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38절)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의 무덤을 향해 가셔서 위대한 생명의 기적을 베푸시는 장면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기적을 넘어, 다가올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미리 보여주는 중요한 표적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가시며 38절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셨습니다. 여기 ‘비통히 여기다’라는 단어는 33절에도 나왔지만 단순히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정도의 감정이 아닙니다. 원어(엠브리마오마이) 의미는 마치 말이 코에서 콧김을 내뿜으며 분노로 치를 떠는 모습을 표현할 때 쓰는 강력한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은 도대체 무엇을 향해 이토록 분노하셨을까요? 이를 이해하려면 요한복음이 “새 창조”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1:1절이 창세기처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하는 것은, 창세기에서 망가진 문제를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해결하실 것임을 보여줍니다. 원래 하나님은 인간을 질병이나 늙음, 죽음이 없는 영원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 인해 인간은 죽음과 질병의 굴레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절망해왔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아름다운 피조물을 짓누르고 파괴하는 이 “죽음의 세력”을 향해 맹렬하고 거룩한 분노를 터뜨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돌로 막힌 굴 무덤 앞에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자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다급히 만류합니다. 39절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사실 마르다는 바로 앞선 대화에서 예수님을 27절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훌륭하게 고백했던 여인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고백은 훗날 마지막 부활의 때에나 이루어질 막연한 진리였을 뿐,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부패해가는 오라비의 시신을 주님이 살려내실 것이라는 “현재적인 믿음”은 없었습니다.
마르다의 모습은 곧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믿음’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듣고 많이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입술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내 경험과 이성, 내 한계에 주님의 능력을 가둬두고 신앙생활을 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은 그런 마르다에게 40절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라며 참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기적이 먼저가 아니라, 내 한계를 뛰어넘어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신뢰하는 ‘온전한 믿음’이 선행될 때 비로소 죽은 자가 살아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 “나사로야 나오라”(43절)
돌을 옮겨 놓자,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41절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이 굳이 무리들 앞에서 소리 내어 기도하신 이유는, 자신이 행하는 이 생명의 기적이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임을 주변 사람들이 믿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온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십니다. 창조주의 생명 말씀이 선포되자, 죽었던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 얼굴은 수건에 싸여서 무덤 밖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에 앞으로 이어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나사로를 살리셨는데, 머지않아 유대인들은 큰 소리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칠 것입니다. 또한 나사로의 얼굴이 ‘수건’에 싸여 있었다 하는데,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는 요20:7절은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나사로가 수건을 감고 살아난 이 사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훗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실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서 걸어 나오는 이 엄청난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의 반응은 놀랍게도 둘로 나뉘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으나, 어떤 자들은 바리새인들에게 달려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고발했습니다. 그들은 진리 앞에서도 예수님을 제거하고 죽이기로 결의하는 완악함을 보입니다.
이 엇갈린 반응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내 삶에 더 큰 기적과 응답을 주시면 내가 더 잘 믿을 텐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눈앞에서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보고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 했던 유대인들처럼, 우리의 신앙을 자라게 하는 것은 “더 많은 기적과 체험”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는 일곱 개의 기적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기적이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기적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기적의 종합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의 새로운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온전한 믿음’임을 강력히 선포합니다.
오늘 우리는 마르다처럼 내 생각과 경험의 한계에 갇혀 주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괴롭히는 죽음과 절망의 문제를 향해 맹렬히 분노하시며 굽어살피시는 생명의 참된 주관자이십니다. 더 많은 기적을 구하기보다, 이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밝히 보여주신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합시다. 내 삶의 절망적인 무덤 앞에서도 “나오라” 부르시는 생명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복된 하루가 됩시다.
0개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