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146:1-10절/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25.12.17)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1절)

​지금까지 ‘다윗의 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어지는 146-150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는 보통 ‘할렐루야 시편’이라고 부르는 내용입니다. ‘할렐루야’는 ‘할렐루’(찬양하다, 영광스럽게 하다)와 ‘야’(여호와)가 합쳐진 히브리어로 “여호와를 찬양하라”입니다. 시인이 어떤 마음으로 ‘할렐루야’를 외치고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벅찬 감격으로, 큰 소리로 ‘할렐루야’를 외치고 있습니다.

1절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에서 시인은 우리 찬양의 대상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선포합니다. 세상에는 찬양의 대상이 참 많습니다. 사람이 찬양받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을 찬양하기도 합니다. 자연이 찬양을 받기도하고, 요즘은 인공지능을 비롯한 첨단 과학기술이 찬양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찬양해야 할 분은 오직,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해야 할까요? 2절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생전에” 찬양하겠다는 의미는 우리 인생의 끝이 있다는 겁니다. 찬양하고 싶어도 찬양할 수 없는 때가 옵니다. 그러니 삶이 주어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아름다운 일은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삶이요(사43:21절),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시인은 이런 하나님 향한 찬양이 평생에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마치 어제 본문 시145:2절의 다윗의 고백과 같습니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다윗은 “날마다 … 영원히” 하나님을 송축하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들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다보니 지금 필요한 것에 집중해서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큰 은혜를 잊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기억하고 감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이런 신앙이 부족한 현실을 믿음으로 넉넉히 이기는 힘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인이 깨달은 것은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대단한 힘과 권세를 가지고 있어도 사람은 도울 힘이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4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인간을 표현한 단어가 “끊어지면, 돌아가서, 소멸하리로다”입니다. 대단한 것 같지만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때 날아가던 새도 떨어뜨릴 것 같은 권세를 부르던 자들이 이제는 세상에 사라지고 없습니다. 점점 기억이 희미해집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헛된 힘을 가지겠다고, 영원하지 않은 부와 명예를 가져보겠다고 거기에 목숨을 걸고 살아간다면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10절)

​그래서 시인은 5절에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합니다. 능력의 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고 영원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가 복된 인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도움되시는 하나님을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성경 인물 중 가장 반전의 인생을 산 사람이 야곱입니다.

야곱의 이름의 뜻은 ‘뒤꿈치를 잡다, 속여 넘기는 자’입니다. 장자의 축복을 받기 위해 태어나면서부터 형의 발 뒤꿈치를 잡고 먼저 태어나려 했던 인물입니다. 자신을 의지하고 사람을 속여가면서 세상의 복을 누리려 하였습니다. 그런 야곱을 하나님은 연단의 과정을 통해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가십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십니다. 결정적인 사건이 얍복강에서의 천사와의 씨름입니다. 하나님과 씨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십니다. 자기 힘으로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씨름에서 져주십니다.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십니다. 의미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입니다. 야곱이 앞으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그의 정체성이 이제는 속이는 자, 인간의 술수로 살아가는 자가 아닌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게 하신 겁니다. 이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시고 신실하심으로 지키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주관하십니다. 7-9절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의 특징이 묘사됩니다. 7절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하나님의 시선은 부한 자, 높은 자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억눌린 자들, 주린 자들, 갇힌 자들에게 있습니다. 당시 가장 약자들인 나그네와 고와, 과부에게 눈길을 향하시고 붙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 속에 8절 끝은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9절 하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라고 하며 의인과 악인을 대조합니다. 그렇다면 의인은 하나님께서 만드시길 원하는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 하나님의 눈길이 머무는 곳에 눈길을 향하고 마음을 두고 주린 자들을 채우며 억눌리고 갇힌 자들을 자유롭게 하는 자들입니다. 약자들을 붙들어주고 일으켜 세워주는 자들입니다. 그런 의인들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반면 악인들은 자신이 주인되어 살아가며 누군가를 억압하고 빼앗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결론은 멸망이 될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선포하며 마칩니다. 10절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영원히 다스리시고 대대로 통치하십니다. 사람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이것이 진실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삶이 가장 복된 삶입니다. 하나님을 평생 찬양하며 사는 삶이 행복한 삶입니다.

시편145:1-21절/영원히 송축할지로다(25.12.16)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1절)

​다윗은 1절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고백합니다. 지금 다윗이 왕의 자리에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분명히 알 수 없지만, 만약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한다면, 다윗은 자신이 왕이지만 진정한 왕, 통치자는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람은 작은 힘만 있어도 자신이 왕이 되어 마음대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사울 왕의 예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셨음에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은 제거하려 합니다. 결국 실패합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왕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말씀에 순종합니다. 우리도 내가 주인되어 내 마음대로 살아가려는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1절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1-2절에 “송축하다”가 세 번 반복되며, 마지막 21절의 끝은 “영원히 송축할지로다”입니다. 그렇다면 본 시편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을 향한 송축입니다. 그것도 ‘영원히’ 송축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송축의 시작은 2절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입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을 묵상하며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날마다 송축해야 할까요? 3-7절에 반복되는 단어는 “위대하심”입니다(3,6). 시인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측량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크게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어디에 나타나는가? 바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4절부터는 ‘일’을 강조하는데 수식하는 말이 4절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 “주의 능한 일”, 5절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 6절 “주의 두려운 일”이라고 합니다. 이런 표현들 속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시인의 놀라움이 담겨 있습니다.

가장 놀랍고 기이한 일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셔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사건입니다. 10가지 재앙을 내려 바로의 강퍅한 마음을 깨뜨리시고, 홍해를 갈라 바다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시며, 반석에서 물이 나며,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여주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시며 인도하셨습니다. 크고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이 이스라엘에 그치지 않고 다윗 자신에게 행하신 일들 역시 크고 놀랍습니다. 한낱 어린 목동에 불과했던 자신을 선택하시고 기름부으시며 고난으로 연단하셔서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게 하신 은혜, 과정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송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5절 “주의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읊조리다”는 작은 소리로 중얼중얼하는 겁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의 묵상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시인이 묵상하며 읊조린 것은 허탄한 생각이나 문제가 아닌,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이었습니다. 또한 나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14절)

​더 놀라운 것은 이처럼 위대하신 영광의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반역하고 도전했음에도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로,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습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가장 낮고 천한 인생들을 늘 주목하시고 선대해주신 것입니다. 7절과 17절처럼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연약한 인생에게 그것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의롭게 하십니다. 그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확증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혀 주셨습니다.

이런 은혜와 긍휼을 통해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십니다. 13절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11절처럼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선포하며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알리고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 나라 통치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14절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 넘어진 자들을 붙드시고 비굴한 자들, 즉 억눌린 자들을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세상 나라는 서있는 자들도 넘어뜨리고 쓰러진 자들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짓밟는 치열한 경쟁의 나라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모두가 피해자가 되어 신음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붙들고 세워주는 나라입니다. 뿐만 아니라 15절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16절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어떤 삶을 살고, 어떤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붙들어주고 세워주며 서로의 부족을 채워주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가까이하시는 사람은 18절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을 깨닫고 간구하며 부르짖는 자들을 가까이 하시며 응답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21절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원히 송축할지로다”로 마무리됩니다.

우리는 매일 무엇을 묵상하며 읊조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선포합시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날마다 송축합시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부르짖는 자들에게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도 가까이하며 친밀한 교제를 나눕시다.

시편144:1-15절/나를 건지시는 하나님(25.12.15)

시편144:1-15절/나를 건지시는 하나님(25.12.15)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1절)

​본 시편 역시 ‘다윗의 시’입니다. 그런데 분위기는 이전 시들과 다릅니다. 지금까지 시인은 악인들로 인한 고난 가운데서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현실들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부르짖음 속에서 믿음으로 인내하며 인생의 어둔 터널을 지났습니다. 결국 지금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통치하고 있습니다. 고난은 힘든 시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유익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이론이 아닌 체험으로 분명하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시인이 아름다운 신앙 인격으로 빚어졌습니다.

먼저 1절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반석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의 흔들림 없는 인생의 기초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 인생을 흔들려는 것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그렇고 환경이 그렇습니다. 지금도 왕이 되었지만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문제, 대적들이 있습니다. 시인을 흔들고 나라를 흔들려 합니다. 하지만 시인은 반석이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께서 1절 “그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는도다”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대적과 싸우게 하시고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2절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 …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사랑, 요새, 산성,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때마다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셨습니다. 특히 왕에게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주시고 백성들이 복종하게 하십니다. 시인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이 3절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입니다. 왕으로서 자랑과 교만이 아닌 하나님 앞에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합니다. 이 모습의 다윗의 위대함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인간은 힘을 좀 가지면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착각합니다. 조금이라도 유지하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러다 무너집니다. 그런데 다윗은 인생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인생은 헛것이요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알아주시고 생각해주십니다. 시139:1-2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한 순간도 놓지 않고 붙잡아 주십니다.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15절)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한 시인은 이제는 반대로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하며 구원에 대한 소망을 위해 기도합니다. 5절에는 ‘연기’, 6절에는 ‘번개’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상징합니다. 이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무찔러 주시길 소망합니다. 그러면서 원수들의 특징을 이야기하는데 8절 “그들의 입은 거짓을 말하며 그의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새번역 “그들의 입은 헛된 것을 말하며, 그들이 맹세하는 오른손은 거짓으로 속이는 손입니다.”로 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이 11절에도 반복됩니다. 원수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거짓’입니다. 거짓의 큰물로 시인을 집어 삼키려하고 무너뜨리려 합니다.

시인은 이런 대적들이 있지만 능력의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9절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이런 찬양은 시인의 마음 속에 하나님으로 인한 구원의 확신이 넘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입니다. 시인은 기도하며 대적이나 문제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 시인을 사랑하셔서 반드시 문제를 해결해주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12-15절은 하나님께서 만들어가실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며 고백합니다. 어린 아들들과 딸들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자라서 장성한 나무처럼 기둥이 되고,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이 돌이 될 것을 소망합니다. 이것은 전쟁이 없는 평화를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곳간에는 양식이 풍성하며 양과 소가 넘쳐납니다. 나라 곳곳에는 울음소리가 그치고 기쁨의 노래가 울려퍼질 것입니다.

문제 속에서 우리 마음은 전쟁터가 되고 감옥이 되기도 합니다. 문제만 바라볼 때 그렇습니다. 시인은 문제가 아닌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해결하실 뿐 아니라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어 주실 하나님을 소망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떤지 돌아보게 됩니다.

시인은 결론으로 이렇게 선포합니다. 15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그렇습니다. 가장 복된 인생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삶입니다.

시편140:1-13절/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25.12.11)

●“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4절)

​시인 다윗이 악인들의 공격을 받습니다. 1절에서는 악인을 ‘포악한 자’라고도 부릅니다. 이들은 시139:19절의 말씀처럼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이며 하나님을 무시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자들입니다. 자신들의 힘을 가지고 약한 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들입니다.

악인들은 2절 “그들이 마음속으로 악을 꾀하고 싸우기 위하여 매일 모이오며” 마음 속으로 늘 악을 꾀합니다.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매일 모입니다. 악한 일을 위해 얼마나 열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악인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입술, 말입니다. 3절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비수와 같은 말, 독이 있는 말을 던집니다. 살리는 말이 아닌 죽이는 말을 합니다. 듣는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3절 끝에 괄호 안에 ‘셀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성경에 총 74회가 나오는데, 시편에 71회, 하박국에 3회가 나옵니다. 의미가 ‘정적, 쉼“, 혹은 ”음악에서 소리를 높여 부르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잠시 멈추어서 깊이 생각하며 말씀의 의미를 증폭시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악인들의 악행은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고 4절 하 “그들은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 5절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올무와 줄을 놓으며 길 곁에 그물을 치며 함정을 두었나이다” 심지어는 올무와 함정을 놓아서 걸려 넘어지고 빠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선을 이루기 위함이 아닌 늘 누군가를 공격하고 걸려 넘어지게 하고 함정에 빠지게 하는 일에만 몰두한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불쌍한 인생들입니다.

이런 악인들 앞에서 시인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악인들의 내 주변을 둘러싸고 공격한다면 나도 같이 공격하고, 더 독한 말을 품어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시인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악인을 상대하지 않고 대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게 맡깁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함입니다.

사울은 계속해서 다윗에게 창을 던집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이려 합니다. 이때 다윗도 같이 창을 던질 수 있습니다. 다윗의 인기가 높았습니다. 사람들을 모아서 왕을 대적할 수도 있습니다. 반역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고 도망자의 삶을 삽니다. 악인들의 공격과 비난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것을 믿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하나님께서 다윗을 아름답게 만드시는 과정이 됩니다.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13절)

​6-8절까지의 기도 내용에 반복되는 단어는 “나”입니다. 특히 6절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7절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라고 고백합니다. ‘나의 하나님’께서 내가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하나님은 ‘나의 구원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139편에서 고백한 것처럼 모든 것 아시고,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며, 반드시 악인들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7절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려 주셨나이다” 가장 치명적인 부분인 머리를 하나님께서 가려주셨습니다. 보호해주신 것입니다. 한 순간에 고난과 악인을 제거해주시지 않지만,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이제 시인은 악인들을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8절 “여호와여 악인의 소원을 허락하지 마시며 그의 악한 꾀를 이루지 못하게 하소서 그들이 스스로 높일까 하나이다” 그리고 9절 하 “그들의 입술의 재난이 그들을 덮게 하소서”, 11절 “악담하는 자는 세상에서 굳게 서지 못하며 포악한 자는 재앙이 따라서 패망하게 하리이다” 3절에서 시인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이 악인들이 내뱉는 입술의 독이었습니다. 악담이었습니다. 시인은 그것이 그들을 덮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자기가 퍼부은 악담과 독이 결국 악인들에게로 돌아옵니다. 우리가 입술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시인을 해하려고 올무를 놓고 함정을 팠는데, 10절은 그것들 역시 악인들에게 그대로 떨어질 것입니다. 악인들이 깊은 웅덩이에 빠져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갚아주십니다.

이 과정을 통해 시인이 만난 하나님은 12절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하시고 정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 앞에서 시인은 어떤 삶을 결단할까요? 13절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즉 정의의 하나님 앞에서 정의로운 삶, 진실하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삶을 결단합니다. 악인들을 세상의 방식으로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해결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이십니다. 악인들로 인해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맡깁시다. 신뢰하며 인내합시다. 정의를 베푸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도 정의롭고 정직한 하나님 자녀의 삶을 살아갑시다.

시편139:13-24절/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25.12.10)

시편139:13-24절/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25.12.10)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13절)

​1-12절에서 모든 것을 아시고 언제 어디서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한 시인은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셨음을 선포합니다. 왜 갑자기 시인은 자신의 창조를 묵상하며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일까요? 19절을 보면 악인들이 시인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대적들로 인한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면 두렵고 위축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잊고 문제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이때 찾아오는 것이 낙심과 절망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기도하면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발견합니다. 사람들이 평가하는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서 어떻게 만드셨는지를 묵상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은 시인으로 하여금 가장 중요한 문제인 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발견하게 하였습니다. 어떤 문제가 해결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발견하는 겁니다.

13절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인체의 장기는 약80여 개라고 합니다. 크고 작은 장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만드셨습니다. 여기 “만드셨나이다”의 의미는 베틀로 옷감을 짜듯 섬세한 과정으로 만드신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는 우연한 존재가 아닙니다. 어쩌다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서 이 땅에 존재합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인 나를 그렇게 만드셨다는 사실이 감동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14절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고 합니다. 이전 성경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신비입니다. 그래서 “심히 기묘하다”라고 말하고 “기이하다”는 표현도 2번 반복됩니다(14,15). 15절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하나님은 은밀한 곳이며 땅의 깊은 곳과 같은 어머니의 태에서 시인을 만드셨습니다. 어둠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새로운 생명이 만들어집니다. 마치 12절에서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라고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어둠인 것 같은데, 그곳에 생명이 있고 빛이 있습니다. 이 깨달음이 시인에게도 한 줄기 소망의 빛으로 다가옵니다. 시인의 현실이 칠흑과 같은 어둠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날이 반드시 다가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어둠과 빛이 다르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계획과 섭리 속에서 시인을 만드셨기에 다시 강조하는 것은 “아신다”는 겁니다. 16절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하나님 앞에 숨겨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라고 하는데 어떤 의미인지 어렵습니다. 고대 근동의 배경으로 이해한다면 당시 왕들이 태어날 때 신의 칙령이 담긴 운명의 토판을 목에 걸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시인의 앞 날에 대한 모든 것을 예정하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삶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으며 사명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지요.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24절)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시고, 앞날의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니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깊은지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며 깨달을수록 기가 막힙니다. 시인의 마음이 습3:17절과 같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그래서 시인은 18절 하 “내가 깰 때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이런 고백입니다. 악인들로 인해서 괴롭고 불면의 밤을 보냅니다. 혼자인듯한 외로움과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그런데 나를 심히 기묘하게 만드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이제 시인을 악인들에 대해서 기도합니다. 19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과격한 기도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토로하며 온전히 맡기는 기도입니다. 어쩌면 시인이 악인들에게 둘러싸였을 때는 자신이 곧 죽을 것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니 자신을 악인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둘러싸시고 함께 하십니다(5절).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확신하며 기도로 맡깁니다.

악인들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피 흘리기를 좋아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시인은 그렇게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들의 말과 행동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거룩한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미워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보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불명예를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과격한 기도를 드리는 겁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의로운 분노가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 마음의 생각과 동기를 살펴보시기를 기도합니다.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확신하지 않습니다. 혹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잘못된 의도가 포함되어 있는지 하나님께서 살피시고 깨닫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영원한 길로 인도해주시길 간구합니다.

우리의 기도 중 많은 부분은 원하는 것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필요한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기도가 바로 존재에 대한 기도입니다. 시인처럼 나 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심히 기묘하심을 묵상하며 감사합니다. 특히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시는 십자가 사랑을 생각하며 감사합니다. 우리에게도 악인들과 문제들이 있지만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우리 마음과 생각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갑시다.

시편139:1-12절/아시며 함께하시는 하나님(25.12.09)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3절)

​본 시편 역시 ‘다윗의 시’로 되어 있습니다. 삶에 예기치 못한 고난이 찾아올 때 힘이 듭니다. 그런데 그때가 소망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과의 새로운 만남으로 우리의 신앙이 깊어집니다. 시인이 그렇습니다. 본문을 보면 외로움과 두려움이 시인의 삶에 가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알아가면서 오히려 큰 은혜 누리며 능력과 빛을 경험하게 됩니다.

1-6절에 반복되는 단어는 “아신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을 너무 잘 아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시냐면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아십니다. 여기 ‘살펴보셨다’의 의미는 보석을 분별할 때, 법적인 분쟁에서 증거를 찾을 때, 그리고 군사작전에서 적진을 정찰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냥 아시는 것이 아니라 시인을 향한 깊은 관심으로 집중해서 살펴보신다는 의미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라고 번역합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힘들고, 누군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다는 이 말씀이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아신다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길을 가거나 누워있는 것을 아십니다. 일거수일투족을 아십니다. 이처럼 외형적인 것만 아시는 것이 아니고 내면도 아십니다. 마음과 생각을 밝히 아시고 거기서 나오는 혀의 말도 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5절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고 합니다.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둘러싸 주십니다. 그리고 안수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붙잡아주시고 축복해주십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 반복되는 또 하나의 단어는 ‘손’입니다. ‘하나님의 손’. 10절에서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손이 인도하십니다. 능력의 오른손으로 붙잡아 주십니다. 시인은 이 사실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깊은 고독 속에서 하나님께서 시인의 손을 뜨겁게 붙잡아주시는 것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시인과 함께 하십니다. 보호하시며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 하나님과의 만남, 깨달음으로 시인은 놀랍게 됩니다. 6절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지금 시인은 고난과 외로움 속에서 흔들리고 무너져야 합니다. 두려움 속에 숨어야 합니다. 그런데 살피시고 아시는 하나님을 만나니 외롭지 않고 두렵지 않습니다. 내 인생의 하나님의 손길 속에 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시며 소망의 미래를 열어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10절)

​그리고 아시는 하나님은 반드시 함께 하십니다. 7-10절이 그 내용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절대 도망칠 수 없다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을 반대로 하면 어느 곳에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스올에 자리를 펼지라도 함께 하십니다. 9절은 복음성가에도 자주 나오는 표현인데요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입니다. 이 장면은 동이 틀 때 태양광선이 순식간에 뻗어나가 바다 끝에 닿는 모습입니다. 한마디로 빛의 속도로 날아간다 할지라도 그곳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오른손이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합니다.

롬8:35-39절 말씀이 생각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마지막으로 이처럼 아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시인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가? 흑암과 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현재 시인의 상황입니다. 흑암 가운데 절망적인 현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니 어둠이 어둠이 아닙니다. 밤이 하나님으로 인해 낮과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12절 하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현실은 고난과 어둠이지만 내면은 빛입니다. 소망입니다. 기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