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라고 하는데 여기 “보고”가 원어로 ‘라아’인데 “자세히 관찰하다”의 뜻입니다. 무의식적으로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주목하여 본 것입니다. 또한 “알리매”도 신이 나서 떠벌린 것을 의미합니다. 경건하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주목하여 보고 떠벌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은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다가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줍니다. 23절은 다시 한번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고 반복합니다. 함의 행동과 대조하고 있습니다. 창3장에서 아담과 하와를 범죄하게 하고 그들이 벌거벗은 수치를 느끼게 한 것이 뱀이요 사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아담과 하와에서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시면서 수치를 가려주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지금 함의 행동은 단순한 고자질 정도가 아니라 사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셈과 야벳은 하나님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아담 이후에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이 갈라진 것처럼 노아의 아들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람과 사탄의 사람이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26절)
술에서 깨어난 노아는 일어났던 이야기를 듣고 저주를 합니다. 25절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잘못은 함이 했는데 저주는 아들 가나안이 받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 문제의 시작이 가나안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즉 함이 보기 전에 가나안이 할아버지의 수치를 보았고 그것을 아버지 함에게 알려서 이렇게 된 것이라는 거지요. 하지만 성경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계속 창3장과 연관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창3:15절은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신 내용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기도 잘못은 뱀이 했는데 뱀과 뱀의 후손이 저주를 받습니다. 여자의 후손과 대결이 일어날 것이고 여자의 후손이 승리합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저주가 함의 아들과 후손에게 임합니다.
그렇다면 이 저주는 미래를 내다보게 합니다. 여자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통해 사탄의 후손이 가나안땅이 정복되고 그들이 노예가 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을 통해서 사탄이 완전히 패배할 것을 말하는 겁니다. 시대와 환경이 바뀌어도 죄는 계속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세상 향한 구원의 역사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승리하십니다. 그것을 미리 알려주시고 이루어가십니다.
세 아들의 미래가 달라집니다. 26-27절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리고 야벳은 창대하게 됩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은 노예가 됩니다. 야벳은 창대하게 되지만 셈의 장막에 거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과 함께 하는 셈이 가장 복된 삶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전히 이 시대에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가장 복된 삶입니다.
경건했던 노아의 술취함을 보면서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며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령충만하여 하나님의 인도를 받읍시다. 또한 누군가의 허물을 보고 알리는 것이 아니라 덮어주고 기도해주는 삶이 됩시다.
2026.01.12 | 매일성경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1절)
방주에서 나와 하나님을 예배한 노아와 가족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사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염려도 있습니다. 홍수로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그런 노아와 자녀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1-2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이 말씀은 창1:28절에서 첫 사람 아담에게 주셨던 명령입니다.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이제는 노아를 통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이 복을 받아 생육하고 번성하길 원하시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복된 나라 이루길 원하십니다.
홍수 심판 이전과 이후에 두 가지 점이 다릅니다. 하나는 땅의 짐승들이 사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것이라고 합니다. 죄로 인한 타락은 자연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했습니다. 자칫 짐승들이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데 이처럼 두려움을 주셔서 인간을 보호하십니다. 또 하나의 다른 점은 육식을 허락하십니다. 이전에는 채식을 하게 하셨습니다(1:29절). 이제는 육식을 허용하십니다. 홍수로 인해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곡식이 자라고 열매가 맺히는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육식을 통해 생존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필요에 관심을 가지시고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육식을 하면서 반드시 지켜야 할 규정이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에게 하나님은 창2장에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노아에게는 고기를 피째 먹지 말라는 명령을 주십니다. 4절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잡아서 피를 빼고 먹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피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육식을 위해 동물을 잡는다고 해서 생명을 죽이는 일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내용이 살인을 엄격하게 금하십니다. 살인이 일어나면 생명의 피를 찾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의 의미가 6절입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즉 생명은 생명으로 갚도록 하십니다. 생명은 소중합니다. 그 이유가 6절 하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지켜보셨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가인의 후예인 라멕은 자신이 상처난 것 때문에 무자비하게 소년을 죽이고 자랑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소중한 생명을 가볍게 여기고 해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죄악의 극치입니다. 그래서 금지하십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납니다. 갑질이라는 말이 만연합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소중한 존재,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듯 그들 역시 사랑하는 존재임을 기억하고 존중하며 사랑으로 대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13절)
홍수 이후 노아와 가족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이었을까요? 비 구름이 하늘에 떠오르면 혹시 다시 홍수심판이 일어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런 노아와 가족들에게 하나님은 언약을 맺어주십니다. 그래서 8-17절까지는 ‘언약’이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9,11,12,13,15,16,17). 그런데 하나님은 노아와 맺는 언약을 “내 언약”이라고 하십니다(9,15). 원래 언약은 혼자 맺는 것이 아니고 쌍방간에 맺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 언약”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고 신실하게 이루어가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맺으시고 반드시 이루시는 언약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의 대상에는 노아와 가족들만이 아니라 “모든 생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맺으시고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이루십니다. 그래서 이 언약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해결하지 못하는 죄의 문제와 이루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십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신다는 사실이 은혜요 감사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증거를 주시는데 ‘무지개’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말씀은 이 무지개를 누가 보도록 하늘에 두신 것일까요? 16절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고 하십니다. “내가 보고” 즉 하나님께서 보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무지개를 영어로 ‘Rainbow’라고 합니다. Rain과 Bow가 합쳐진 낱말인데, Bow가 활이라는 의미입니다. 무지개가 히브리어로 ‘케세트’인데, 의미는 활도 되고 무지개도 됩니다. 그리고 활의 방향이 세상을 향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가족들, 그리고 모든 생물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언약을 맺으시며 보호하십니다. 세심하게 필요를 채워주시고 미래에 대한 약속까지 해주십니다. 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도 붙잡아 주십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갈 때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2026.01.09 | 매일성경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6절)
하나님은 홍수심판을 작정하십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창조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진노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선택을 하시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11절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이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심판하십니다. 다시 혼돈과 공허와 어둠으로 돌아간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시작은 노아 당시 세상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2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한마디로 섞여서는 안되는 사람들이 섞인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많은 설명들이 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셋의 후손이요, “사람의 딸들”은 하나님을 거역한 가인의 후손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흐름대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악을 주도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행하는 일들이 ‘보고’, ‘좋아하고’, ‘삼는다’입니다(2절). 마치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보고’, ‘좋아하고’, ‘먹는다’와 같습니다. 죄악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4절도 그렇습니다. 당시 ‘네피림’이 있었다고 합니다. 네피림의 의미는 ‘타락한 자들, 떨어진 자들’입니다. 악한 자들이지요.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가 4절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로 인해서 태어난 자들이 ‘용사’였고, 이들이 행하는 일들이 “명성이 있었다”는 것은 힘과 권력 통해 자기 이름을 날리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던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마음에 드는 모든 여인을 마음대로 취하고 있고 그것을 자랑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원어는 ‘베네 엘로힘’인데요, 의미가 “하나님의 아들들”도 되고 “신의 아들들”도 됩니다. 고대 근동사회에서 ‘신의 아들’은 힘을 가진 왕이나 도시의 지배자들에게 붙여졌습니다. 어쩌면 가인과 같이 성을 쌓고 성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가인의 후예인 라멕처럼 일부다처제를 행하면서 무자비하게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누군인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섞여서는 안되는 사람들이 섞이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로 인해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부패와 포악함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모습과 목적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3절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120년 뒤에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을 행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간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풀어주신 것처럼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8절)
5-7절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6절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후회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눈에 들어오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노아입니다. 8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는 ‘그러나’의 삶을 살았습니다. 온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반대 방향으로 걷는데 노아만은 하나님을 향해 걷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은혜가 노아로 하여금 의롭게, 온전하게 살아가도록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를 붙잡는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회복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심판 계획을 노아에게 말씀하시고 방주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재료는 고페르나무이고 역청을 칠합니다. 크기가 길이는 150m, 넓이는 25m, 높이는 15m입니다. 거대한 방주입니다. 모든 동물들이 들어가서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22절을 보면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라고 합니다. 120년 동안 말씀에 순종해서 방주를 만든 것입니다.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얼마나 힘든 과정이었을까요? 얼마나 조롱과 비웃음을 견뎌야 했을까요? 흔들리며 멈추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노아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준행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약속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8절은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라고 하십니다. 구약에 ‘언약’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세우시고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언약은 어떤 언약일까요? 아담과 맺으신 창조 언약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다스리라”는 언약입니다. 비록 세상은 심판을 당하지만 하나님은 다시 노아를 통해서 이 언약이 이루어가시길 원하십니다. 인간은 다시 실패하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중단하지 않으십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하나님 나라,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드셔서 언약을 성취하십니다.
우리가 한 해를 살아가면서 붙잡아야 할 것은 환경이나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입니다. 또한 이 시대를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