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24-26절)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십니다. 세상의 왕들처럼 크고 멋진 군마를 타신 것이 아니라, 가장 초라한 어린 나귀 새끼를 타시고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들어오십니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열광했고, 이 엄청난 환호 앞에 종교 지도자들은 19절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라며 탄식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들의 탄식처럼,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인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이들의 방문을 기점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 곧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선포하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헬라인들은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왔다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이야기와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보면서 간절한 만남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헬라인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이 독특합니다. 23절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하십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때가 되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고난의 시간, 그리고 부활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헬라인들(이방인)이 자신을 찾아오는 것을 보시며,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온 세상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께서 십자가를 지실 그 ‘결정적인 시간’이 도달했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진리이자 역설을 ‘밀알의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십니다.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세상의 원리는 어떻게든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자기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높아지고, 움켜쥐고, 자기를 확장하는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정반대입니다. 스스로 땅에 떨어져 자아를 부인하고 완전히 썩어지는 ‘죽음’을 통해서만 비로소 수많은 생명을 살려냅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 원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25-26절을 보면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런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신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자기를 높이려 하고, 자기 영광과 유익을 위해 남을 무시하고 짓밟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화려한 영광의 길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걸어가신 그 길, 곧 자기를 한없이 낮추고 희생하여 다른 사람을 살려내는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걷는 사람입니다. 비록 세상은 그런 우리를 알아주지 않고 미련하다 조롱할지라도, 하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걷는 제자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영원한 영광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28절)
십자가의 길을 담대하게 선언하신 예수님이시지만, 27절에는 인간적인 고뇌와 슬픔을 표현하십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동시에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오신 인간이셨습니다. 예수님을 힘들게 한 것은 며칠 뒤면 겪게 될 채찍과 못 박힘의 끔찍한 고통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하는, 그래서 아버지와 완전히 단절되어야만 하는 두려움이 예수님을 짓눌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통에 집중하지 않으시고 사명과 목적에 집중하십니다.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27-28절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27-28절). 예수님은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오직 아버지께 영광돌리길 원하십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28절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이것은 지금까지 예수님의 성육신과 공생애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으며, 이제 앞으로 남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최고의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는 확증의 소리였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십자가가 비참한 실패요 저주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안에서는 그것이 곧 승리요 영광이라는 선언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다가올 십자가 사건이 가져올 승리를 선포하십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심판 당하시는 것이 아닌 세상의 임금이 심판당하고 쫓겨나는 일입니다. 32절 “땅에서 들리면”이라는 표현은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죄수로서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 처형당하시는 수치스러운 죽음을 뜻하지만, 영적으로는 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세상 임금(사탄)의 권세를 완전히 깨뜨리고 부활 승천하셔서 만왕의 왕으로 높임 받으시는 영광을 뜻합니다.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 높이 매달린 놋뱀을 쳐다볼 때 살아났던 것처럼, 이제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는 자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고 주님께로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친히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셨습니다. 썩어지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내가 먼저 죽어지고 희생하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시다. 자기를 낮추고 생명을 나누는 그 좁은 길 끝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귀히 여겨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밀알처럼 썩어짐으로 내 주변에 아름다운 생명의 향기를 피워내는 복된 삶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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