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8:1-16절/모세와 다윗의 명령을 따라(25.09.24)

●“건축하고자 하던 것을 다 건축하니라”(6절)

​솔로몬이 성전과 궁궐을 20년 동안 건축하기를 마쳤다고 합니다(1절). 그리고 오늘 본문을 매일성경은 16절까지로 정했는데, 끝 절인 16절을 보면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의 기초를 쌓던 날부터 준공하기까지 모든 것을 완비하였으므로 여호와의 전 공사가 결점 없이 끝나니라”고 합니다. 사용된 단어들이 “기초부터 준공까지”, “모든 것을 완비”, “공사가 결점 없이 끝나니라”고 합니다. 저자는 성전 완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여기뿐만 아니라 5:1절과 7:11절에서도 성전 건축을 마쳤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성전 건축 이후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솔로몬은 무엇을 중심으로 성전과 제사를 정비해 나갔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전 건축 이후 2-6절까지 반복되는 단어는 ‘건축’입니다. 많은 건축 사업이 진행되었습니다. 먼저는 2절에 후람이 되돌려 준 성읍을 건축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게 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왕상 9장을 보면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마치고 큰 도움을 준 두로 왕 후람에게 갈릴리 성읍 20곳을 선물로 줍니다. 그런데 그곳이 사람이 살지 않는 척박한 곳이어서 후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불평을 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오늘 본문을 보면 다시 되돌려 준 듯합니다. 솔로몬은 그곳에 건축 사업을 통해 사람들이 거주하는 새로운 도시를 만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 국고성을 건축합니다. 국고성은 전쟁을 비롯한 비상 상황을 대비해서 양식과 무기를 저장해 놓는 성입니다. 6절에는 국고성과 병거성, 마병의 성들을 건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건축 사업의 결론이 6절 하 “솔로몬이 또 예루살렘과 레바논과 그가 다스리는 온 땅에 건축하고자 하던 것을 다 건축하니라” 솔로몬은 건축을 통해 견고하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성전 건축을 마치고 이루어졌습니다. 저자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건축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저자의 강조점처럼 부강함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많은 건축 사업은 과도한 세금을 거두어야 하고 많은 노동력이 필요합니다. 나라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 사후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을 때 이런 백성들이 불만이 드러나서 결국 나라가 둘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역대기의 저자는 거기까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성전 건축과 그로 인해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을 맞춥니다.

많은 건축 사업이 어떤 사람들의 노동력으로 이루어졌을까요? 가나안 땅에 들어가 멸하지 않은 족속들이 노예가 되어 역군으로 일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이스라엘 자손은 솔로몬이 노예로 삼아 일을 시키지 아니하였으니”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노예로 삼지 않습니다. 지휘관으로 세워 노예들을 다스리게 합니다. 그 이유는 레25:39-46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로 삼지 말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은 솔로몬이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행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여호와의 전 공사가 결점 없이 끝나니라”(16절)

​이것만이 아닙니다. 11절을 보면 솔로몬이 바로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문제입니다. 나라의 안정을 위해 정략결혼을 한 것입니다. 바로의 딸만이 아닙니다. 많은 주변 이방 나라 공주들이 솔로몬과 결혼동맹을 맺었습니다. 이들이 들어오면서 우상을 가지고 왔고, 이것이 이스라엘에 우상숭배의 원인이 되고 솔로몬이 노년에 하나님을 떠나는 이유가 됩니다. 하지만 역대기 저자의 초점은 솔로몬이 바로의 딸이 거할 궁을 다윗 왕궁이 아닌 다른 곳에 지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유는 다윗 왕궁이 있는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그곳에 하나님의 궤가 있기 때문입니다. 11절 하 “여호와의 궤가 이른 곳은 다 거룩함이니라” 그래서 이방 여인을 궤가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 거주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훼손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마지막 내용은 제사 제도를 정비하고 확립합니다. 그런데 반복해서 강조하는 기준이 13절 “모세의 명령을 따라”, 14절 “그의 아버지 다윗의 규례를 따라”,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전에 이렇게 명령하였음이라” 그렇습니다. 솔로몬이 자신의 생각대로 하지 않고 모세의 명령을 따라 그리고 다윗의 규례를 따라 행합니다.

그래서 번제를 안식일과 초하루, 세 번의 절기에 드립니다. 제사장들은 반열을 졍하여 섬기게 하였고, 특히 레위인들이 감당할 일을 구분하여 정해줍니다. 세가지인데 찬송하는 일, 제사장을 수종드는 일, 그리고 문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 결과 15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국고 일에든지 무슨 일에든지 왕이 명령한 바를 전혀 어기지 아니하였더라” 이렇게 완공된 성전에서 말씀의 기준을 따라 질서있는 예배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위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역대기 저자의 관심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 황량한 예루살렘에 작은 성전을 짓고 암담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에게, 이들에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강조합니다. 무엇보다 성전을 잘 세우는 겁니다. 또한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 기준을 따라 예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것이 중심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모든 부분이 회복되고 살아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전된 우리에게 무너진 부분은 없는지 돌아봅니다. 특히 예배를 잘 회복하고 예배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회복의 출발점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우리의 생각과 경험, 지식을 중심으로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질서있게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역대하7:1-22절/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하니(25.09.23)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1절)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한 후 언약궤를 지성소로 옮겼을 때 5:13-14절을 보면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습니다. 그 후 7가지의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기도가 마치자 1절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릅니다. 마치 모세가 성막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마쳤을 때 레9:24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와 같습니다. 본문 1-3절은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고, 하나님의 불이 내려 제물을 태우니 백성들은 거룩한 두려움으로 엎드려 경배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심이 영원하심을 찬양하며 감사합니다.

솔로몬 성전이 아무리 화려해도 하나님의 임재가 없고 하나님의 불이 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의 건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크기와 화려함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불이 있을 때 성전으로서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이 사실은 역대기를 읽는 백성들에게 중요한 요소였을 것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와 황폐한 예루살렘에 솔로몬 성전에 비교되지 않는 작은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과거 솔로몬 성전의 크기와 화려함을 듣고 알고 있던 자들에게는 실망감이 있습니다. 과연 이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의 불입니다.

이 시대 성전 된 우리가 무엇을 중심으로 신앙의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외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신앙의 기간이나 어떤 지위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불인 성령의 충만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엎드려 경배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솔로몬과 모든 백성들이 성전 봉헌식 거행합니다. 드린 제물이 5절 “소가 이만 이천 마리요 양이 십이만 마리라”고 합니다. 1장에서 일천 마리 번제를 드렸을 때도 많은 제물이라고 했는데,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제물을 드립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많은 제물입니다. 제물이 너무 많아 솔로몬이 만든 번제단에서 다 태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7절은 성전 앞 뜰을 거룩하게 하고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드렸다고 합니다. 또한 레위인들이 악기를 불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며 기쁨의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어 제사의 기간이 나오는데, 먼저 7일 동안 성전 봉헌식을 거행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9절을 보면 다시 7일을 절기를 지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7월15-22일이 초막절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초막에서 머물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면서 동시에 추수를 마치고 감사하는 절기로 가장 성대한 절기라고 했습니다. 초막절 전 7일 동안 성전 봉헌식을 거행하고 바로 이어 다시 7일 동안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완공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백성들이 기쁨으로 예배한 것입니다. 그런 후 7월 23일에 집으로 돌아가는데 10절 하 “백성이 여호와께서 다윗과 솔로몬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마음에 즐거워하였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합니다.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16절)

​11절은 성전건축과 더불어 왕궁 건축을 마쳤다고 합니다. 열왕기상은 구체적으로 이 둘을 나누어서 설명하는데 역대기는 하나로 설명하면서 핵심은 “다 형통하게 이루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드린 기도를 요약해서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14절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합니다. 스스고 낮추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만 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셔서 들으십니다. 16절 하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고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와 우리 가정, 교회, 나라와 민족을 고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먼저 악한 길에서 떠나고 우리의 얼굴을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만 향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갈망하며 부르짖어야 합니다. 반드시 응답하시고 고쳐주십니다.

본문을 묵상하다 보니 여기서 마무리가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그런데 하나님은 17-22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솔로몬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복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부분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17절 “내가 네게 명령한 모든 것을 행하여 내 율례와 법규를 지키면” 나라와 왕위가 견고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19절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율례와 명령을 버리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을 경배하면” 주신 땅에서 뿌리를 뽑아내고 비웃음 거리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성경을 읽는 백성들은 이 일을 직접 경험한 자들입니다. 솔로몬이 성전 봉헌식을 할 때는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읽는 백성들에게 이 말씀은 뼈저리게 체험한 말씀입니다. 그대로 실현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돌아온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바로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살아가며 하나님을 엎드려 경배하고 특히 하나님의 율례와 명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소망의 미래를 열어주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돌아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임재와 불이 있는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갈망하고 다른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임재,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고쳐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역대하6:26-42절/귀를 기울이소서(25.09.22)

●“이 성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29절)

​성전을 완공하자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솔로몬은 놋으로 만든 단 위에 올라가 회중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펴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감격 속에 드리는 기도입니다. 7가지의 상황을 가정하여 그런 일들을 만날 때 주의 백성이 이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 응답해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길 간구합니다. 6:22-25까지 두 가지 상황이 나왔고 오늘 본문은 나머지 5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26절 “주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닫히고 비가 내리지 않는 주의 벌을 받을 때”입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는 벌을 가져옵니다. 그래야 깨닫고 돌이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백성들이 성전이 있는 곳을 향하여 기도하면 하늘을 열고 비를 내려주시길 간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선되어야 할 것이 26절 하 “이 곳을 향하여 빌며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그들의 죄에서 떠나거든”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인정하는 겁니다. 죄의 시작은 하나님의 인정하지 않고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거기서 돌이켜 하나님의 이름을 인정하고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 기도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특히 36절부터 나오는 나라가 멸망하여 포로로 끌려갔을 때 37-38절 “그들이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들을 사로잡은 자들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행하였나이다 하며 …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라고 합니다. 이 내용은 역대기를 읽는 백성들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사실 솔로몬이 이 기도를 드릴 때는 나라가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것을 가정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솔로몬의 기도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나라는 멸망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포로에서 고국으로 돌아와 폐허 속에 솔로몬의 성전과 비교되지 않는 초라한 성전을 건축하고 이 말씀을 읽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겁니다. 절망의 현실, 소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중요한 것은 온 마음과 온 뜻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겁니다.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말씀에 대한 순종의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먼저 죄에서 떠나고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기도에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소서”(40절)

​두 번째는 28절 기근이나 전염병 그리고 적국이 에워싸는 재앙이나 질병을 만났을 때입니다. 그 가운데 30절은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의 모든 행위대로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아심이니이다”고 합니다. 이 기도 역시 무조건 문제 해결해주시고, 잘 되게 해달라고 간구하지 않고 마음(중심) 아시고 행위대로 갚아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른 마음과 그에 따른 바른 행위가 중요합니다.

세 번째는 이방인들이 32절 “그들이 주의 큰 이름과 능한 손과 펴신 팔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와서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이라고 합니다. 성전이 이스라엘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고 모든 나라 모든 백성을 위한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통치자이십니다. 이방인들도 성전 향해 기도하면 부르짖는 대로 이루시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십니다.

네 번째는 34절 전쟁을 앞두고 기도하는 내용이며, 마지막 다섯 번째는 앞에서 설명했듯 36절부터 범죄로 말미암아 나라가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가 그곳에서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비록 고국을 떠나 먼 이방 땅, 성전도 없는 곳에서 노예의 삶을 살아간다할지라도 하나님을 인정하며 성전이 있는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며 그들을 돌보시고 다시 돌아와 회복하도록 하십니다.

본문을 보면서 문제가 생겼을 때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럴려면 27절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또한 31절 하 “항상 주를 경외하며 주의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40절 “기도에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문제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때 반드시 응답하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동시에 항상 하나님만 경외하며 말씀의 길을 순종으로 걸어갑시다.

역대하3:1-17절/여호와의 전 건축 시작(25.09.17)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지 넷째 해 … 건축을 시작하였더라”(2절)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시작합니다. 1절은 그 장소가 어떤 곳인지를 설명하는데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1절 “예루살렘 모리아 산”입니다. 모리아 산은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창22:18절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고 그의 믿음을 인정해주셨던 장소입니다.

또한 이 장소는 1절 하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입니다. 역대상 21장을 보면 다윗이 해서는 안 되는 인구조사를 실시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는데 3일간 전염병으로 7만 명의 백성이 죽게 됩니다. 이때 재앙을 내리던 천사가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서고 하나님은 이제 손을 거두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기념하여 다윗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던 장소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믿음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곳입니다.

솔로몬은 2절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지 넷째 해 둘째 달 둘째 날”에 건축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역대하를 시작하면서 솔로몬이 왕이 되자마자 성전을 건축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4년째에 건축을 시작합니다. 그동안 나라의 안정이 필요했고, 또한 2장에서처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일에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3절부터는 성전의 규모와 모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의 길이는 60규빗, 넓이는 20규빗입니다. 한 규빗을 50cm로 한다면 길이는 30m, 넓이는 10m입니다. 당시 이집트나 메시포타미아 등 강대국의 신전 규모에 비하면 크지 작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막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건물의 크기에 상관없이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길 원하십니다.

먼저 낭실, 즉 현관의 규모는 같은 넓이에 높이가 120규빗으로 상당히 높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는 입구를 높여 웅장함을 나타내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어 대전, 즉 성소입니다. 여기서 강조되면서 동시에 성전 전체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재료는 금입니다. 표현도 순금, 금, 그리고 6절 하 “바르와임 금”이라고 합니다. ‘바르와임’은 금으로 유명한 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최고의 금이 성전에 사용되었습니다. 성막을 지을 때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수록 금을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금이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지성소 안에 두 그룹의 형상을 새겨 만들어”(10절)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는 지성소입니다. 지성소는 넓이와 길이가 20규빗으로 정사각형 모양입니다. 특별히 순금 600달란트로 입혔는데 이는 18톤의 양이라고 합니다. 못 하나의 무게도 금 오십 세겔이었습니다. 지성소에서 길게 강조되는 내용은 그룹에 관한 내용입니다. 핵심은 두 그룹이 편 날개가 이쪽 벽에서 저쪽 벽까지 닿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14절은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고운 베로 휘장문을 짓고 그 위에 그룹의 형상을 수놓았더라”고 합니다. 여기도 그룹이 수 놓아져 있고, 7절에도 벽에 그룹을 아로새겼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그룹’이 강조되고 있는데, 그룹은 하나님 가까이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천사입니다. 성막을 지을 때 지성소를 덮고 있는 천이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들어져있고 그룹들이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었습니다.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늘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즉 성막과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장소가 이 땅으로 내려온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백성들을 만나시고 교제하시기 위해 영광의 하나님께서 이 땅, 성전, 그것도 지성소에 거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성전은 크기에 상관없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곳입니까? 그런 성전을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등한히 한다면, 또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형식화된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 성경을 읽는 당시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깨닫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일 것입니다. 과거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의 영광과 거룩함을 잊어버리고 예배는 형식적 습관적이 되고, 성전이 자신들의 안전을 위한 도구로 전락할 때 이스라엘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성전에 세워진 두 기둥입니다. 이 기둥은 구조적으로 필요해서가 아닌 상징적인 기둥입니다. 이름이 야긴과 보아스인데, 야긴의 뜻은 “그분이 세우신다”이고 보아스는 “그분에게 능력이 있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이 있으십니다. 이스라엘의 승리와 영광이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문제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을 때 발생됩니다.

이 시대 성전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영광스런우신 하나님과의 만남에 우선순위를 두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도 고백해야 할 것은 능력의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세우시고 책임지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역대하2:1-18절/하나님은 크심이라(25.09.16)

●“솔로몬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1절)

​솔로몬은 하나님께 일천 마리의 번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묻자 “지혜와 지식”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백성들을 잘 재판하여 공의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역대기에는 다른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곧바로 성전 건축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저자는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지식으로 성전을 건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2장은 성전 건축을 위해 솔로몬이 사람들을 준비하고 특별히 백향목을 구하기 위해 두로 왕 후람에게 사절을 보내 계획을 설명하는 내용과 이에 대한 후람의 반응이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오늘 본문을 읽은 사람들이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방인들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고 하나님의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어려움 속에서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이 솔로몬 성전의 영광과 비교되지 않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에 이런 질문들이 그치지 않습니다. “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상태에 있는가?”, “언제 다시 하나님의 영광, 예루살렘의 영광, 성전의 영광이 회복될 것인가?” 이렇게 묻고 있는 백성들에게 저자는 오늘 말씀을 통해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1절 “솔로몬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위해 먼저 사람을 준비합니다. 짐꾼과 산에서 돌을 떠낼 자들과 감독할 사람들입니다. 무슨 일이든 사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건축 재료인데 백향목이 필요합니다. 인근 나라인 두로가 백향목이 많은 곳입니다. 이미 다윗왕이 왕궁을 건축하면서 두로 왕의 도움으로 백향목을 공급받아 궁궐을 건축하였습니다. 솔로몬도 두로 왕에게 사절단을 보내 백향목을 공급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성전에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인지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4절 “주 앞에서 향 재료를 사르며 항상 떡을 차려 놓으며 안식일과 초하루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절기에 아침 저녁으로 번제를 드리려 하오니 이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규례니이다” 향 재료를 사르며 영광의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진설병 떡을 차려 놓으며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곳입니다. 안식일과 초하루 그리고 절기에 아침 저녁으로 번제를 드리며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전은 영광의 하나님과 만남이 있는 곳이며 하나님의 인정하고 영광을 돌리는 곳입니다. 이 본질이 흐려지고 습관적으로 성전을 오가며, 형식적인 예배, 그리고 성전을 통해 자기 영광을 얻으려 한다면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5절 “내가 건축하고자 하는 성전은 크니 우리 하나님은 모든 신들보다 크심이라”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6절에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고 영광스러운 분이신지 설명합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요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내가 누구이기에 어찌 능히 그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요 그 앞에 분향하려 할 따름이니이다” 크고 화려한 성전을 건축하지만 솔로몬이 분명하게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지은 공간에 머무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성전으로 짓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용납하실 수 없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반복해서 강조한 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한다는 말입니다(1,4).

그렇다면 이 시대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전으로 삼으시고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제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이 영광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신다면 성전된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할지가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일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므로”(11절)

​솔로몬은 두로의 최고 기술자를 보내줄 것은 요청합니다. 그들과 이스라엘 기술자들이 함께 성전을 건축할 계획을 합니다. 또한 그에 상응하는 대가도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11절부터는 두로 왕 후람의 답장입니다. 이방 나라의 왕의 입에서 놀라운 고백이 나옵니다. 11절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을 세워 그들의 왕을 삼으셨도다”, 12절 “천지를 지으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송축을 받으실지로다 다윗 왕에게 지혜로운 아들을 주시고 명철과 총명을 주시사 능히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후람의 이방 나라 왕이지만 다윗과 함께 하신 하나님, 또한 솔로몬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합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백성,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을 통해 하나님은 이방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열방의 빛으로 이스라엘의 사명입니다.

역대기를 읽는 백성들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반대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렇습니다. 경제, 국방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삶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수 없는 모습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니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오늘 말씀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후람은 솔로몬의 요청을 들어줍니다. 이를 위해 재주있고 총명한 사람을 선택합니다. 13절 “내가 이제 재주 있고 총명한 사람을 보내오니 전에 내 아버지 후람에게 속하였던 자라”는 말씀은 좀 혼란스러운데 새번역 “이제 총명을 갖춘 기능공 한 사람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이런 일의 전문가인 후람이라는 사람입니다.”로 되어 있습니다. 즉 ‘후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전문가를 보내줍니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 단지파 어머니와 두로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야 그 가치를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거 성전이 있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음이 영광이었고 은혜였습니다. 그때 바르게 하나님을 알고, 바르게 예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해 잃어버리고 나니 현실이 절망적입니다.

우리가 예배할 수 있음이 감사한 일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리를 성전 삼으시고 함께 하심이 영광입니다.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바르게 인정하고 합당한 예배로 영광돌립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