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13 | 매일성경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2절)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후 몇 개월이 지난 시점에 발생한 문제가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몇 사람의 지도자들이 에스라를 찾아와 1차 귀환했던 백성들 사이 만연하고 있는 죄악에 대해 고발합니다. 1절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2절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고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루살렘 주변에 머물고 있던 이방인들과 통혼하며 섞이는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문제의 심각성을 저자는 1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나지 않는 민족들의 이름을 통해서 설명합니다.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입니다. 중심은 가나안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에스라 당시에는 가나안 민족은 이미 사라지고 없던 때입니다. 그런데 이들 민족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과거 출애굽 후 가나안 정복 시기를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가나안땅을 정복하기 전 하나님은 여러 차례 가나안 백성들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나안 풍속을 본받게 될 것이고 결국 그 땅에서 버림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가나안 족속 진멸하지 않고 어울리다가 결국 우상을 숭배하고 나라가 멸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돌아와 회복을 향해 나가고 있는데 주변 백성들과 통혼하는 것은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민족들의 이름을 통해서 죄악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7-8절의 회개 기도에도 이런 역사를 고백합니다.
4:1-3절을 보면 1차 귀환한 후 성전을 건축할 때 앗수르에 의해 섞여버린 주변 백성들이 찾아와 성전 건축에 함께 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이때 스룹바벨과 백성들은 4:3절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과 단절하면 분명 방해와 어려움이 있을 것을 알았지만 신앙의 정체성을 지켰습니다. 그것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런데 80여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신앙이 약화되고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그 땅의 기득권 세력들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부와 권세를 누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 없이 즐기며 살아가는 이방인들과 함께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일에 지도자들이 앞장 섰다는 겁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물론이거나와 종교 지도자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떠나야 할 사람들을 떠나지 않고 섞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과 동떨어져 살게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 속에 살게 하십니다. 그런데 거룩한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과 동화되어 섞이고 세상을 따라가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아름다움과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매력을 그들에게 보여줌으로 오히려 세상이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3절)
에스라는 죄악에 관한 소식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습니다. 3-4절에 반복되는 말이 “기가 막혀 앉으니”입니다. 애통함을 표현할 때 보통은 겉옷을 찢습니다. 그런데 속옷까지 찢었다는 것은 에스라가 느낀 참담함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할 말을 잃고 기가 막혀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4절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고 합니다. 지도자들부터 백성들까지 죄악이 만연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떠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죄악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바보스러운 신실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시대 세상의 물결이 거세지만, 세상의 흐름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순종하는 성도들이 바로 이런 소수의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섞이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아갑니다. 이들이 소망입니다.
에스라의 회개 기도가 이어집니다. 5절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라고 하는데, 이어지는 내용은 범죄한 자들을 발본색원하여 엄벌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권한이 에스라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7:26절을 보면 아닥사스다 왕이 “무릇 네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혹 죽이거나 귀양 보내거나 가산을 몰수하거나 옥에 가둘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죽일 수 있는 권한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향하여 두 손을 듭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는 모습입니다. 6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자신이 저지른 죄악이 아니지만 자신의 죄악으로 느끼면서 감히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에스라는 죄에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악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살아가는데, 에스라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얼굴을 들지 못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하나님 앞에서는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있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또한 에스라는 그들의 죄악을 우리의 죄악으로 고백합니다.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에스라는 공동체의 죄악이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함께 짊어지고 해결해야 할 모두의 죄악이요 나의 죄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하는 이들은 많습니다. 한국교회를 보면서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가정에서도. 하지만 그 죄악을 나의 죄악으로 애통해하고 회개하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는 심각한데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들의 죄악이 바로 나의 죄악임을 고백하며 엎드려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회복의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2025.11.12 | 매일성경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21절)
2차 귀환자들의 여정을 잠시 살펴보면, 7:9절은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고 합니다. 1월1일에 출발해서 5월1일에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4개월의 긴 여정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1절은 “첫째 달 십이 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라고 합니다. 1월12일에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공식적인 출발은 1월1일인데, 출발을 위해 아하와 강가에 모여 3일 동안 점검하는 과정에서 레위인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사람들을 보내 레위인을 모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체된 시간이 9일 정도였고 이후 12일에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간이 예정보다 늦어진 것입니다. 빨리 출발해야 할 것 같은데 에스라는 금식을 선포합니다. 그냥 기도해도 되는데 금식하며 기도한다는 것은 생명을 걸고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안된다는 믿음으로 기도하는 겁니다. 이렇게 겸비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기도 제목은 21절 하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입니다. 가는 여정 하나님께서 평탄한 길을 주시길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사실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겁니다. 7장부터 지금까지 내용을 보면 아닥사스다 왕이 에스라를 많이 신뢰합니다. 에스라에게 많은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그렇다면 가는 길을 보호해줄 보병과 마병을 요청하면 아닥사스다는 흔쾌히 허락할 것입니다. 당시 최강대국인 페르시아 군대와 함께 간다면 감히 누가 공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에스라는 왕에게 요청하지 않고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에스라는 왕에게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22절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시며, 반대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에게는 진노를 내리시는 분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니 귀환 여정에서 무슨 문제가 발생한다면 이방 왕인 아닥사스다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든지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가는 여정의 평탄한 길은 그동안 에스라가 말한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능력을 선포하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왕에서 보병과 마병을 요청할 수 있지만 하지 않았습니다.
에스라와 백성들의 금식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실제로 31절은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고 합니다. 귀환 여정에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대적들이 있었고 심지어 길에 매복해서 기다리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이 백성들을 도우시고 보호하셨습니다. 대적들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며 오직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의 손이 우리와 함께 합니다. 급한 일일수록, 중요한 일일수록 먼저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깁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일하실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세고 달아 보고”(34절)
에스라는 페르사아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모아진 예물을 가져갈 사람들 12명을 선발하여 임무를 맡깁니다. 이 예물을 잘 지키고 운반해서 그대로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져가라고 합니다. 26절을 보면 양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예물이 25절 보면 “왕과 모사들과 방백들”이 드린 것이며, 또한 “그 곳에 있는 이스라엘 무리가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린”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왕과 신하들이지만 자신들의 나라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7:23절) 성심껏 드렸을 것입니다. 또한 페르시아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신들은 돌아가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최선으로 드렸을 것입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많은 예물이 모아졌습니다. 이것을 에스라는 28절에 “너희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요 이 그릇들도 거룩”하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니 거룩합니다. 그래서 거룩한 제사장들에게 예물을 맡깁니다. 많이 모아졌다고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져갑니다. 드려진 목적대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반복되는 단어가 “달아서”입니다(25,26,29,33,34). 최종적으로 34절 “모든 것을 다 세고 달아 보고 그 무게의 총량을 그 때에 기록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에스라는 모든 예물을 달아서 선발된 책임자들에게 전달하고, 이들은 그대로 옮겨서 예루살렘 제사장들에게 전달합니다. 모든 일들이 온전하고 정확하게 이루어집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교회가 재정을 어떻게 관리하고 사용해야 하는지를 발견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하고 바르고 투명하게 집행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용하는 사람들 역시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소중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귀환자들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또한 왕의 조서를 총독들에게 전달해서 조서 내용대로 하나님의 성전을 잘 섬기도록 합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금식하며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급할수록 중요한 일일수록 우리도 기도로 하나님께 맡깁시다.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선한 손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정직하고 투명하게 감당합시다.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하고 소중하고 신실하게 사용합시다.
2025.11.11 | 매일성경
●“나와 함께 바벨론에서 올라온 족장들과”(1절)
본문은 율법학자 겸 제사장인 에스라와 함께 2차 귀환에 오른 백성들의 명단과 숫자입니다. 소개된 가문들은 2장의 1차 귀환 가족들과 연관되어 있고, 3-14절까지 모두 12가문입니다. 이는 구약의 12지파를 상징할 수 있으며,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을 출애굽과 같은 의미로 여기고 있습니다.
1차 귀환과 2차 귀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숫자에 있습니다. 1차 귀환자 총수는 49,897명이었습니다. 그런데 2차 귀환자 숫자를 전부 더하면 1,773명입니다.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됩니다. 이미 1차 귀환 때 돌아오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1차 귀환 후 8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만큼 페르시아에 남아있던 백성들은 이방 땅에서의 삶에 정착하고 안정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소수이지만 2차 귀환을 결심한 백성들의 결단과 헌신이 귀합니다.
이들 중 13절 “아도니감 자손 중에 나중된 자의 이름은”이라고 되어 있는데 “나중된 자”는 “마지막으로 귀환 여행에 참가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즉 이 가문은 1차 귀환 때 많은 이들이 돌아갔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이번 귀환에 모두 동참하여 페르시아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모든 가문에 귀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에스라는 본격적인 귀환을 앞두고 아하와로 강가에 모여 최종 점검을 합니다. 1500km, 4개월의 긴 여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가져가야 할 것들도 많습니다. 철저하게 준비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를 발견합니다. 15절 “그 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1차 귀환 때도 제사장들의 숫자는 많은데(4,289명), 그에 비해 레위인의 숫자는 적었습니다. 노래하는 자와 문지기를 포함해서 341명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2장에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제사장들은 백성들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는 직분입니다. 하지만 레위인들은 제사장을 도와 힘든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누가 주목하지 않고 알아주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이 없어서 흩어져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생계를 백성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백성들이 십일조 등으로 섬겨주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과거 왕과 백성들이 우상숭배하며 하나님이 신앙이 온전하지 않았을 때 아마 가장 고통을 당했던 사람들이 레위인들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은 고국으로 돌아가 다시 성전 봉사와 말씀 봉사를 하기보다 이방 땅에 머물며 자신들의 손으로 수고해서 안정된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레위인들의 입장도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과거 문지기로 섬기던 레위인들은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시84:10절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그렇습니다. 아무리 풍요로운 곳에서의 천 날보다 하나님의 성전에서의 한 날이 좋다고 고백합니다. 악인의 장막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 성전의 문지기가 좋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영광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의 영광을 알았습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기에 영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지금 레위인들은 그런 의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세상의 기준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18절)
어떤 이유가 되었든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은 귀환 공동체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에스라가 앞으로 해야 할 사역이 바로 말씀으로 백성들을 새롭게 하는 사역입니다. 이 일을 도와줄 사람들이 바로 레위인들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에스라는 사람들을 선발해서 17절 “가시뱌 지방으로 보내어 그 곳 족장 잇도에게 나아가게 하고” ‘가시뱌’지방으로 보냈다는 것은 이곳이 레위인들의 집단 거주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잇도는 레위인의 지도자로 보입니다. 이들에게 부탁해서 레위인들과 성전 봉사자들을 긴급하게 모집합니다.
다행히 38명의 레위인과 220명의 느디님 사람이 모집됩니다. 귀환할 예정이 아니었음에도 귀환할 레위인이 필요하다는 소식에 귀환을 결단한 38명의 헌신이 놀랍습니다. 이들은 시편의 말씀처럼 이방 땅에서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성전에서의 수고를 기쁘게 여긴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여기 느디님 사람은 과거 이스라엘의 전쟁 포로로 성전에서 물긷는 일과 장작 패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많은 숫자가 귀환 행렬에 함께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18절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이 함께 하셨습니다. 에스라7-8장은 이처럼 “하나님의 손”을 강조합니다. 7:28절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에스라와 함께 하였습니다. 또한 7:9절도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라고 합니다. 4개월의 긴 귀환 여정을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셨습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능력의 손으로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하십니다. 때론 문제를 만나고 장애물을 만나지만 하나님의 손길로 해결해주시고 인도해주십니다.
이 하나님의 손길이 나와 항상 함께함을 기억합시다. 귀환하는 백성들처럼 우리 신앙 여정도 안주하지 않고 믿음으로 모험하며 도전하는 신앙이 됩시다. 문제를 만나지만 하나님의 지혜를 힘입어 해결해 갑시다.
2025.11.10 | 매일성경
●“에스라에게 아닥사스다 왕이 내린 조서의 초본은”(11절)
본문은 2차 귀환 과정에서 페르사아 아닥사스다왕이 에스라에게 내린 조서의 내용과, 에스라에게 주어진 권한 그리고 에스라가 이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찬양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귀환 지도자인 에스라를 소개하면서 11절 “여호와의 계명의 말씀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 학자요 학자 겸 제사장인 에스라”라고 합니다. 본문은 세 번이나 “율법 학자 겸 제사장”이라고 표현합니다(11,12,21). 지금 페르시아에서 멀리 떨어진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성전에 꼭 필요한 사람이 율법 학자 겸 제사장인 에스라입니다. 이때가 1차 포로귀환 후 80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 후로는 57년의 시간이 지난 시점입니다.
이때 예루살렘의 영적인 상황을 말라기 선지자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멸시합니다. 예배는 습관적이며 형식적이 되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십니다(말1:6-10). 그러면서도 이들은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지 못하고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냐고 하나님께 따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전 건축의 감동과 은혜가 사라졌습니다. 지금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무엇이고,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다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바르게 예배하고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그래서 율법학자 겸 제사장인 에스라를 하나님은 보내십니다.
1차 귀환 때는 성전 건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왕의 후손인 세스바살 그리고 스룹바벨을 총독으로 세워 보내셨습니다. 이제는 말씀과 예배가 필요하기에 에스라를 보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가장 필요한 사람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페르시아 왕들의 마음을 감동하십니다. 1차 귀환 때는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하셨습니다(1:1). 그리고 이제는 아닥사스다의 마음을 감동하십니다.
왕이 에스라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는 목적이 있습니다. 14절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하여 왕과 일곱 자문관의 보냄을 받았으니” 일곱 자문관은 왕이 가장 신뢰하는 정치 그룹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한 목적으로 에스라를 보냅니다. 정치적 이유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과정을 통해 예루살렘과 성전의 신앙회복을 위한 계기가 되도록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왕들의 마음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27절)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움직이시자 아닥사스다는 지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먼저 왕과 자문관들이 은금을 하나님께 드립니다(15절), 또한 바벨론 모든 지역에서 모은 은금을 가져가게 합니다. 이것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드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물입니다. 이 돈으로 제물을 사서 하나님의 성전 제단에 바치도록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을 섬기는 일을 위해 그릇을 주고, 20절은 “그 외에도 네 하나님의 성전에 쓰일 것이 있어서 네가 드리고자 하거든 무엇이든지 궁중창고에서 내다가 드릴지니라”라며 무엇이든 필요한 것은 가져가도록 허락합니다. 놀라운 제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라 이제는 이스라엘 근처의 창고지기들에게 조서를 내려 에스라가 구하는 것은 신속하게 지급하도록 합니다. 은과 밀, 포도주와 기름이며 소금은 원하는대로 공급하도록 합니다. 마지막으로 성전 봉사자들의 세금을 면제해주는 혜택도 줍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이런 명령을 내린 이유는 23절 “어찌하여 진노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임하게 하랴” 그의 생각으로는 자칫 이스라엘 백성들의 섬기는 신인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지 못하면 왕과 왕자들에게 진노가 임할 수 있다고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6:10절에서 다리오 왕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전 건축이 신속히 진행되도록 협력하라고 하면서 “왕과 왕자들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즉 페르시아 왕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아닌 많은 신들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 중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섬기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참 신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이 과정을 통해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25-26절은 에스라에게 주어진 권한입니다. 율법을 아는 법관과 재판관을 세워 재판하고, 가르치는 역할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하지 않으면 그런 자들은 죽이거나 귀양 보내거나 가산을 몰수하거나 옥에 가두는 권한을 부여합니다. 에스라의 권한이 막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자신의 통치 아래 있는 지역이 혼란스럽지 않도록 이런 권한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에스라의 찬양이 본문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스라는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일하심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많은 은총을 베푸는 왕이 아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7절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그가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두셨습니다. 감동하십니다. 그래서 에스라로 하여금 왕과 권세있는 자들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셨습니다. 28절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 하나님 손이 에스라와 함께 합니다. 힘을 얻어 귀환을 준비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에도 하나님의 손이 우리 위에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형통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힘을 얻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합시다.
2025.11.07 | 매일성경
●“한 두루마리를 찾았으니 거기에 기록하였으되”(2절)
예루살렘 성전 건축의 합법성을 묻는 총독 닷드내의 편지가 다리오 왕에게 도착합니다. 왕은 명령을 내려 문서창고를 조사하게 하였는데 한 두루마리를 찾아냅니다. 발견 장소가 메대도 악메다 궁성입니다. 당시 왕들은 여러 왕궁에서 계절마다 돌아가며 머물렀는데 악메다 왕궁은 여름 별장입니다.
발견한 두루마리에 기록된 하나님의 성전에 관한 내용에는 1장에 기록된 것에 더 추가된 내용들이 있습니다. 고레스 원년에 성전을 건축하도록 명령이 내려졌는데, 두루마리에는 성전의 규모와 건축 방식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3절 “성전의 높이는 육십 규빗으로, 너비도 육십 규빗”입니다. 이것은 솔로몬 성전보다 더 큰 규모입니다. 솔로몬 성전은 높이가 30규빗, 길이가 60규빗, 너비가 20규빗입니다. 한 규빗을 50cm로 한다면 높이는 15m, 길이는 30m, 너비는 10m입니다. 그런데 새로 지어질 성전은 높이가 30m이고 너비도 30m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지어진 스룹바벨 성전의 규모는 솔로몬 성전에 비해 작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록은 고레스 왕이 보통 신전의 규모를 따라 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건축 방식은 4절 “큰 돌 세 켜에 새 나무 한 켜를 놓으라”고 합니다. 새번역은 “벽은 돌 세 겹에 나무 한 겹씩 쌓아라”로 되어 있습니다. 두루마리에는 성전을 짓는 경비에 대한 내용도 있는데 4절 하 “그 경비는 다 왕실에서 내리라”고 합니다. 1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위해 고국으로 돌아갈 때 그곳에 거주하는 사면 사람들이 물품과 예물을 공급하라고 되어 있는데, 두루마리 내용에는 건축 비용을 왕실에서 제공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장에 기록된 것처럼 바벨론 느부갓네살이 빼앗아 온 성전 기물을 돌려주어 제자리에 있도록 명령한 것까지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총독은 건축을 멈추게 할 생각으로 사실 확인을 위한 편지를 보냈는데, 결과는 반대로 더 확실한 성전 건축의 근거와 멈추게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함을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는 걱정스런 문제였는데 오히려 문제가 하나님의 일이 더 온전케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이어집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합니다.
●“그들로 멈추지 않게 하라”(8절)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 다리오 왕은 총독 닷드내에게 답신을 보냅니다. 핵심은 성전 건축을 방해하지 말고 도우라는 겁니다. 구체적인 내용이 6절 하 “그 곳을 멀리하여”, 7절 “공사를 막지 말고 … 성전을 제자리에 건축하게 하라”고 합니다. 이처럼 멀리 떨어져 공사 방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명령은 8절 “왕의 재산 곧 유브라데 강 건너편에서 거둔 세금 중에서 그 경비를 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주어 그들로 멈추지 않게 하라”고 합니다. 나라에 바치는 세금 중 일부를 성전을 건축하는데 끊임없이 제공해서 공사가 멈추지 않게 하라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9절 “또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곧 하늘의 하나님께 드릴 번제의 수송아지와 숫양과 … 예루살렘 제사장의 요구대로 어김없이 날마다 주어”라고 하며 하나님께 예배할 때 필요한 제물을 날마다 공급하라고 명령합니다.
만약에 이런 왕의 명령을 임의로 변조해서 지키지 않는다면 그 사람도 죽게 될 것이고 그 집도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왕이나 백성들이 이 명령을 지키지 않아 성전을 파괴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하시기를 원한다라고까지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 건축에 대한 페르시아 왕의 명령이 놀랍습니다. 그런데 다리오 왕이 왜 이런 긍정적인 명령을 내렸는지 이유가 10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하늘의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을 드려 왕과 왕자들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라”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그곳에서 페르시아 왕인 자신과 왕자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나라의 안정과 번성을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다리오 왕은 다른 나라에도 이런 명령을 내렸을 수 있습니다. 그 나라 신을 섬기는 신전을 짓게하고 동일한 기도제목을 주었을 것입니다. 즉 다리오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닌 많은 신을 섬기는 다신론자입니다. 우상숭배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리오를 사용하십니다. 1장에서 고레스를 감동하신 것처럼 6장에서는 다리오를 감동하십니다. 누구도 움직일 수 없는 이방 나라의 최고 권력자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성전건축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도록 도우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며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시대 여전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시고 환경을 주관하셔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께 맡기고 문제를 통해서 더 온전케 일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는 믿음의 삶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