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13 | 매일성경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2절)
4장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성을 방문하셔서 한 여인을 만나주셨습니다. 여인을 통해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떠나 유대 갈릴리로 오시는데, 사마리아와 전혀 다른 반응입니다. 이들은 표적을 구합니다. 예수님을 그런 태도를 책망하시면서도 병들어 죽어가는 왕의 신하 아들을 말씀으로 고쳐주십니다.
오늘 말씀은 1절 “그 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어느 명절인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습니다. 양문은 양들이 지나다니는 문으로 제물로 바쳐질 양을 씻기 위해 사용되던 문입니다. ‘베데스다’의 의미는 “자비의 집”입니다. 그런데 그곳은 자비가 넘치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행각 다섯 개가 있는데, 그 안에 많은 병자들이 누워있습니다.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아마 곳곳에서 앓는 소리가 나고 절망이 깊은 장소였을 겁니다. 죽음의 냄새가 가득한 곳이 아니었을까요?
이 병자들이 모여 있는 이유는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4절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기가 막힐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연못의 물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물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립니다. 그러다 물이 움직이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요? 지옥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서로 먼저 들어가기 위해서 달려야 합니다. 누군가를 제쳐야 하고, 누군가는 밟고 지나가기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1등을 해야 치료가 됩니다. 한때 유행했던 말처럼 “1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시 절망입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은 정말 천사가 내려와서 물이 움직였을까요? 학자들에 따르면 이 연못에 가끔 온천수가 솟아 올라왔다고 합니다. 그것을 천사가 물을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했고, 또한 연못 물에 철분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간혹 치료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것이 미신같은 이야기로 이어진 겁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육신은 멀쩡하지만 죄의 영향력 아래 신음하며 살아갑니다. 헛된 소망을 붙잡고 서로 경쟁하며 달려갑니다. 이런 세상에 유일한 소망은 누구일까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
그곳에 38년 된 병자가 있습니다. 참 긴 시간입니다. 지금과 다른 당시 평균 수명을 생각해본다면 이 사람은 거의 평생을 질병의 짐을 지고 살았습니다. 이 연못에 얼마 동안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도 먼저 들어가지 못하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한마디로 완전한 절망입니다. 그런 병자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이 사람의 질병이 오래 된 줄 아시고 물으십니다. 6절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나 마나한 이야기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병자는 다른 대답을 합니다. 7절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대답 속에 세상에 대한 원망이 담겨있습니다. 내 곁에 힘 있고 발 빠른 사람들이 있다면 내가 1등으로 연못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데 그럴 수 없어서 답답하다는 겁니다. 어쩌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라도 곁에 머물면서 그런 도움을 주면 좋겠다는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이 병자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자기 앞에 있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겁니다. 바로 앞에서 죽어가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말씀으로 살려주신 분입니다. 죽을 자를 살리시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알지 못하니 엉뚱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을 처음보았기 때문이요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병자보다 이 시대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잘 알고 있는데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의 모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실 능력의 주님이신데, 우리는 그저 사소한 몇 가지만 해결할 분으로 믿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선포하십니다. 8절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참으로 당혹스런 말씀인데 병자는 순종합니다. 9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말씀의 능력입니다. 이 기적이 특이한 것은 보통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실 때 “네가 낫고자하느냐”라고 물으시고 믿음의 반응을 보이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혹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시며 치유하시는데 이 사람은 그냥 치유하십니다. 병자의 믿음과 상관없이 예수님은 치유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합니다.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은 육신의 질병의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적인 치유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신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문제를 제기합니다. 안식일인데 병을 고치는 것도 문제요, 병자가 치유되었다고 자기 자리를 들고 가는 것도 문제라는 겁니다. 참 냉혹한 사람들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이들의 이웃이었을 겁니다. 얼마나 고통스런 삶을 살았는지 너무 잘 압니다. 하지만 병자의 치유를 기뻐하고 감사하기보다 안식일 규정으로 그를 정죄하고 있습니다. 사실 안식일은 안식을 누리는 날입니다. 병자에게 안식은 질병의 짐을 벗는 겁니다. 드디어 참된 안식을 누린 겁니다. 그런데 정죄합니다.
본문이 강조하려는 것이 이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들보다 더 심각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육신은 멀쩡한데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를 망각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진짜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이런 유대인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지적에 당황한 병자는 누가 자리를 들고 가라고 했는지 대답을 못합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고, 자신이 치유되어 기뻐하는 사이 예수님이 사라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시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4절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육신의 질병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외칩니다. 15절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예수님만이 베데스다 연못과 같은 세상에서 유일한 소망이 되심을 선포합니다.
어디에 소망을 두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소망이 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누리고 있다면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026.02.12 | 매일성경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44절)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떠나 갈릴리로 향하십니다. 그런데 갈릴리에 도착하시기도 전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44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막상 갈릴리에 도착하니 45절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예수님을 영접한 이유가 45절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입니다. 2장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셔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셨습니다. 동시에 표적도 행하셨습니다. 2:23절은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갈릴리 사람들이 본 것은 예수님의 표적이었고 이것이 예수님 환영의 이유였습니다.
이 모습이 어제 묵상 말씀인 사마리아 사람들의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사마리아 지역에서 예수님은 어떤 표적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한 여인을 통해 예수님을 소개받고 나와서 말씀을 듣고 믿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 머무시면서 말씀 전해주기를 요청해서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그 결과를 41절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절 하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표적이 아닌 말씀을 듣고 믿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인정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을 인정하지 않고 짐승처럼 생각하며 무시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표적에 관심을 가집니다. 이런 신앙의 위험성을 지적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48절에서 갑작스럽게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표적 중심의 신앙을 책망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에 대한 오해를 낳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습니다(1:29절). 그것을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고, 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멸망하지 안하고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죄의 세력 아래 신음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참 생명과 참 자유를 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 십자가를 향해 예수님은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이것을 바로 알고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땅에서 몇 개의 표적을 경험하는 것보다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인 죄의 문제 해결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표적과 기사 중심의 신앙은 예수님을 오해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보다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길 기대합니다. 표적에 집중할수록 잘못된 기대가 커집니다. 예수님이 정치적, 경제적 메시아가 되어주길 원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아들도 외면하고 버릴 것입니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기대했던 사람들에 의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표적 중심의 신앙이 아닌, 말씀 중심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50절)
이처럼 말씀과 말씀에 대한 순종의 중요성을 두 번째 표적에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표적을 행하신 갈릴리 가나에 도착하십니다. 결혼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왕의 신하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습니다.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의 거리는 약 30km이고 걸어서 8시간 정도가 걸립니다. 이 신하가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먼 길을 달려와 간청합니다. 47절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그리고 다시 절규하듯 부르짖습니다. 49절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이 신하는 예수님께서 함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대 치유해주시길 간구하고 있습니다. 다른 방법은 머릿속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함께 가는 대신에 5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라고 하십니다.
이제 신하는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갈 것인지, 아니면 기어이 예수님을 끌고라도 갈 것인지. 놀랍게도 신하는 50절 하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표적을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갑니다. 그리고 아들이 낫는 표적을 경험합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고 싶으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표적이 앞서고, 표적이 우리 신앙을 이끌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갑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뜻을 이루려 합니다. 하지만 표적보다 말씀이 앞서갈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오직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가는데, 아이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올라오던 종들을 만납니다. 종들이 전한 소식은 아이의 열이 떨어져 살아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52절 “어제 일곱 시”입니다. 우리 시간으로 오후 1시입니다. 이때가 예수님께서 아들이 살아있다고 말씀하셨던 그때임을 깨닫고 신하의 모든 집안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표적이 54절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고 합니다. 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도 행하신 많은 표적은 제외하고 갈릴리에서 행하신 표적에 첫 번째, 두 번째라고 순서를 말합니다. 두 표적의 공통점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첫 번째 표적인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2:5절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하인들도 예수님께서 물을 채우라고 하니 가득 채웠고, 물을 떠다주라 하니 그대로 순종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두 번째 표적도 말씀을 믿고 순종해서 갔더니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이 시대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말씀보다는 표적을 따라갑니다. 이로 인해 신앙이 왜곡되고 삶이 안정적이지 못한 경우들이 많습니다. 이런 시대 어렵지만 말씀을 붙잡고, 매일 묵상하며, 함께 말씀을 나누는 삶이 복된 신앙입니다. 무엇보다 말씀의 자리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하루하루가 쌓여 견고한 신앙, 복된 인생이 됩니다.
2026.02.11 | 매일성경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28절)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가 계속되었습니다. 목마름으로 시작된 대화가 남편 이야기로, 그리고 예배 이야기로, 결국 메시아, 그리스도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26절 “내가 그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여인이 말한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신 겁니다. 이 사이 제자들이 음식을 사러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를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묻는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가까이서 지켜본 예수님은 이유없이 어떤 행동을 하시지 않으니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된 여인의 행동이 놀랍습니다. 28절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물동이를 버려둡니다. 물을 길으러 나왔던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었다는 것은 육신의 목마름을 해결해 줄 물보다 더 귀한 것을 발견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다시 목마르지 않는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모든 문제를 아시는 예수님, 그렇다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주님을 만난 기쁨이 여인의 마음에 가득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네를 향해 달려갑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사람들이 없는 뜨꺼운 한 낮에 물을 길러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들고 달려갑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두려운 존재가 아닌 참된 기쁨을 나누고 싶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29절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와서 보라”는 1장에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초청이고(1:39),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했던 말입니다(1:46).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시간은 짧은 시간입니다. 그런데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전하는 일이 많은 것을 알아야 하고, 많은 신앙의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얼마의 시간이었든지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하는 겁니다. “와서 보라”고 초청하는 겁니다. 이 초청에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옵니다. 아마 여인의 달라진 모습에 놀라서였을 겁니다. 이전과 다른 여인의 기쁨과 확신의 이유를 알고 싶어서였을 겁니다. 예수님을 만난 달라진 여인의 모습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께 나오게 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우리의 모습은 어떤지 생각하게 됩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34절)
여인이 동네에 들어간 사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알려주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음식을 권하자 예수님께서 의외의 답을 하십니다. 32절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은 누군가 예수님께 음식을 갖다 드렸나보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는 그것이 아닙니다. 34절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정확한 의미를 알려주십니다.
요한복음은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들이 계속됩니다. 니고데모도 거듭남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수가성 여인도 영적인 목마름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양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강조하는 것은 영적인 진리를 사람이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지식이 뛰어나고 경험이 많아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실 때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이 중요합니다. 영적 존재인 우리는 영적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 통해 영적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왜 양식이라고 하셨을까를 생각해보면 양식을 먹지 못하면 살 수 없습니다. 양식이 생명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 목적과 사명을 감당하는 삶이 참 생명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 그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자들이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강조하십니다.
이를 위해 35-38절까지 길게 설명하시는데 내용이 쉽지 않습니다. 정리해서 설명하면 제자들은 이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인식했어도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35절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고 하십니다. 시간이 많으니 서두를 필요 없다는 격언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36절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보통은 일을 하고 삯을 받는데 이미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시급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통해 복음 전파를 통해 영혼을 살리는 일이 중요성과 시급성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35절 하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추수해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뿌리고 거두는 자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거둔다”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지금까지 뿌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렇고 예수님 바로 앞에 등장했던 세례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뿌린 이들이 전한 구약의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오셨다면 이제는 거두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을 전해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사마리아 땅에서 하셨다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데 외면하고 배척해야 할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지역과 신분을 넘어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다시 여인과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여인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더 듣기 원해서 이틀을 더 머무시길 요청합니다. 보통 유대인이라면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머무시며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 결과 41절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처음에는 여인의 말로 인해서 예수님께 나왔는데, 이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여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42절 하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와서 보라”는 여인의 초청을 따라 신앙이 시작되었지만, 친히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버리고 주님을 전해야 할 물동이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무엇을 양식으로 삼고 있는가? 먹는 것에 관심이 많은 시대,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알고 온전히 이루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026.02.10 | 매일성경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절)
육신의 갈증을 느끼시는 예수님과, 영혼의 목마름을 가진 여인이 만나 대화를 나눕니다. 대화 중 예수님께서 다시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시겠다고 하자 여인은 그런 물을 달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뜨거운 대낮에 물을 길로 오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런 물을 주시든지, 아니면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셔야 할텐데, 갑작스런 요청을 하십니다. 16절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하지만 이 질문은 여인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수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직시해야 할 질문입니다. 그래서 던지십니다.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낯선 남자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8절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하십니다.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 특히 처음 만난 유대인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사실이 드러납니다. 요한복음은 계속 예수님께서 사람을 잘 아신다고 하는데 여인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16-18절까지 ‘남편’이라는 단어가 5번 반복됩니다. 여인이 자신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한 인생의 ‘물’로 의지했던 것이 바로 남편입니다. 사람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생수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상처와 아픔을 주는 존재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남편에 대한 질문은 여인이 지금까지 무엇을 붙잡고 살아왔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것을 의지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참된 생수를 만나기 위해서 생수가 아닌 것을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사람, 물질, 명예와 지위 등을 의지하고 있다면 언젠가는 그것으로 인해 더 깊은 목마름을 경험하게 됩니다. 상처와 아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 붙잡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4절)
여인이 숨기고 싶었던 남편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꺼내셨다면 이어지는 대화는 왜 그런 인생을 살게 되었는지로 이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화의 방향이 갑자기 예배로 바뀝니다. 이제는 여인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20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대화를 통해 예수님이 보통 분이 아니고 선지자처럼 느껴졌던 여인은 그동안 궁금해했던, 하지만 답을 얻지 못한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어디에서 예배해야 하는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마리아와 유대 지역이 각각 예배하는 장소가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에 나온 것처럼 다윗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예배합니다. 이들은 구약성경 전체가 아닌 모세오경만을 인정했습니다. 그 가운데 신명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며 하나님과 언약을 세운 산이 있습니다. 그리심산과 에발산입니다. 그 가운데 축복이 선포된 그리심산에 성전을 짓고 예배했습니다. 이 갈등이 심했습니다. 한번은 유대인들이 그리심산 성전을 파괴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하십니다. 장소가 중요하지 않을 때가 온다는 겁니다. 21절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예수님은 ‘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23절도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하시면서 계속 ‘때’를 강조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때는 “십자가와 부활의 때”입니다. 그때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고 무엇으로 예배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건물 성전은 신약의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예수님이 참 성전이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그것을 완성하십니다. 그렇다면 건물 성전은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건물성전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참 성전이시고 예수님을 모신 성도들이 성전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예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본문은 두 번이나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합니다. 여기 ‘영’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진리’는 진리이신 예수님입니다. “영과 진리”는 곧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알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하신 일을 알며,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신분과 변화를 알고 감사함으로 예배하는 겁니다. 그런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예배하는 겁니다. 우리 예배의 태도가 바르지 않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배할 때마다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내용들입니다.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메시아를 생각합니다. 25절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요한복음 흐름 속에서 점점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가 선명해집니다. “메시야 그리스도”이십니다. 여인은 아직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데 예수님께서 밝히십니다. 26절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이처럼 여인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점점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이상한 유대인으로 알았습니다(9절). 그러다 12절 하에서는 “야곱보다 크신 분”으로, 19절에서는 ‘선지자’로, 그리고 25-26절은 메시야 그리스도로 압니다. 그리고 이 앎이 여인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을 알아가고 만난다는 것이 바로 이렇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대화 주제가 바뀌는 이유가 있습니다. 생수 이야기가 남편 이야기로, 그리고 예배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가장 먼저 무엇이 생수가 아닌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보다 더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사람, 물질, 자리와 명예라고 한다면 내려놓읍시다. 또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예수님 중심의 영과 진리로 예배합시다.
2026.02.09 | 매일성경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4절)
3장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최고의 사람인 니고데모를 만나주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스스로 찾아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4장 예수님은 최하의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주십니다. 이 여인은 문제가 있지만 예수님을 찾아갈 수 없는 여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인을 찾아오십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며 여인을 만나는 배경은 1절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활동하시면서 세례를 베푸시고 제자를 삼으십니다. 그런데 2절은 세례를 예수님이 베푸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이 베푼 세례는 회개의 세례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를 베푸시는 일보다는 생명의 길이신 예수님을 전할 제자들을 만드시는 일에 집중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 삼는 활동과 제자들이 세례 베푸는 일들을 바리새인들이 주목합니다. 자칫 충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예수님은 판단하시고 유대지역을 떠나 예수님 사역의 중심지인 갈릴리를 향해 가십니다. 그 과정에 사마리아를 통과하십니다. 4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고 하는데 원어로 보면 “해야만 한다”는 당위를 나타내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마리아 통과는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람을 아신다고 강조했는데, 예수님께서 인생의 목마름으로 고통하는 한 여인을 아시고 만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사마리아로 향하고 계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부정한 지역이라고 생각해서 길이 좀 멀어도 우회해서 다녔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를 향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깜짝 놀랍니다. 9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님의 관심이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심지어 인생의 문제로 손가락질 당하던 사마리아 한 여인에게 있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당대 최고의 사람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듯, 예수님께서 가만히 있어도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올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명성을 위해서도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시듯 여인을 찾아오십니다. 저자 요한은 이런 순서의 기록을 통해 이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라는 지역에 도착하십니다. 그곳은 6절 “야곱의 우물”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물가에 도착하신 시간이 6절 하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고 하는데 우리 시간으로 하면 낮12시입니다. 이 시간은 중동지역의 뜨거운 햇빛 때문에 사람들이 활동하지 않고 쉼의 시간을 갖습니다. 물을 길어도 오전이나 오후 선선한 시간에 나옵니다. 그런데 여인은 사람들이 없는 시간에 우물가를 찾은 겁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나왔습니다. 그 이유가 내일 본문에 나옵니다. 한마디로 이 여인은 인생의 목마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절)
예수님께서 첫마디를 던지십니다. 7절 “물을 좀 달라” 탁월한 선택입니다. 예수님과 여인의 공통점이 목마름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목마름입니다. 여인은 영적인 목마름입니다. 육신의 목마름은 물을 마시면 해결되지만 과연 영혼의 목마름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우물”, “물”, “생수”입니다. 다해서 14번 정도 나옵니다. 무엇을 보여주냐면 이 세상에는 우리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해주겠다는 것들이 많다는 겁니다. 그것만 있으면 내가 만족하고 행복할 것 같은 기대를 갖게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사람, 물질, 지위 등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절대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마치 목이 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시면 극심한 갈증을 느끼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만족과 기쁨은 과연 어디에서 올까요? 1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영혼의 갈증을 해결할 ‘생수’가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생수’는 ‘영생’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존재가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는 겁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살아있으나 죽은 겁니다. 그런데 이 영적인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집니다. 만약 영생을 돈을 주고 사야한다면 얼마를 주어야 할까요?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우리 유한한 생명을 바쳐도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고, 지금 우리가 그 은혜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은혜요 감사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죽어가는 백성들을 위해 장대에 놋뱀을 매달고 쳐다본 자들은 생명을 얻은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겁니다. 이것이 유일한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여인도 니고데모처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13절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그렇습니다. 다시 목마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새로운 물을 찾습니다. 예수님은 14절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영생의 샘물이 되십니다.
예수님을 찾아올 수 없는 목마른 한 여인을 찾아가셔서 만나주시고 생수를 주신 예수님, 과연 우리의 관심을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 낮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물은 많지만 생수가 없는 시대 생수되신 예수님을 전합시다.
2026.02.06 | 매일성경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2절)
예수님은 2장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정결 예식 중심의 죽은 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새로워져야 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 예수님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면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성전 중심의 신앙이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알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성전 중심 신앙 가운데 있던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1절 보면 바리새인이면서 유대인의 지도자입니다. 그리고 10절은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도 합니다. 바리새인은 “구별된 자”라는 의미로 경건한 신앙을 추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지도자는 그냥 지도자가 아니라 로마가 인정한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을 의미합니다. 70명으로 구성된 유대교 최고 의결 기구입니다. 그렇다면 니고데모는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성공한 인물입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밤에 찾아온 것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성전을 엎은 위험한 인물이요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찾아온 것은 그의 마음에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숙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밤’은 그의 영적인 상태를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니고네모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면서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자신의 질문에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질문을 듣기도 전에 답을 하십니다.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어제 말씀 2:24-25절은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아신다고 반복했는데 니고데모의 문제를 정확하게 아시고 답을 주십니다. 니고데모의 질문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가?”였습니다. 이것을 15절은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절은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로 이어집니다. 한마디로 니고데모는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겁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이지만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종교가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이라고 하십니다. ‘거듭난다’는 헬라어로 ‘아노덴’인데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새로 태어남”이고 다른 하나는 “위로부터 태어남”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는 두 번째입니다. 즉 위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다시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수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이것이 당시 종교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잘 알고 있는 구약의 예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5절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전에는 물은 무엇을 의미하고 성령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누었는데 매일성경은 ‘물과 성령’이 ‘물 곧 성령’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에스겔36:25-26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합니다. 에스겔 말씀은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인지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물로 정결케 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새 영을 주어 마음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즉 거듭난다는 것은 성령을 통해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14절)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바람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바람이 불면 느낄 수는 있지만 보이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역사하시면 우리에게도 느낌과 감동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성령께서 일하십니다.
여전히 믿지 못하는 니고네모에게 예수님은 11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에는 ‘증언’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옵니다. 확실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증언은 알고 본 것입니다. 너무 확실합니다. 그런데 왜 믿지 못하는가? 예수님을 땅의 일만이 아닌 하늘 일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게 이 땅으로 오셨기에 하늘 일도 알고 보셨고 땅의 일도 아십니다. 그러나 땅의 일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늘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늘 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시면서 거듭남의 핵심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4-15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민수기 21장을 배경으로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다가 험한 길로 인하여 불평을 합니다. 하나의 문제에서 시작된 불평이 시간이 흐르면서 봇물 터지듯 쏟아집니다. 음식도, 물도 모든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오래 참으셨던 하나님께서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십니다. 죽은 자들이 많아집니다.
모세가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말씀하십니다. 민21:8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장대에 불뱀 모양을 만들어 달라는 겁니다. 그것을 보면 산다고 합니다. 참 상식적이지 않는 방법입니다. 해독제를 맞든지 해야지… 그런데 믿음으로 바라보면 살 것이라 하셨고 민21:9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순종해서 바라볼 때, 살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말씀하는 겁니다. 죽어가는 자들을 살리기 위해 놋뱀을 장대에 달았듯,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볼 때 생명을 얻습니다. 그것은 위로부터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십니다. 이 말씀이 전제하는 것은 우리 모두는 불뱀에 물려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죄의 독이 퍼져 죽어가고 있는 존재라는 겁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가 십자가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서 죄의 문제를 해결받고 영생을 선물로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기 은혜 감사하며 여전히 죄와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