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147:1-20절/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25.12.18)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1절)

​본 시편이 어떤 배경에서 기록되었을까요? 2-3절에 힌트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하나님께서 흩어진 자들을 모으셨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셔서 예루살렘을 다시 세우게 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고레스를 비롯한 바벨론 왕들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을 짓게 하시고,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성벽을 완공하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백성들의 상심한 마음과 상처를 고쳐주셨습니다. 본 시편의 배경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문에는 3번의 “찬양하라”는 요청이 나옵니다(1,7,12). 그리고 이어서 찬양해야 할 이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절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옳고 당연하다고 합니다. 앞에서 설명했듯 흩어진 백성 모으셔서 예루살렘 다시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뒤에 이어지는 4절은 갑자기 ‘별’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4절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하나님은 별들의 숫자를 세시고 하나하나 이름대로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5절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과 지혜를 찬양합니다. 그렇다면 시인이 갑자기 별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신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하늘의 수많은 별들 하나하나 하나님은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벨론을 비롯한 이방 나라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해와 달과 별을 우상으로 숭배하며 그것들이 나라와 개인들을 지켜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은 그들이 숭배하는 별들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만왕의 왕이심을 고백합니다. 이 하나님은 6절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한 자를 붙들어주시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교만한 악인들은 무너뜨리십니다.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10절)

​7절은 두 번째 찬양의 요청입니다.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감사함으로 찬양하라고 하는데 무엇을 감사해야 할까요? 다시 시인은 자연으로 눈길을 돌립니다. 8-9절 “그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구름에서 비를 내려 산에 풀을 자라게 하십니다. 비가 오고, 해가 뜨며, 바람이 부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것 같지만 시인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고 하십니다. 산의 풀 한 포기, 들꽃 하나도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들짐승과 까마귀 새끼도 먹여주십니다. 까마귀 새끼는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는 어쩜 하찮은 존재입니다. 그런 새끼도 하나님께서 먹여주십니다.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이런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오, 우리 하나님이시라면 우리가 무엇을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6:25-31절까지 염려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30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시인은 이어서 까마귀 새끼와 대조되는 ‘말의 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10절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말의 힘과 용사의 다리를 의지합니다. 한마디로 군사력이지요. 이것을 키우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합니다. 이것을 개인으로 적용해본다면 이 시대는 힘과 부를 가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 교만입니다. 그런 자들을 엎드러뜨리십니다(6절). 대신 하나님은 11절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라고 하십니다.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15절)

​세 번째 찬양 요청은 12절부터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찬양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문빗장을 견고하게 해주시고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며 예루살렘 경내를 평안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무너졌던 성벽이 세워져서 안정을 찾고 보호를 받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15절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에는 ‘말씀’이 반복해서 강조됩니다. 특히 “말씀이 속히 달린다”는 의미는 왕의 명령이 선포되면 말을 타고 달려 전하는 자들을 통해 명령이 실행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입에서 나가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다시 자연을 통해 설명합니다. 많은 눈과 우박이 봄이 되면 다 녹고 새싹이 돗아 납니다. 이것을 18절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늘 반복되는 자연현상을 바라보면서 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발견하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별들, 구름, 까마귀 새끼, 눈과 우박 등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하나님을 만나고 알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창조물들입니다.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능력과 손길을 바라보는 믿음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19절 “그가 그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의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말씀을, 약속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이 시대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이루어가십니다. 또한 백성들 역시 율례와 규례를 따라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사는 삶이 가장 복된 삶입니다.

오늘 하루도 일상 속에 담긴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섭리를 발견하며 감사와 찬양의 삶이 됩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되었음에 감사하며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갑시다.

시편146:1-10절/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25.12.17)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1절)

​지금까지 ‘다윗의 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어지는 146-150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는 보통 ‘할렐루야 시편’이라고 부르는 내용입니다. ‘할렐루야’는 ‘할렐루’(찬양하다, 영광스럽게 하다)와 ‘야’(여호와)가 합쳐진 히브리어로 “여호와를 찬양하라”입니다. 시인이 어떤 마음으로 ‘할렐루야’를 외치고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벅찬 감격으로, 큰 소리로 ‘할렐루야’를 외치고 있습니다.

1절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에서 시인은 우리 찬양의 대상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선포합니다. 세상에는 찬양의 대상이 참 많습니다. 사람이 찬양받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을 찬양하기도 합니다. 자연이 찬양을 받기도하고, 요즘은 인공지능을 비롯한 첨단 과학기술이 찬양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찬양해야 할 분은 오직,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해야 할까요? 2절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생전에” 찬양하겠다는 의미는 우리 인생의 끝이 있다는 겁니다. 찬양하고 싶어도 찬양할 수 없는 때가 옵니다. 그러니 삶이 주어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아름다운 일은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삶이요(사43:21절),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시인은 이런 하나님 향한 찬양이 평생에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마치 어제 본문 시145:2절의 다윗의 고백과 같습니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다윗은 “날마다 … 영원히” 하나님을 송축하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들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다보니 지금 필요한 것에 집중해서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큰 은혜를 잊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기억하고 감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이런 신앙이 부족한 현실을 믿음으로 넉넉히 이기는 힘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인이 깨달은 것은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대단한 힘과 권세를 가지고 있어도 사람은 도울 힘이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4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인간을 표현한 단어가 “끊어지면, 돌아가서, 소멸하리로다”입니다. 대단한 것 같지만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때 날아가던 새도 떨어뜨릴 것 같은 권세를 부르던 자들이 이제는 세상에 사라지고 없습니다. 점점 기억이 희미해집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헛된 힘을 가지겠다고, 영원하지 않은 부와 명예를 가져보겠다고 거기에 목숨을 걸고 살아간다면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10절)

​그래서 시인은 5절에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합니다. 능력의 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고 영원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가 복된 인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도움되시는 하나님을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성경 인물 중 가장 반전의 인생을 산 사람이 야곱입니다.

야곱의 이름의 뜻은 ‘뒤꿈치를 잡다, 속여 넘기는 자’입니다. 장자의 축복을 받기 위해 태어나면서부터 형의 발 뒤꿈치를 잡고 먼저 태어나려 했던 인물입니다. 자신을 의지하고 사람을 속여가면서 세상의 복을 누리려 하였습니다. 그런 야곱을 하나님은 연단의 과정을 통해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가십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십니다. 결정적인 사건이 얍복강에서의 천사와의 씨름입니다. 하나님과 씨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십니다. 자기 힘으로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씨름에서 져주십니다.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십니다. 의미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입니다. 야곱이 앞으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그의 정체성이 이제는 속이는 자, 인간의 술수로 살아가는 자가 아닌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게 하신 겁니다. 이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시고 신실하심으로 지키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주관하십니다. 7-9절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의 특징이 묘사됩니다. 7절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하나님의 시선은 부한 자, 높은 자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억눌린 자들, 주린 자들, 갇힌 자들에게 있습니다. 당시 가장 약자들인 나그네와 고와, 과부에게 눈길을 향하시고 붙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 속에 8절 끝은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9절 하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라고 하며 의인과 악인을 대조합니다. 그렇다면 의인은 하나님께서 만드시길 원하는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 하나님의 눈길이 머무는 곳에 눈길을 향하고 마음을 두고 주린 자들을 채우며 억눌리고 갇힌 자들을 자유롭게 하는 자들입니다. 약자들을 붙들어주고 일으켜 세워주는 자들입니다. 그런 의인들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반면 악인들은 자신이 주인되어 살아가며 누군가를 억압하고 빼앗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결론은 멸망이 될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선포하며 마칩니다. 10절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영원히 다스리시고 대대로 통치하십니다. 사람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이것이 진실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삶이 가장 복된 삶입니다. 하나님을 평생 찬양하며 사는 삶이 행복한 삶입니다.

시편145:1-21절/영원히 송축할지로다(25.12.16)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1절)

​다윗은 1절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고백합니다. 지금 다윗이 왕의 자리에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분명히 알 수 없지만, 만약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한다면, 다윗은 자신이 왕이지만 진정한 왕, 통치자는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람은 작은 힘만 있어도 자신이 왕이 되어 마음대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사울 왕의 예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셨음에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은 제거하려 합니다. 결국 실패합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왕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말씀에 순종합니다. 우리도 내가 주인되어 내 마음대로 살아가려는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1절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1-2절에 “송축하다”가 세 번 반복되며, 마지막 21절의 끝은 “영원히 송축할지로다”입니다. 그렇다면 본 시편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을 향한 송축입니다. 그것도 ‘영원히’ 송축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송축의 시작은 2절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입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을 묵상하며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날마다 송축해야 할까요? 3-7절에 반복되는 단어는 “위대하심”입니다(3,6). 시인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측량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크게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어디에 나타나는가? 바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4절부터는 ‘일’을 강조하는데 수식하는 말이 4절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 “주의 능한 일”, 5절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 6절 “주의 두려운 일”이라고 합니다. 이런 표현들 속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시인의 놀라움이 담겨 있습니다.

가장 놀랍고 기이한 일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셔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사건입니다. 10가지 재앙을 내려 바로의 강퍅한 마음을 깨뜨리시고, 홍해를 갈라 바다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시며, 반석에서 물이 나며,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여주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시며 인도하셨습니다. 크고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이 이스라엘에 그치지 않고 다윗 자신에게 행하신 일들 역시 크고 놀랍습니다. 한낱 어린 목동에 불과했던 자신을 선택하시고 기름부으시며 고난으로 연단하셔서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게 하신 은혜, 과정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송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5절 “주의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읊조리다”는 작은 소리로 중얼중얼하는 겁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의 묵상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시인이 묵상하며 읊조린 것은 허탄한 생각이나 문제가 아닌,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이었습니다. 또한 나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14절)

​더 놀라운 것은 이처럼 위대하신 영광의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반역하고 도전했음에도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로,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습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가장 낮고 천한 인생들을 늘 주목하시고 선대해주신 것입니다. 7절과 17절처럼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연약한 인생에게 그것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의롭게 하십니다. 그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확증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혀 주셨습니다.

이런 은혜와 긍휼을 통해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십니다. 13절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11절처럼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선포하며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알리고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 나라 통치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14절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 넘어진 자들을 붙드시고 비굴한 자들, 즉 억눌린 자들을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세상 나라는 서있는 자들도 넘어뜨리고 쓰러진 자들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짓밟는 치열한 경쟁의 나라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모두가 피해자가 되어 신음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붙들고 세워주는 나라입니다. 뿐만 아니라 15절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16절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어떤 삶을 살고, 어떤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붙들어주고 세워주며 서로의 부족을 채워주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가까이하시는 사람은 18절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을 깨닫고 간구하며 부르짖는 자들을 가까이 하시며 응답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21절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원히 송축할지로다”로 마무리됩니다.

우리는 매일 무엇을 묵상하며 읊조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선포합시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날마다 송축합시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부르짖는 자들에게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도 가까이하며 친밀한 교제를 나눕시다.

시편144:1-15절/나를 건지시는 하나님(25.12.15)

시편144:1-15절/나를 건지시는 하나님(25.12.15)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1절)

​본 시편 역시 ‘다윗의 시’입니다. 그런데 분위기는 이전 시들과 다릅니다. 지금까지 시인은 악인들로 인한 고난 가운데서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현실들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부르짖음 속에서 믿음으로 인내하며 인생의 어둔 터널을 지났습니다. 결국 지금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통치하고 있습니다. 고난은 힘든 시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유익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이론이 아닌 체험으로 분명하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시인이 아름다운 신앙 인격으로 빚어졌습니다.

먼저 1절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반석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의 흔들림 없는 인생의 기초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 인생을 흔들려는 것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그렇고 환경이 그렇습니다. 지금도 왕이 되었지만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문제, 대적들이 있습니다. 시인을 흔들고 나라를 흔들려 합니다. 하지만 시인은 반석이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께서 1절 “그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는도다”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대적과 싸우게 하시고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2절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 …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사랑, 요새, 산성,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때마다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셨습니다. 특히 왕에게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주시고 백성들이 복종하게 하십니다. 시인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이 3절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입니다. 왕으로서 자랑과 교만이 아닌 하나님 앞에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합니다. 이 모습의 다윗의 위대함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인간은 힘을 좀 가지면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착각합니다. 조금이라도 유지하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러다 무너집니다. 그런데 다윗은 인생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인생은 헛것이요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알아주시고 생각해주십니다. 시139:1-2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한 순간도 놓지 않고 붙잡아 주십니다.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15절)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한 시인은 이제는 반대로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하며 구원에 대한 소망을 위해 기도합니다. 5절에는 ‘연기’, 6절에는 ‘번개’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상징합니다. 이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무찔러 주시길 소망합니다. 그러면서 원수들의 특징을 이야기하는데 8절 “그들의 입은 거짓을 말하며 그의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새번역 “그들의 입은 헛된 것을 말하며, 그들이 맹세하는 오른손은 거짓으로 속이는 손입니다.”로 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이 11절에도 반복됩니다. 원수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거짓’입니다. 거짓의 큰물로 시인을 집어 삼키려하고 무너뜨리려 합니다.

시인은 이런 대적들이 있지만 능력의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9절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이런 찬양은 시인의 마음 속에 하나님으로 인한 구원의 확신이 넘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입니다. 시인은 기도하며 대적이나 문제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 시인을 사랑하셔서 반드시 문제를 해결해주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12-15절은 하나님께서 만들어가실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며 고백합니다. 어린 아들들과 딸들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자라서 장성한 나무처럼 기둥이 되고,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이 돌이 될 것을 소망합니다. 이것은 전쟁이 없는 평화를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곳간에는 양식이 풍성하며 양과 소가 넘쳐납니다. 나라 곳곳에는 울음소리가 그치고 기쁨의 노래가 울려퍼질 것입니다.

문제 속에서 우리 마음은 전쟁터가 되고 감옥이 되기도 합니다. 문제만 바라볼 때 그렇습니다. 시인은 문제가 아닌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해결하실 뿐 아니라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어 주실 하나님을 소망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떤지 돌아보게 됩니다.

시인은 결론으로 이렇게 선포합니다. 15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그렇습니다. 가장 복된 인생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삶입니다.

시편140:1-13절/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25.12.11)

●“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4절)

​시인 다윗이 악인들의 공격을 받습니다. 1절에서는 악인을 ‘포악한 자’라고도 부릅니다. 이들은 시139:19절의 말씀처럼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이며 하나님을 무시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자들입니다. 자신들의 힘을 가지고 약한 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들입니다.

악인들은 2절 “그들이 마음속으로 악을 꾀하고 싸우기 위하여 매일 모이오며” 마음 속으로 늘 악을 꾀합니다.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매일 모입니다. 악한 일을 위해 얼마나 열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악인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입술, 말입니다. 3절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비수와 같은 말, 독이 있는 말을 던집니다. 살리는 말이 아닌 죽이는 말을 합니다. 듣는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3절 끝에 괄호 안에 ‘셀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성경에 총 74회가 나오는데, 시편에 71회, 하박국에 3회가 나옵니다. 의미가 ‘정적, 쉼“, 혹은 ”음악에서 소리를 높여 부르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잠시 멈추어서 깊이 생각하며 말씀의 의미를 증폭시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악인들의 악행은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고 4절 하 “그들은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 5절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올무와 줄을 놓으며 길 곁에 그물을 치며 함정을 두었나이다” 심지어는 올무와 함정을 놓아서 걸려 넘어지고 빠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선을 이루기 위함이 아닌 늘 누군가를 공격하고 걸려 넘어지게 하고 함정에 빠지게 하는 일에만 몰두한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불쌍한 인생들입니다.

이런 악인들 앞에서 시인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악인들의 내 주변을 둘러싸고 공격한다면 나도 같이 공격하고, 더 독한 말을 품어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시인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악인을 상대하지 않고 대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게 맡깁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함입니다.

사울은 계속해서 다윗에게 창을 던집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이려 합니다. 이때 다윗도 같이 창을 던질 수 있습니다. 다윗의 인기가 높았습니다. 사람들을 모아서 왕을 대적할 수도 있습니다. 반역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고 도망자의 삶을 삽니다. 악인들의 공격과 비난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것을 믿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하나님께서 다윗을 아름답게 만드시는 과정이 됩니다.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13절)

​6-8절까지의 기도 내용에 반복되는 단어는 “나”입니다. 특히 6절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7절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라고 고백합니다. ‘나의 하나님’께서 내가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하나님은 ‘나의 구원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139편에서 고백한 것처럼 모든 것 아시고,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며, 반드시 악인들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7절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려 주셨나이다” 가장 치명적인 부분인 머리를 하나님께서 가려주셨습니다. 보호해주신 것입니다. 한 순간에 고난과 악인을 제거해주시지 않지만,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이제 시인은 악인들을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8절 “여호와여 악인의 소원을 허락하지 마시며 그의 악한 꾀를 이루지 못하게 하소서 그들이 스스로 높일까 하나이다” 그리고 9절 하 “그들의 입술의 재난이 그들을 덮게 하소서”, 11절 “악담하는 자는 세상에서 굳게 서지 못하며 포악한 자는 재앙이 따라서 패망하게 하리이다” 3절에서 시인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이 악인들이 내뱉는 입술의 독이었습니다. 악담이었습니다. 시인은 그것이 그들을 덮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자기가 퍼부은 악담과 독이 결국 악인들에게로 돌아옵니다. 우리가 입술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시인을 해하려고 올무를 놓고 함정을 팠는데, 10절은 그것들 역시 악인들에게 그대로 떨어질 것입니다. 악인들이 깊은 웅덩이에 빠져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갚아주십니다.

이 과정을 통해 시인이 만난 하나님은 12절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하시고 정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 앞에서 시인은 어떤 삶을 결단할까요? 13절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즉 정의의 하나님 앞에서 정의로운 삶, 진실하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삶을 결단합니다. 악인들을 세상의 방식으로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해결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이십니다. 악인들로 인해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맡깁시다. 신뢰하며 인내합시다. 정의를 베푸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도 정의롭고 정직한 하나님 자녀의 삶을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