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30 | 매일성경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22절)
오늘 본문은 안타깝게도 요시야 왕의 죽음에 관한 내용입니다. 8세에 왕이 되어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특히 하나님 중심, 성전 중심의 회복을 이루었습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진노 앞에 놓은 유다에 유일한 소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요시야의 업적을 20절은 한마디로 “요시야가 성전을 정돈하기를 마친 후”라고 합니다. 이처럼 내적으로는 회복과 안정을 누리고 있는데 외부의 상황이 혼란스럽습니다.
당시 국제정세를 간단히 정리하면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앗수르는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 직전입니다. 바벨론이 신흥 강대국으로 강력하게 부상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애굽이 위기를 느낍니다. 위기에 처한 앗수르와 바벨론을 견제하려는 애굽이 함께 갈그미스에서 바벨론을 상대로 전쟁을 하려 합니다. 그런데 애굽이 갈그미스로 가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땅인 므깃도를 지나야 합니다.
그런데 요시야는 앗수르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히스기야 왕 때 남유다를 공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군대가 지나가는 길을 군대를 이끌고 가서 막아섭니다. 그러자 애굽 왕 느고가 사신을 보내 상황을 설명합니다. 21절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내가 오늘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와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쉽게 설명하면 애굽은 이스라엘을 공격할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바벨론을 상대하기 위해 지나가는 과정이니 싸움을 걸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왕인 애굽 왕의 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일까요?
그런데 22절에서 역대기 저자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즉 애굽 왕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온 세상의 통치자시며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과 여러 환경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11월에 묵상할 에스라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왕인 고레스를 감동시켜셔서 포로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국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이 과정을 설명하는 고레스 왕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는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의 왕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제국의 왕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요시야에게도 애굽 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시야는 자신의 뜻, 결정이 있지만 내려놓고 하나님께 물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하나님께서 알려주셨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묻지 않고, 애굽 왕의 말을 무시하고 전쟁터에 나갑니다. 결국 죽임을 당합니다.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를 슬퍼하고”(24절)
그런데 본문은 요시야가 전쟁에 나가 죽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먼저 22절 “오히려 변장하고” 전쟁터에 나갑니다. 그런데 23절 “활 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이로 인해 23절 “내가 중상을 입었으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우리가 앞에서 묵상했던 한 왕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바로 아합입니다. 18장에서 북이스라엘 왕 아합은 남유다 여호사밧과 함께 아람과의 전쟁에 참가합니다. 아합은 변장을 했는데 한 병사가 무심코 쏜 화살이 아합의 갑옷 솔기에 꽂힙니다. 그렇게 부상을 당하고 결국 죽게 됩니다.
저자는 이런 설명을 통해 경건한 요시야 왕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 이런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요시야의 죽음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요시야가 죽은 후 남유다는 급속도로 혼란을 겪다가 결국 멸망합니다. 이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신실했던 요시야의 한 번의 불순종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 비극입니다.
이어 본문은 요시야의 죽음을 길게 평가합니다. 반복되는 단어가 “슬픔”(24,25)과 “애가”(25)입니다. 한마디로 깊은 슬픔입니다.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슬퍼합니다. 이런 설명은 요시야의 신실했던 삶에 대한 반증입니다. 므낫세와 같이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가득한 사람이 55년을 통치했는데, 요시야는 한번의 불순종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 인생의 아이러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래 살고 짧게 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을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요시야의 생애 전반에 대한 평가는 26절 “여호와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행한 모든 선한 일”이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말씀따라 신실하게 산 사람”입니다. 요시야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과 사람들의 평가입니다.
인생의 끝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어야 할까요? 또한 사람들은 우리 삶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요시야처럼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 붙잡고 살아간 인생으로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해서 모두를 사랑한 사람으로 남는다면 복된 인생입니다.
2025.10.29 | 매일성경
●“요시야가 예루살렘에서 여호와께 유월절을 지켜”(1절)
성전 수리 과정에서 율법책을 발견한 후 하나님의 뜻을 묻고, 모든 백성들과 더불어 하나님과 언약을 새롭게 한 요시야는 이제 유월절을 지킵니다. 그 날짜를 1절 “첫째 달 열넷째 날에 유월절 어린 양을 잡으니라”고 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절기를 지켰습니다. 히스기야도 유월절을 지켰지만 그때는 준비가 부족해서 한 달을 연기해서 2월14일에 지켜야 했습니다. 요시야는 절기는 지키는데 제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세워 임무를 부여합니다. 특히 2절은 “왕이 제사장들에게 그들의 직분을 맡기고 격려”하였습니다. 여기 ‘격려’(하다크)는 강하게 하고 용기를 북돋아 준 것입니다. 이처럼 요시야는 격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역대기 다른 부분과 같이 레위인들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3절에서는 레위인의 정체성을 “또 여호와 앞에 구별되어서 온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이라고 합니다. 다른 지파들과 달리 구별된 자들입니다. 또한 백성들을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왜 이런 임무가 주어졌는지를 설명합니다. 과거 성막 시대에는 성막과 성전 기물을 옮기는 일이 레위인들 담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성전이 세워지고 더 이상 움직이는 일이 없어졌기에 이제는 각 지파들이 살고 지역으로 레위인들이 흩어져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는 죄악을 저지른 것은 레위인들이 사명을 잘 감당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백성들도 레위인을 잘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레위인과 백성들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시야는 레위인들을 준비시키면서 4절 “다윗의 글과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글을 준행”하라고 합니다. 다윗과 솔로몬이 성전에서의 레위인들의 직무를 정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은 유월절을 지키는 과정에서도 6절 하“모세를 통하여 전하신 말씀을 따라”, 12절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13절 “규례대로”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과 그 기준 안에서 역사적으로 구체화된 기준을 따라서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세상의 경험이나, 실용적인 방식을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가 역사적으로 행해왔던 내용들을 통해서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레위인들에게 강조되는 것은 4절 하 “스스로 준비하고”, 6절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입니다. 자발적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가장 중요한 사람, 즉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준비되었습니다.
●“레위 사람들이 그들을 위하여 준비하였음이더라”(15절)
그렇다면 이제는 제물이 필요합니다. 출애굽기에는 유월절 양을 가정별로 준비해서 잡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먼저 요시야 왕이 헌신합니다. 양과 염소 30,000마리입니다. 수소는 3,000마리입니다. 대단히 많은 제물입니다. 이어서 방백들도 그리고 제사장들도, 레위 사람의 우두머리들도 제물을 드립니다. 드려진 제물의 양이 히스기야 때보다 2배 정도 많은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헌신은 말이 아닌 실제적은 드림으로 이루어집니다. 또한 드림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회복에 대한 열정만큼 드리게 됩니다. 먼저 베푸신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드려진 제물로 유월절이 시작됩니다. 제사장들은 11절 “유월절 양을 잡으니 제사장들은 그들의 손에서 피를 받아 뿌리고”, 레위인들은 “잡은 짐승의 가죽을 벗기고” 이렇게 각각 맡은 직무를 감당하며 질서있고 순조롭게 유월절이 진행됩니다.
그 가운데 본문은 레위인들의 헌신을 세 가지로 강조합니다. 첫 번째는 모든 백성을 위한 헌신입니다. 12절 “그 번제물을 옮겨 족속의 서열대로 모든 백성에게 나누어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백성들이 드리는 일을 돕습니다. 또한 규례대로 유월절 양을 먹도록하기 위해 솥과 가마와 냄비에 삶아서 백성들에게 분배합니다. 드려진 많은 제물을 잡고 삶고 분배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두 번째는, 제사장들과 레위인 자신들을 위해서도 준비합니다. 왜냐하면 14절 “그 후에 자기와 제사장들을 위하여 준비하니 이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번제와 기름을 저녁까지 드리므로 레위 사람들이 자기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을 위하여 준비함이더라” 백성들을 위해 계속 제물을 드려 제사를 집례해야 했기 때문에 제사장들이 자신들을 위해 준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이 준비해줍니다.
세 번째는,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을 위해서도 준비합니다. 유월절이 진행되는 동안 악기를 연주하고 찬양하는 자리를 지켜야 하고, 문지기들 역시 그 자리를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15절 하 “이는 그의 형제 레위 사람들이 그들을 위하여 준비하였음이더라” 이처럼 레위인들의 수고와 헌신, 섬김, 다른 이들의 부족을 채워주는 과정을 통해 유월절 절기가 아름답게 진행됩니다. 규례를 따라 유월절을 지키고 이어 7일간 무교절도 지켰습니다.
그 결과 이전에 온전하게 지켜지지 못했던 유월절이 요시야 왕 때에 지켜졌습니다. 18절 “이스라엘 모든 왕들도 요시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인 온 유다와 이스라엘 무리와 예루살렘 주민과 함께 지킨 것처럼은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였더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요시야는 그 동안의 전례에 비하면 이 정도면 괜찮겠지가 아니라 온전한 회복을 위해 힘을 썼습니다.
우리 신앙에도 이런 모습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기준으로 통해 우리 신앙을 날마다 새롭게 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함으로 회복하는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025.10.28 | 매일성경
●“모세가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고”(14절)
요시야 왕의 명령으로 성전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율법책이 발견됩니다. 이 율법책은 구약성경 일부가 기록된 두루마리였을 것입니다. 율법책이 숨겨져 있었던 이유는 이전 왕들인 므낫세와 아몬이 극심한 우상숭배를 하였고 하나님의 성전도 더럽히며 우상을 세웠기에 만약 율법책이 있었다면 훼손될 우려가 있어 누군가가 숨겨둔 것으로 보입니다.
율법책을 제사장인 힐기야가 발견하고 서기관 사반에게 전달합니다. 그리고 사반은 율법책을 들고 왕에게 나아갑니다. 서기관 사반은 먼저 성전 수리 과정이 잘 이루어졌음을 설명합니다. 수리에 필요한 비용도 감독과 일군들에게 잘 전달되었습니다. 그런 후 발견한 율법책을 요시야 왕 앞에서 읽습니다. 왕은 말씀을 듣고 자기 옷을 찢습니다. 옷을 찢는다는 것은 애통의 표시입니다. 요시야가 이런 반응을 보인 이유는 들은 말씀의 내용 때문입니다. 21절 “우리 조상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쏟으신 진노가 크도다” 그 책에는 불순종한 백성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요사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하나님 중심으로 신앙 개혁을 위해 힘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의 기준으로 돌아보니 지금 남유다의 상태가 심각합니다. 그동안 행했던 일들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한 상태입니다. 안일하게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래서 옷을 찢으며 애통해 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발견한 율법책을 읽고, 들으며 애통함이 회복의 출발점입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여러 가지 상상을 해봅니다. 만약 성전을 수리하지 않아서 율법책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누군가 발견했음에도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버리거나 방치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발견한 율법책을 읽거나 듣지 않았다면, 그리고 들었음에도 반응하지 않고 흘려 듣거나 외면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양한 생각을 해봅니다. 감사한 것은 말씀의 소중함을 아는 자들에 의해 발견되고 왕에게까지 전달되었다는 겁니다. 또한 요시야 왕도 말씀을 듣고 바르게 반응하므로 그동안 무너졌던 신앙이 더 바르고 빠르게 회복됩니다.
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힐기야를 중심으로 대표단 5명을 세웁니다. 21절 “너희는 가서 나와 및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은 자들을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고 합니다. 더 바르고 깊이 있게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생각하게 됩니다. 본문은 이런 과정으로 이어집니다. 먼저 말씀을 발견하고, 다음으로 읽고 듣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뜻을 묻습니다. 우리에게는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인 66권의 성경이 이미 주어져있습니다.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우리가 읽고, 듣고, 묵상하지 않는다면 숨겨진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열어야 합니다. 묵상해야 합니다.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깊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공부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반응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풍성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31절)
대표단이 찾은 사람은 여선지자 훌다입니다. 본문은 훌다를 자세히 소개합니다. 22절 “그는 하스라의 손자 독핫의 아들로서 예복을 관리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살았더라” 훌다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안타깝게도 재앙과 저주에 대한 말씀입니다. 24절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 앞에서 읽은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하리니” 여기서 우리는 발견된 책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는데 재앙과 저주가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발견된 율법책은 구약 신명기의 일부였을 것이며, 특히 신28:15-67절의 불순종의 결과들이 기록된 내용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에는 저주의 말씀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먼저 1-14절까지 말씀 순종에 대한 축복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저주가 아닌 복을 원합니다. 그런데 복은 원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통해 옵니다. 순종의 결과가 은혜와 복입니다. 반명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와 재앙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복이 아닌 저주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은 요시야 왕의 미래에 대해서도 알려주십니다. 요시야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묻고 옷을 찢으며 애통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내리실 재앙을 보지 않고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요시야 이후에 이런 재앙이 임할 것이라 하십니다.
율법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요시야는 모든 장로들을 비롯하여 모든 백성들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 30절 하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려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들려 줍니다. 이후 언약을 세웁니다. 29-33절까지 반복되는 단어가 ‘언약’입니다(30,31,32). 그리고 31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 이제 회복과 생명의 길은 오직 마음을 다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역시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겸손하게 마음을 찢으며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의 길로 나아갑시다. 하나님의 언약백성다운 삶을 살아갑시다.
2025.10.24 | 매일성경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7절)
히스기야는 우상으로 물들어 무너져가던 나라를 새롭게 하였습니다. 성전을 성결케 하고 예루살렘과 유다, 그리고 북이스라엘까지 우상의 제단을 제거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지속될 수 있도록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섬기는 제도까지 완비하였습니다. 그런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은 형통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31:21절)
그런데 곧바로 위기를 만납니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점령하려 합니다. 이미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 당한 상태이고 이제 남유다까지 위협합니다. 히스기야는 먼저 백성들과 의논하고 할 수 있는 일부터 행동으로 옮깁니다. 가장 먼저 실행한 일은 3절 “성 밖의 모든 물 근원을 막고자 하매 그들이 돕더라”입니다. 물 근원을 막아서 앗수르 군대가 물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야 포위공격을 지속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고 망대를 쌓습니다. 그동안 우상숭배의 결과 이방 나라들의 공격으로 많이 훼손된 상태였습니다. 특히 “다윗 성의 밀로”를 견고하게 합니다. 밀로는 예루살렘 성의 바깥벽으로 방어벽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무기와 방패를 많이 만듭니다. 강대국 앗수르와의 싸움은 쉽지 않은 싸움입니다. 어쩌면 이미 승패가 정해진 싸움입니다. 그럼에도 히스기야는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백성들도 함께 동참합니다.
정비를 마친 히스기야는 백성들 앞에서 연설을 합니다. 외적인 준비를 했다면 이제는 내적으로 무장합니다. 7-8절입니다.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를 따르는 온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가 그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 그와 함께 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하매 백성이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말미암아 안심하니라” 핵심은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거나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해야 합니다. 외적으로 강해 보이는 대적들만 바라보지 말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라고 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도우시고 우리를 위해 싸우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 상황을 상상해보면 히스기야의 태도와 연설 속에 단호함과 확신이 있습니다. 연설을 듣는 백성들의 눈이 빛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무너졌던 하나님 신앙을 회복한 결과입니다. 히스기야가 신앙회복 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위기 속에 남유다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아마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주변 다른 나라를 의지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절망적인 현실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확신합니다.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20절)
본문은 히스기야의 연설이 끝나자 앗수르 왕 산헤립의 연설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9-19절까지 아주 길게 이어집니다. 여기에 반복되는 내용은 “모든 나라의 신들이 능히 그들의 땅을 내 손에서 건져낼 수 있었느냐”입니다(13,14,15,17). 한마디로 어떤 신도 산헤립의 손에서 그 나라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나라들이 산헤립의 공격 앞에 무너졌다는 겁니다. 그러니 히스기야의 이야기는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히스기야의 말을 따르면 결국 주림과 목마름으로 죽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산헤립은 12절에서 히스기야의 신앙개혁을 비난합니다. 그동안 섬기던 산당과 우상의 제단들을 헐어버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하나님을 섬기라고 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합니다. 우상을 함께 숭배해야 잘되는데, 우상 버리고 하나님만 섬겨서 생긴 문제라는 것이지요. 결론은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자신의 손에서 유다 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조롱을 유다 방언으로 소리질러 유다 백성들이 듣게 합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무너지게 하는 행동입니다.
역대기 저자는 왜 이렇게 길게 산헤립의 반복되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이 역대기를 읽는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주변 나라들에 의해서 느끼는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은 알지만, 그럼에도 크고 강력한 세상의 공격에서 보호해주실 수도, 구원해 주실 수도 없을 것만 같은 현실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현실도 다르지 않습니다. 거대한 문제 앞에, 세상의 소리 앞에 무기력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히스기야는 이사야 선지자와 함께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이때 기도 내용이 왕하19:14-19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이 기도에 하나님은 21절 “한 천사”를 보내 앗수르 진영을 완전히 멸하십니다. 많은 천사도 필요 없습니다. 한 천사면 충분합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니 순식간입니다. 이것이 히스기야가 고백했던 것처럼 크신 하나님의 능력이며,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패배한 산헤립은 부끄러워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21절 “그의 신의 전에 들어갔을 때에 그의 몸에서 난 자들이 거기서 칼로 죽였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조롱하고 자신의 신을 의지하며 교만하더니 자식들의 반역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긴 자들의 최후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유다를 보호하십니다. 그리고 23절 하 “이 후부터 히스기야가 모든 나라의 눈에 존귀하게 되었더라”고 합니다. 31:21절에서 “형통”했던 히스기야가 이제는 모든 나라의 눈에 “존귀”하게 됩니다. 작은 나라였던 남유다가 주변 나라들이 두려워하고 부러워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위기를 믿음으로 극복했을 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형통을 넘어 존귀함을 주시기 위해 이 모든 과정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열심히 충성했는데 만나는 시련과 문제들은 우리에게 형통을 넘어 존귀함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승리합시다.
2025.10.23 | 매일성경
●“히스기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반열을 정하고”(2절)
예루살렘 성전을 성결케 한 히스기야는 남과 북이 하나 되어 유월절을 지킵니다.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아름답게 진행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자발적인 절기를 7일간 연장해서 지켰습니다. 감동의 시간이었고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절기가 끝난 후 히스기야가 행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한 번의 행사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을 따라 지속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전에서 제의를 담당하고 봉사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중요합니다. 이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며, 이들의 생계를 어떻게 책임져서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 있는지를 명령합니다.
먼저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키고 1절 “이스라엘 무리가 나가서 유다 여러 성읍에 이르러 주상들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들을 찍으며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과 므낫세 온 땅에서 산당들과 제단들을 제거하여 없애고” 지금까지는 가장 먼저 성전을 청결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준비하며 예루살렘에서 우상을 제거했습니다(30:14절). 이제는 남유다 전역과 북이스라엘까지 산당과 우상의 제단들을 제거합니다. 전국적인 정화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그동안은 이것들과 함께했고, 그것을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절기를 지키며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니 심각한 죄악임을 깨달았습니다. 절대 우상과 함께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제거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른 신앙은 계속해서 우리 안의 우상들을 제거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반열을 정하고 반열에 따라 직임을 감당하게 합니다. 이런 일들은 다윗 시대에 이루어졌는데, 그동안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지 오래되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감당해야 할 일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일과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제사는 3절 “여호와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번제 곧 아침과 저녁의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절기의 번제”입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안식일과 매월 첫 날 그리고 절기의 번제입니다. 이러한 제물들을 준비하려면 비용이 필요한데, 먼저 히스기야 왕이 자신의 재산 중에서 얼마를 드립니다. 왕이 먼저 헌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명령합니다. 4절 “또 예루살렘에 사는 백성을 명령하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몫의 음식을 주어 그들에게 여호와의 율법을 힘쓰게 하라 하니라” 이 명령을 쉽게 설명하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생계를 백성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갔을 때 12지파에게는 땅을 분배해줍니다. 그런데 레위 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못합니다. 이들은 흩어져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도록 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렇다면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계는 누가 책임지는가? 12지파가 소득의 십일조를 드려 책임지도록 한 것입니다. 이처럼 백성들과 레위인들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레위인은 백성들의 영적인 부분을 책임지고, 백성들은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계를 책임집니다. 만약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혼란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이 정하신 이런 시스템이 회복되지 않으면 언제 무너질지 모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제도를 새롭게 합니다.
왕의 명령에 백성들은 소산의 첫 열매를 드리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가져온 십일조를 쌓았는데 셋째 달에 시작해서 일곱째 달에 마쳤다고 합니다. 아마 3월 시작되는 보리 추수부터 7월에 마무리되는 과일 수확 때까지 쌓은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백성들이 기쁨으로 드렸습니다. 히스기야와 방백들은 풍성히 쌓인 더미를 보고 백성들을 축복합니다. 물질의 많음보다 거기에 담긴 백성들의 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런 백성들에게 10절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에게 복을 주셨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그 복을 백성들은 드리고, 하나님은 더 풍성한 복으로 더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 중심의 풍성하고 견고한 나라로 세워집니다. 백성들의 드림으로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부족함 없이 자신들의 직임을 감당합니다. 모든 것이 온전케 회복됩니다.
●“직무를 맡은 레위 사람들에게 나눠 주며”(17절)
그런데 많은 물질은 자칫 문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방들을 준비하게 하고 드려진 예물을 잘 보관하게 합니다. 그리고 책임자를 세워 잘 전달되도록 합니다. 12절 “ 레위 사람 고나냐가 그 일의 책임자가 되고 그의 아우 시므이는 부책임자가 되며” 책임자와 부책임자까지 임명하고, 거기에 직접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을 둡니다. 그리고 정해진 기준을 따라 모든 레위인들에게 빠짐없이 제대로 전달되게 합니다. 그래서 반복되는 말이 “나눠 주며”입니다(14,15,16,17,18,19). 이처럼 하나님의 일은 겉으로 보여지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잘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은 히스기야에 대한 평가입니다. 20절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라고 합니다. 히스기야의 기준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눈 앞에서 살았습니다. 선과 정의, 진실함의 삶이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 히스기야에 왕위에 올랐을 때 아버지 아하스에 의해 온 나라는 우상 천지였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 역시 오랜 우상숭배로 멸망 직전이었습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 중심의 신앙 회복을 꿈꿉니다. 그것도 남유다만이 아닌 북이스라엘까지 하나되는 회복입니다. 문제와 장애물이 있었고, 조롱하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회복을 이루고 제도를 정비합니다. 그런 히스기야를 하나님은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역대기의 독자들에게 무너진 예배와 제도를 어떻게 다시 세워야하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또한 이 시대 우리 역시 수고와 헌신, 드림으로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현실이 어렵지만, 히스기야처럼 절망 속에서도 회복의 소망을 꿈꾸며,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삶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