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21:1-19절/레위 사람의 성읍(25.01.31)

●“그 때에 레위 사람의 족장들이”(1절)

21장은 레위 자손이 거주할 성읍과 목초지를 분배받습니다. 이로써 가나안 땅에 대한 분배가 마무리됩니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정리해보면, 12장까지는 가나안 정복에 관한 내용이었다면 13장부터가 땅 분배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이미 분배된 요단 동편 땅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14장부터는 본격적으로 요단 서편 땅의 분배가 시작되는데, 가장 먼저 분배를 받은 사람이 갈렙입니다. 어떤 지파가 아닌 한 사람이 먼저 분배를 받는 것이 특이한데, 이유는 45년 전 갈렙이 가데스바네아에서 12정탐 중 한 사람으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믿음의 보고를 했기 때문이고, 지금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렙에 이어 유다 지파가 땅을 분배받습니다. 그리고 요셉 자손, 즉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분배를 받는데 이들은 땅 분배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자신들이 큰 민족을 이루었는데 분배받은 땅은 작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여호수아는 “스스로 개척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다섯 지파가 분배를 받았고 나머지 일곱 지파가 아직도 분배를 받지 않았습니다.

18장을 보면 이들은 땅을 분배받는 일에 소극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일곱 지파에게 한 지파 당 세 사람씩을 선정해서 분배받을 땅을 두루 다니며 지도를 그려오라고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제비를 뽑아 분배를 합니다. 베냐민 지파를 시작으로 모든 지파에게 땅 분배가 마무리됩니다. 그 가운데 시므온 지파가 분배 받은 땅은 유다 지파에 속한 땅입니다. 유다 지파는 자신들의 땅이 많기 때문에 시므온 지파와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지도를 보면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 안에 속해 있습니다. 이런 유다 지파의 모습은 앞에서 분배받은 땅이 작다고 불평했던 에브라임 지파와 대조를 이룹니다.

이렇게 12지파에 대한 땅 분배가 마무리되자 하나님은 20장에서 도피성을 정하라고 하십니다. 도피성 제도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시는지를 알게 합니다. 생명이 소중하기에 무고한 피를 흘리지 않아야 합니다. 도피성은 20:3절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는 말씀처럼 고의가 아닌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들이 피의 보복자를 피해 도망할 수 있는 곳입니다. 고의로 사람을 죽인 자는 도피성으로 피한다해도 재판을 통해 범죄가 드러나면 도피성에 머물 수 없습니다. 죽음으로 갚아야 합니다.

이렇게 도피성으로 피한 자는 먼저 회중 앞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그의 범죄가 고의성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면 도피성에 머물게 됩니다. 언제까지 머무냐면 20:6절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고 합니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는 대제사장의 죽음이 이 사람의 죄를 속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수로 죽인 것이지만 죄는 죄입니다. 그것을 속죄하는 것이 대제사장의 죽임이고, 이후에 자유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자유를 주신 것과 같습니다.

도피성은 요단 동편에 세 개, 요단 서편에 세 개로 모두 여섯 개입니다. 위치가 흩어져 있어 하루 안에 도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자기의 기업에서”(3절)

땅 분배 마지막으로 레위 사람이 나와 거주할 성읍과 목초지를 요구합니다. 그 근거가 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사 우리가 거주할 성읍들과 우리 가축을 위해 그 목초지들을 우리에게 주라 하셨나이다”입니다. 민35:1-8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이런 레위 사람의 요구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3절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자기의 기업에서 이 성읍들과 그 목초지들을 레위 사람에게 주니라”고 합니다. 12지파가 자신들의 성읍과 목초지를 주어 레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이렇게 레위 사람은 전국에 흩어져 생활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도록 했습니다. 레위 지파를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알고 바르게 섬기는 것이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의 성패를 좌우하는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인 부분을 책임지고, 이스라엘은 레위 지파의 물질적인 부분을 책임지며 함께 살아갑니다.

4-7절은 레위 사람을 위한 땅 분배의 개요를 설명하고 8절부터는 세부적인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4-7절 각 절 끝에 나오는 성읍의 숫자를 다 합하면 48성읍입니다. 레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핫(고핫)과 게르손 그리고 므라리입니다. 그핫 가족에 대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이 들어 있는데 이들이 먼저 분배를 받습니다. 유다와 시므온, 그리고 베냐민 지파 성읍 중 13성읍입니다. 이어 그핫 가족이 받은 성읍은 에브라임과 단, 므낫세 반지파 중에서 10성읍입니다.

게르손 자손은 잇사갈, 아셀, 납달리, 므낫세 반지파 중 13성읍이고, 마지막으로 므라리 자손은 르우벤과 갓, 스불론 지파 중에서 12성읍입니다. 대략 한 지파당 4성읍 씩, 도합 48성읍을 분배해주었는데, 납달리 지파는 3성읍을 분배했고 유다와 시므온이 9성읍을 분배했습니다.

도피성 제도와 레위 사람들이 흩어져 각 성읍에 거주하는 내용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내 생명이 소중하닥면 다른 사람의 생명 역시 소중하게 여기고 무고한 피를 흘리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자신들의 기업을 내놓아 레위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겁니다. 레위인은 말씀을 책임지고, 이스라엘의 생활을 책임지며 함께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출처] 여호수아21:1-19절/레위 사람의 성읍(25.01.31)|작성자 늘봄교회

여호수아22:10-20절/요단 가에 쌓은 제단(25.02.03)

여호수아22:10-20절/요단 가에 쌓은 제단(25.02.03)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쪽에 제단을 쌓았다 하는지라”(11절)

요단 동편 지파인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는 요단 서편을 차지하기까지 앞장 서서 싸우라는 자신들의 책임을 완수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이들을 축복하고, 권면하여 요단 동편으로 돌려보냅니다. 이렇게 아름답게 마무리가 되는가 싶은데,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여 이스라엘이 전쟁의 위기를 만납니다.

시작은 르우벤과 갓, 므낫세 반지파가 요단 동편으로 돌아가다가 쌓은 큰 제단 때문입니다. 10-12절에는 이 제단의 위치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요단 언덕 가”라고 하는데, 11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들은즉 이르기를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의 맨 앞쪽 요단 언덕 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쪽에 제단을 쌓았다 하는지라”고 합니다. 이 절은 “이스라엘 자손”과 요단 동편 자손을 구분합니다. 이런 구분이 오늘 본문에 계속됩니다. 13절에는 “이스라엘의 온 회중”과 “그들”을 구분하고, 16절은 “여호와의 온 회중”과 “너희”가 구분됩니다. 19절에서는 “너희의 소유지”(요단 동편)와 “여호와의 소유지”(요단 서편)가 구분됩니다. 문제가 발생하자 하나로 보였던 이스라엘에 구분이 생깁니다.

이런 구분 속에 제단을 쌓은 장소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쪽에 제단을 쌓았다”는 것을 보면 그들이 거주하는 요단 동편 땅이 아닌 요단 서편 땅에 제단을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들의 땅도 아닌데 왜 요단 서편에 제단을 쌓은 것일까요? 제단은 제물을 드리기 위해 만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데나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성막에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레17:8-9절). 지금 성막이 있는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지는 ‘실로’입니다. 그러므로 요단 가에 쌓은 제단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가 아니라면 이 제단은 우상숭배를 위한 제단으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것 또한 문제입니다. 이런 불순종과 우상숭배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옵니다. 이미 그것을 여러 차례 경험했습니다. 그러니 전쟁을 해서라도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 전쟁을 하려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바로 전쟁하지 않고 대표단을 파견해서 자세한 내막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자신들의 판단이 맞다고 생각되지만 혹시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기에 주의를 기울이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유가 드러나지만 만약에 이런 과정이 없었더라면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지마자 동족끼리 전쟁을 하는 비극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파견단의 대표는 비느하스입니다. 17절에도 나오는 브올의 사건 때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했던 인물입니다. 민25장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고 있을 때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고 우상 숭배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한 사람이 비느하스입니다. 민25:11절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라고 합니다. 비느하스와 더불어 서편 지파에서 각 한 사람씩 10명의 지도자들이 함께 합니다.

우리 삶의 많은 문제도 오해로 인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판단과 이해가 사실과 다른 경우들이 많습니다.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행동하므로 얼마나 많은 갈등이 발생되는지 모릅니다. 오늘 말씀에서 교훈을 얻어야 겠습니다. 내 판단이 서더라도 주의 깊게 알아보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신중하게 접근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우리 중에서 소유지를 나누어 가질 것이니라”(19절)

대표단은 요단 동편 지파들을 만나 책망합니다. 16-18절이 그 내용인데 반복되는 말이 하나님께 범죄, 여호와께 거역, 여호와를 배반입니다(16,18,19). 이렇게 제단을 마음대로 쌓는 행동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그 예를 17절에서 브올의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오늘까지 우리가 그 죄에서 정결함을 받지 못하였거늘 이라고 하는데 여전히 우상숭배와 음행의 유혹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20절에는 아간의 범죄도 거론합니다. 7장에 나온 것처럼 아간 한 사람의 탐심으로 이스라엘은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군사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아직도 가나안땅 완전히 정복하려면 계속 전쟁을 치러야 하는데 이런 일이 발생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의 대안을 제시합니다. 19절 ”그런데 너희의 소유지가 만일 깨끗하지 아니하거든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여호와의 소유지로 건너와 우리 중에서 소유지를 나누어 가질 것이니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서편 땅과 동편 땅을 구분합니다. 동편 땅은 하나님의 임재이 상징인 성막이 없기에 깨끗하지 않다고 생각된다면, 서편 하나님의 성막이 있는 여호와의 소유지로 건너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기꺼이 소유지를 나누어 함께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자고 합니다.

본문을 보면 요단 서편 지파들이 하는 구분이 그렇게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제시한 제안은 아름답습니다. 요단 서편 땅을 분배할 때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땅이 작다고 불평했습니다. 후에 일곱 지파가 받은 땅은 크지 않은 땅들입니다. 유다는 시므온에게 이미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땅을 양보해서라고 함께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기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판단하고 정죄하며 문제만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공동체는 혼란에 빠집니다. 양보와 희생을 통해 함께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출처] 여호수아22:10-20절/요단 가에 쌓은 제단(25.02.03)|작성자 늘봄교회

여호수아 22:21-34/증거가 되는 제단 모형(25.02.04)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시나니”(22절)

요단 동편 지파들이 돌아가면서 요단 언덕 가에 큰 제단을 세웠습니다. 이로인해 이스라엘은 전쟁의 위기를 만납니다. 전쟁 전에 이 문제를 알아보기 위해 비느하스를 중심으로 대표단이 파견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대화를 통해 오해가 풀어지는 내용입니다.
동편 지파들이 서편에서 파견된 대표단에게 설명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데, 22절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시나니”입니다.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 속에 하나님의 이름이 세 번 들어가 있습니다. 특이한 표현입니다. “엘 엘로힘 야웨”입니다. 쉽게 번역하면 “여호와, 신들 중의 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세 개가 들어가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동편 지파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이 얼마나 결백한지를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함입니다. 이들이 제단을 세운 이유는 서편 지파들의 판단과는 전혀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23절 “우리가 제단을 쌓은 것이 돌이켜 여호와를 따르지 아니하려 함이거나 또는 그 위에 번제나 소제를 드리려 함이거나”라고 하면서 서편 지파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우상숭배를 위한 제단도 아니요, 성막 앞의 제단이 아닌 다른 제단을 만들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위함도 아니라는 겁니다. 29절을 보면 동편 지파들도 분명하게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일은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성막 앞에 있는 제단”에서만 드려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심각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제단을 쌓은 이유가 무엇인가? 24절 “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노라 곧 생각하기를 후일에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설명을 시작합니다. 여기 사용된 단어가 “목적이 있어, 주의하고, 생각하기를”입니다. 이들은 깊이 생각했습니다. 주의했습니다. 그럼에도 목적이 있어 이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편 지파들이 보았을 때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생각 없이, 갈등을 불러 일으킬 일을 행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내 판단과 생각이 맞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이런 과정 통해 서로의 마음을 알아가는 시간이 없었더라면 어떤 비극이 일어났을지 생각만해도 끔찍합니다.
우리가 가정과 직장, 교회에서 겪는 갈등이 이런 경우들이 많습니다. 상대방도 깊이 생각하고 하는 행동과 말인데, 입장과 상황이 다르다 보니 우리의 생각과 다른 경우들이 있습니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알아보지 않고 판단하고 행동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묻고 듣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너희 사이와 우리의 후대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할 뿐으로서”(27절)

요단 동편 지파들의 걱정은 지금 당장이 아닌 후일에 대한 것입니다(24,28). 후손들에 대한 것입니다. 미래세대의 신앙을 생각해서 한 행동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들의 행동은 칭찬해야 마땅합니다. 동편 지파들의 걱정은 이것입니다. 지형적으로 요단을 중심으로 동편과 서편이 나뉘는데, 시간이 흐르면 남남처럼 살게 되지 않을까입니다.

서편 지파들이 24절 하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혹은 25절 “여호와께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요단으로 경계를 삼으셨나니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분깃이 없느니라”라고 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면 어떻게 하나하는 걱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즉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미래세대까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이 가장 중요한데, 요단이라는 경계 때문에 후에 하나님을 신앙하는 일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깊고 지혜로운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알고 보니, 서편 지파들의 생각이나 동편 지파들의 생각이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 겉으로 표현되는 내용이 달랐을 뿐입니다. 서편은 성막이 있기에 그곳을 중심으로 잘 섬기면 됩니다. 하지만 동편은 후대에 서편 지파들이 하나님 섬기는 것 금지하지 못하도록 눈에 보이는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제단 모형을 세운 것입니다.

본문에 “증거”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27,28,34). 특히 34절에서는 세운 제단 이름을 “엣”이라고 하는데 의미가 “증인, 증거”입니다. 이렇게 분명한 증거가 되어야 하기에 요단 동편이 아닌 요단 서편 언덕 가에 만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아야 하기에 큰 제단을 만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신앙하는 상징물로 제단 모형을 만든 것이지요.

동편 지파들의 설명을 듣고 보니 이 일은 전쟁해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같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함입니다. 대표단이 듣고 기뻐합니다. 그리고 돌아와 서편 지파들에게 보고하니 33절 “그 일이 이스라엘 자손을 즐겁게 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찬송하고”라고 합니다. 위기가 변하여 기쁨과 찬송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잘 섬기기 위한 같은 마음이지만 생각이 달라 오해가 발생하였습니다. 곧바로 전쟁하지 않고 서로 묻고 대답하므로 오히려 위기가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미리 해결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