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22 | 매일성경
●“둘째 달 열넷째 날에 유월절 양을 잡으니”(15절)
히스기야는 남과 북의 온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월절을 지키도록 합니다. 하지만 원래 날짜인 1월 14일에 지키기에는 준비가 이루어지지 않아 한 달을 연기해서 지킵니다. 13절 “둘째 달에 백성이 무교절을 지키려 하여”라고 하는데, 앞에서는 ‘유월절’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무교절’이라고 합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은 출애굽을 하면서 어린양의 피로 죽음을 이기고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고, 무교절은 애굽에서 급하게 나오면서 누룩이 없는 빵, 즉 ‘무교병’을 먹을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1월 14일에 유월절을 지키고 이어 일주일간 무교절을 지킵니다. 그래서 유월절과 무교절은 하나의 절기로 간주합니다. 무교절을 지키기 위해 백성들이 모였는데 13절 하 “매우 큰 모임이라”고 합니다. 백성들이 이런 회복을 기대하고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인 백성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14절 “무리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는 제단과 향단들을 모두 제거하여”입니다. 여기 예루살렘에 있는 제단과 향단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이 아닌 우상을 숭배하는 것들입니다.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는 우상숭배로 주변 나라들의 공격을 받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음에도 돌이키지 않고 28:22절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했는데, 이때 28:24절 하 “예루살렘 구석마다 제단을” 쌓았습니다. 히스기야는 왕이 되어 성전을 성결하게 했지만 아직 예루살렘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우상숭배 제단과 향단은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을 모인 백성들이 먼저, 자발적으로 제거합니다.
그렇습니다. 절기를 지키며 하나님께로 돌아가 예배하기 전에 먼저 제거할 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일 때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바로 우리 안의 우상을 제거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2월 14일에 유월절이 시작되고 양을 잡습니다. 그런데 15절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부끄러워하여 성결하게 하고 번제물을 가지고 여호와의 전에 이르러”라고 하는데 새번역은 “미처 부정을 벗지 못하여 부끄러워하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부정을 씻는 예식을 한 다음에 번제물을 주님의 성전으로 가져 왔다”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앞부분에 반복되는 단어는 ‘성결’입니다(15,17,18,19). 제사장과 레위인들 가운데도 성결하지 못한 이들이 있었으며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에서 멀어져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서서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돌아가려고 보니 너무 멀리 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 모습이 우리 신앙에서도 주의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으로 멀어지는 일이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 서서히 일어납니다. 물이 가열되고 있는 냄비 속에 있는 개구리와 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매일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우리를 비춰보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처럼 성결하지 못하므로 인해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18절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잇사갈과 스불론의 많은 무리는 자기들을 깨끗하게 하지 아니하고 유월절 양을 먹어 기록한 규례를 어긴지라” 이번 유월절의 특징은 그동안 나뉘어졌던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한 것인데, 이들이 깨끗하게 하지 않은 상태에서 유월절 양을 먹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규례를 어기는 심각한 일이며 자칫 하나님의 진노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우상을 숭배하며 지내왔기 때문에 이런 규례의 중요성을 알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 문제를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해결합니다. 19절 “결심하고 하나님 곧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비록 성소의 결례대로 스스로 깨끗하게 못하였을지라도 사하옵소서 하였더니” 성소의 결례를 알지 못했지만 이들이 고의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고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니 그들의 마음을 보시고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용서하시며 고쳐주십니다. 몰라서 잘못을 저지른 자들에게 대한 책망이 아닌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께 히스기야는 기도합니다.
●“예루살렘에 큰 기쁨이 있었으니”(26절)
이처럼 그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던 유월절 절기를 지키자 21절 “예루살렘에 모인 이스라엘 자손이 크게 즐거워하며”라고 합니다. 큰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본문 후반부에 반복되는 말이 바로 ‘즐거움과 기쁨’입니다(21,23,25,26). 유월절에 이어 7일간 무교절을 지키면서 레위인들은 악기를 연주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29:20-36절에도 속죄제와 번제의 시작부터 끝까지 장엄한 연주와 찬양이 계속되었다고 했고 이로 인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가득했는데, 유월절 절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히스기야는 헌신한 레위인들을 위로합니다. 은혜와 감사가 충만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기쁨은 다른 어떤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예배할 때,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누립니다. 그러니 다른 것에서 기쁨을 누리려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기에 백성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절기 지키는 일을 7일간 더 연장하기로 하고 즐겁게 지킵니다. 히스기야와 방백들이 많은 제물을 백성들에게 줍니다. 그 결과 26절 “예루살렘에 큰 기쁨이 있었으니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로부터 이러한 기쁨이 예루살렘에 없었더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누리지 못했던 기쁨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이런 기쁨을 누린 사람들이 25절은 남유다 백성들만이 아닌 남과 북의 모든 백성들, 특히 나그네들까지 하나되어 기쁨을 누리며 즐거워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장벽이 무너지고 하나됨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도 성결함이 중요합니다. 먼저 우리 안에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또한 진정한 기쁨을 우리가 하나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할 때 주어지는 것임을 기억하며 회복합시다.
2025.10.21 | 매일성경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1절)
히스기야는 성전을 성결케 한 후 감격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유월절 절기를 지키려 합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1절 “히스기야가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사람을 보내고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편지를 보내어”입니다. 남유다 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에도 편지를 보냅니다. 오늘 본문에 ‘온 이스라엘’이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1,5,6). 특히 5절은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온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는 우리나라로 표현한다면 ‘백두에서 한라까지’라는 말과 같습니다. 통일왕국시대의 끝과 끝을 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히스기야는 남유다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을 포함한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회복하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유일한 소망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를 위해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를 원하는데 그 장소가 1절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에 와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신앙은 성전 중심의 신앙입니다. 최소 일 년 세 차례 중요한 절기 때는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여 지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겁니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의 통치가 시작되자마자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막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 숭배하였습니다. 남유다 역시 성전이 있었지만 절기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회복하려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원래 유월절 날짜는 첫째 달 14일입니다(출12장). 그런데 3절 “이는 성결하게 한 제사장들이 부족하고 백성도 예루살렘에 모이지 못하였으므로” 29:34절에 이어 제사장들의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성결한 제사장들이 부족하였습니다. 또한 온 이스라엘에서 모여야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립니다.
이 문제를 2절 “왕이 방백들과 예루살렘 온 회중과 더불어 의논하고 둘째 달에 유월절을 지키려 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왕과 회중이 의논에서 결정합니다. 한 달을 연기하여 둘째 달에 지키기로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결정에는 민수기 9장의 말씀이 기준이 되었습니다. 백성 중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게 되어 유월절을 지킬 수 없다면 한 달 뒤인 2월 14일에 지키라고 모세가 명령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말씀의 기준을 따라 모든 일을 진행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6절)
이렇게 해서 온 이스라엘에 유월절을 지키라는 왕의 명령이 공포가 됩니다. 6-9절까지는 전달된 편지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반복되는 단어가 “돌아오라”입니다(6,8,9). 6절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중으로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래야 소망이 있습니다. 역사를 보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왕들 중 하나님 없이도 부강한 나라를 이룬 왕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없는 부강은 잠깐입니다.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비록 연약하다 할지라도 하나님 중심의 나라를 이룰 때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함께 하십니다. 점점 형통케 하십니다.
그래서 6절 하반절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하면 그가 너희 남은 자 곧 앗수르 왕의 손에서 벗어난 자에게로 돌아오시리라” 앗수르 왕의 손에서 벗어난 남은 자를 이야기하는데, 이를 통해 보면 남유다 히스기야 왕 때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악을 행하더니 결국 멸망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이 히스가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의 신앙회복에 대한 강한 열망을 일으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7절 “너희 조상들과 너희 형제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멸망하도록 버려 두신 것을 너희가 똑똑히 보는 바니라”고 합니다. 북이스라엘의 길을 걸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이 회복되는 유일한 길 역시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포로된 자들도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9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신지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결과로 멸망을 주셨지만 회개하고 돌아오면 다시 은혜를 베푸시고 회복시키십니다. 이스라엘이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고 시작해야 하는데, 그 출발점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보발꾼들이 북이스라엘 곳곳을 다니며 하나님께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월절을 지키라는 왕의 명령을 전달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나라가 멸망 당한 상황에서 그것이 무슨 해결책이 되겠느냐고 조롱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경제, 아니면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하지 하나님께 돌아가, 그것도 예루살렘으로 가서 절기를 지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반문합니다. 하지만 이 소식에 반응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1절 “몇 사람이 스스로 겸손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이르렀고” 감격적인 일입니다. 비록 소수이지만 이때에 비로소 남과 북이 하나되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유다 사람들을 감동시키셨습니다. 한마음으로 유월절을 지키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을 잘 지키는 것이 형통함의 길입니다. 무엇보다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우리 삶에 문제가 있을 때, 혹은 침체를 경험할 때 다시 시작해야 할 자리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우리가 할 수 없는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2025.10.20 | 매일성경
●“나라와 성소와 유다를 위하여 속죄제물로 삼고”(21절)
히스기야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닫혔던 성전 문을 열고 우상으로 더럽혀진 성전을 성결하게 하였습니다. 그 일이 마무리되자 이제는 성결케 된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또한 25절부터는 악기를 불고 찬양합니다. 즉 히스기야는 성전을 청소하고 성결하게 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성전을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찬양으로 가득 채웁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성전을 무엇으로 채우고 있습니까? 우상이나 더러운 것들로 채워서는 안 됩니다. 성결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면 안 되고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찬양으로, 말씀과 기도로 채워야 합니다.
히스기야가 가장 먼저 드린 제사는 속죄제입니다. 수송아지와 숫양, 어린 양과 숫 염소 각 일곱 마리씩 끌어와 나라와 성소와 유다를 위해 속죄 제물로 삼아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바로 ‘죄’입니다.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히스기야는 이 일을 21절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을 명령”합니다. 웃시야 왕처럼 자신이 주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들에게 맡깁니다. 이들은 제물을 잡아 그 피를 제단에 뿌립니다. 죄로 오염되어 있는 것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숫염소는 왕과 회중 앞으로 끌고 와 안수합니다. 자신들의 죄를 숫염소에게 전가하는 행동입니다. 그렇게 백성들의 죄를 짊어진 숫염소가 제물되어 희생됨으로 백성들의 죄가 사해집니다.
우리가 누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 죄의 짐을 우리 각자가 지고 징벌을 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죄로 인한 우리의 죽음을 대신 죽어주신 것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생명과 자유를 누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가장 귀한 복,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고, 살 수 없는 복은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평생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어 히스기야는 레위 사람들을 성전에 두고 악기를 연주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25절 “다윗과 왕의 선견자 갓과 선지자 나단이 명령한 대로” 진행합니다. 25절 하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선지자들로 이렇게 명령하셨음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명령하시고, 선지자들이 다윗에게 명령해서 레위인들을 중심으로 한 찬양단이 조직이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앞선다고 자신의 마음대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모든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35절 하 “이와 같이 여호와의 전에서 섬기는 일이 순서대로 갖추어지니라”고 합니다. 열정이 클수록, 받은 은혜와 감격이 넘칠수록 말씀을 기준으로, 질서에 따라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이렇게 다시 조직된 악기 연주자와 찬양하는 자들이 하나되어 찬양합니다. 이것이 27절 “번제 드리기를 시작”하면서부터 해서 28절 “번제를 마치기까지” 계속됩니다. 이 광경을 상상해보면 닫혔던 성전 문이 열리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회복됩니다. 그 가운데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은혜와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29절 “제사 드리기를 마치매 왕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다 엎드려 경배하니라” 제사는 마쳤지만 하나님을 엎드려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시 30절은 “ 그들이 즐거움으로 찬송하고 몸을 굽혀 예배하니라”고 합니다.
이 예배의 은혜와 감격이 이 시대에도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의 성전을 예배와 찬양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찬양도 전심으로 올려드려야 합니다. 이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엎드려 경배해야 합니다.
●“회중이 제물과 감사제물을 가져오되”(31절)
히스기야는 여기서 끝내지 않고 백성들에게 31절 “마땅히 나아와 제물과 감사제물을 여호와의 전으로 가져오라”고 합니다. 감사제물을 드리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통해 회복의 은혜를 받았다면 받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드리라는 겁니다. 그랬더니 백성들 가운데 “마음에 원하는 자”들이 자원해서 제물을 가져옵니다. 가져온 제물은 번제물과 화목제물인데요, 번제물보다 화목제물의 숫자가 많습니다. 33절 “또 구별하여 드린 소가 육백 마리요 양이 삼천 마리라” 이는 백성들의 감사가 넘쳤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많은 제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합니다. 짐승을 잡아 가죽을 벗기는 제사장이 부족합니다. 예배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할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자칫 기쁨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레위 사람들이 나서서 부족한 부분을 채웁니다. 또한 다른 제사장들이 성결하게 하기까기 기다려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34절 하 “이는 레위 사람들의 성결하게 함이 제사장들보다 성심이 있었음이라”
역대기 저자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레위인들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어쩌면 포로에서 돌아온 역대기 독자들에게도 레위인들이 중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들이 예배를 회복하는 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레위인들은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도하는 일을 해야 하기에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레위인들이 사명을 잘 감당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이스라엘 신앙의 성패가 좌우됩니다.
이들은 큰 문제가 발생하였지만 지적하거나 다툼으로 이어지지 않고 부족함을 채워주고 기다려주는 성숙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많은 공동체가 작은 문제가 큰 문제로 이어져 어려움을 당합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의 크기가 아니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입니다. 부족을 채우며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36절 “이 일이 갑자기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백성을 위하여 예비하셨으므로 히스기야가 백성과 더불어 기뻐하였더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모두가 기쁨으로 마무리됩니다.
우리가 성전입니다. 성결하게 하고 다른 헛된 것으로 채우지 말고 예배와 찬양, 그리고 말씀과 기도로 풍성히 채워야 하겠습니다. 또한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은혜에 반응해서 기쁨과 자원함으로 드리는 삶이 더 복된 삶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물질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며, 몸을 드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이 됩시다.
2025.10.17 | 매일성경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2절)
웃시야에 이어 요담이 25세에 왕이 되어 16년을 통치합니다. 요담에 대한 평가는 2절입니다.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더라” 웃시야의 전반기 통치처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버지 웃시야가 하나님의 기준을 어기고 함부로 분향하려 하다 나병이 걸려 격리된 삶을 지켜보았던 요담은 성전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성전을 두려워해서 출입을 하지 않았고 그것 때문에 백성들이 부패했다고 보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성전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성전 안에서의 봉사는 제사장의 역할이기에 제사장에게 맡기고 아버지처럼 정해진 기준을 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는 겁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부패는 열왕기를 보면 요담이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여전히 산당에서의 우상숭배가 진행되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두 번째 견해가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요담은 계속해서 바른 길을 걸은 왕으로 소개되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형통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요담의 업적 가운데 건축이 반복됩니다(3-4절).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는 요담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5절은 “암몬 자손의 왕과 더불어 싸워 그들을 이겼더니” 그 결과 암몬이 여러 해 조공을 바칩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암몬은 26:8절에서 이미 웃시야에게 조공을 바쳤다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웃시야가 교만해서 나병에 걸린 사이 암몬이 유다의 손에서 벗어났고 요담이 다시 승리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요담의 삶을 6절 “요담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고 합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바른 길을 걸었더니 하나님께서 점점 강하게 하셨습니다. 28장에 나오는 요담의 아들인 아하스는 스스로 강하고 부요하기 위해 우상을 숭배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점점 약해지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강해지려고 우상숭배하거나 내가 앞서지 않고 먼저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걸을 때 하나님은 우리로 점점 강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걸어야 할 바른 길은 본문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행히 요담은 앞선 왕들처럼 통치 후반에 변질되지 않고 바른 길을 걷습니다. 요담은 다윗 성에 장사됩니다. 16년의 통치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바른 삶을 살았습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보다 어떻게 살았느냐가 훨씬 중요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내 말을 듣고”(28:11절)
이어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됩니다. 그는 아버지와 다른 길을 걷습니다. 2절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본받아야 할 아버지는 본받지 않고 본받지 말아야 할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따라 바알을 만들어 섬깁니다. 그만큼 강하고 부하려는 욕망이 컸음을 알게 됩니다. 심지어 힌놈의 골짜기에서 자녀들을 불살라 제물로 드리는 일까지 행합니다. 몰렉이라는 우상을 숭배한 것입니다. 온 나라 곳곳에 우상숭배가 만연하도록 했습니다.
5절의 시작은 “그러므로”입니다. 27:6절은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로 했는데, 아하스는 악한 길을 걸으므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갑니다. 5절 “여호와께서 그를 아람 왕의 손에 넘기시매” 하나님이 이방인의 손에 넘기십니다. 많은 백성이 포로로 끌려갑니다. 또한 이스라엘 왕 베가의 손에 넘기십니다. 아이러니 한 것이 이스라엘 왕들의 우상을 섬겼는데(2절) 이스라엘 왕에게 공격을 받습니다. 이 전쟁으로 하루 아침에 군사 12만 명이 죽고 유력한 지도자들도 죽습니다. 또한 20만 명의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사마리아로 향합니다. 이들을 노예로 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북이스라엘에 오뎃이라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돌아오는 군대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의 잘못 때문에 깨닫게 하시려고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는데, 과거 동족이었던 백성들을 노예로 삼기 위해 포로로 끌고 오는 일은 잘못된 일이라는 겁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했으니 사로잡은 유다 포로들을 놓아주라고 합니다.
우상숭배가 만연하고 하나님을 외면한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는 오뎃 선지자, 승리한 군사들에게 전리품을 포기하라는 것은 위험한 선포인데 오뎃은 하나님의 뜻은 담대히 선포합니다. 놀라운 것은 북이스라엘 군사들이 선지자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남유다 요아스 왕 때 하나님께서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통해서 요아스의 우상숭배 잘못을 지적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때 요아스는 하나님의 사람인 스가랴를 죽입니다(24:20-22절). 또한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도 전쟁 승리 후 우상 숭배할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 돌아오라고 할 때 입을 다물라며 위협했습니다(25:15-16절). 그런데 놀랍게도 북이스라엘 군사들은 오뎃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이를 통해 역대기 저자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임을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북이스라엘 군사들은 15절 “이 위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이 일어나서 포로를 맞고 노략하여 온 것 중에서 옷을 가져다가 벗은 자들에게 입히며 신을 신기며 먹이고 마시게 하며 기름을 바르고 그 약한 자들은 모두 나귀에 태워 데리고 종려나무 성 여리고에 이르러 그의 형제에게 돌려준 후에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고 합니다. 포로들은 선대하고 돌려보냅니다.
매 순간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걷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점점 강하고 형통하게 하십니다. 우리 삶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만 갈망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 됩시다.
2025.10.16 | 매일성경
●“웃시야가 …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4절)
아마샤에 이어 웃시야가 왕이 됩니다. 아버지 아마샤가 반역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기에 웃시야는 어린 나이인 16세에 왕이 됩니다. 그리고 52년간을 통치합니다. 웃시야에 대한 이야기는 왕하14:21-22절과 15:1-7절에 짧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에는 웃시야의 이름이 ‘아샤라’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17절에 등장하는 제사장의 이름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역대기는 웃시야라고 부릅니다.
웃시야에 대한 평가는 4절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입니다. 이 평가는 전체적인 평가가 아닌 아마샤와 웃시야의 통치 초반에 대한 평가입니다. 아마샤도 신실하게 시작했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후 우상을 숭배하고 선지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웃시야 역시 아버지의 길을 걷습니다.
웃시야가 정직하게 행한 이유를 5절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아는 스가랴가 웃시야 곁에서 말씀으로 지도했습니다. 이때 웃시야는 하나님을 찾았고 그런 웃시야를 하나님은 형통케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내용이 24:2절에도 나왔습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 웃시야의 할아버지인 요아스 왕 때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동안에 요아스가 정직하게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여호야다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요아스가 변질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실제로 여호야다 죽은 후 요아스는 급속하게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합니다. 웃시야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 두 사람의 실패를 보면서 말씀을 밝히 아는 신실한 사람의 지도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찾는 일입니다. 우리가 매일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닌 스스로 말씀 붙들고 순종하는 삶으로 성숙하기 위함입니다.
웃시야가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형통함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6-15절까지가 그 내용입니다. 먼저 유다의 지경을 넓혀주십니다. 서쪽으로는 블레셋을 점령하고 성읍을 건축합니다. 남쪽으로도 마온 사람들을 치게 하십니다. 동쪽으로는 암몬 사람들이 조공을 바칩니다. 뿐만 아니라 웃시야는 아마샤때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심지어는 광야에 망대와 물웅덩이를 만들고 고원과 평지에 가축을 기릅니다. 산과 밭에 농부와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을 둡니다. 나라가 심히 부강했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져서 곳곳에 새로운 성읍을 만들고 거주합니다. 풍성하고 강성한 삶입니다.
군사력도 대단합니다. 큰 용사인 족장들을 중심으로 건장하고 싸움에 능한 군사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15절은 “사람들에게 무기를 고안하게”합니다. 새로운 무기를 연구하고 만들어 나라를 견고하게 세웁니다.
이렇게 보면 웃시야 시대 부강함이 솔로몬 시대와 같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런 형통함이 웃시야의 능력이 아닌 7절 “하나님이 그를 도우사”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웃시야를 하나님께서 도우셨습니다. 8절 “웃시야가 매우 강성하여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더라”, 15절 하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으로 형통함과 강성함을 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25:8절 “하나님은 능히 돕기도 하시고 능히 패하게도 하시나이다”는 말씀처럼 아마샤도 군사력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할 때 능히 도우셨는데, 웃시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16절)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강성함이 웃시야에게 문제가 됩니다. 16절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계속해서 잘 될 때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까지 반복됩니다. 어쩌면 이것이 모든 사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형통과 강성함이 교만을 가져오고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그렇다면 형통함을 구하기 전에 하나님이 주신 형통과 강성함을 겸손하게 유지할 수 있는 믿음의 준비가 더 중요합니다.
웃시야는 제사장만이 하도록 되어 있는 향단에 분향하는 일을 하려 합니다. 왕으로서 모든 것을 가지고 누리는데 제사장이 하는 일만 금지되어 있으니 그 일까지 행하려 한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진짜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며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준을 넘어 자신의 마음대로 행동하려 합니다. 심각한 죄악입니다. 그래서 제사장 아사랴가 80명의 용맹한 제사장을 데리고 들어가 막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합니다. 18절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이 내용이 역대기 저자가 당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내용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 제사를 회복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을 무시하고 사람들의 욕심과 편리를 따라 행한다면 하나님 앞에 죄악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정하신 선을 잘 지키는 것이 복된 삶입니다.
아사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분향을 강행하려 하다 웃시야는 화를 냅니다. 그러자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깁니다. 나병은 부정한 질병으로 성전에 머물 수 없습니다. 자동적으로 성전에서 쫓겨납니다. 뿐만 아니라 21절 “나병환자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져 별궁에 살았으므로” 죽을 때까지 성전에서 끊어진 삶을 삽니다. 그리고 왕의 묘실에 묻히지 못하고 조상들의 땅에 묻힙니다. 웃시야의 삶과 죽음이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교만의 결과가 무섭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형통함을 주십니다. 그러나 형통함은 교만으로 이어져 재앙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형통함과 강성함 이전에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신실한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