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6:15-7:4절/하나님께서 이 역사를(25.11.26)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15절)

​성벽 공사 마무리 단계에서 대적들의 공격이 집요했습니다. 느헤미야를 함정에 빠지게 하고 제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성벽 공사가 마무리됩니다. 그 기간이 52일이었다고 합니다. 약140년 동안 무너져있던 성벽이 단기간에 완성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을 16절 하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마음이 있지만 누구도 도전하지 않은 이 일에 대해서 느헤미야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감동하셨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보다 더 처참히 무너진 백성들의 마음을 일으켜 세워 각자 맡은 부분을 건축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완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그리고 느헤미야와 백성들이 능력의 하나님과 함께하므로 이룬 일입니다.

그러자 16절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절대 이루지 못하리라 확신했습니다.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방해하고 위협했습니다. 그런데 완공한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대적들도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알고 인정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누군가가 꿈을 꾸며 협력해서 하나님과 함께 그 일을 이룰 때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그렇게 꿈꾸는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성벽 완공의 기쁨 가운데도 여전히 문제는 있었습니다. 유다의 귀족들이 도비야라는 대적과 동맹하고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일부의 귀족들은 느헤미야와 유다의 상황을 도비야에게 알려줍니다. 한마디로 첩자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도비야가 대책을 귀족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이들의 동맹은 결혼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2:10,19절은 도비야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비야는 이방인입니다. 율법은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합니다. 우상숭배의 위험성 때문입니다.

이미 에스라서9-10장에서는 이방인과의 결혼이 심각한 문제로 등장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스9:2절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이런 죄악에 방백들과 고관들이 앞장섰습니다. 이에 에스라는 속옷과 겉옷을 찢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으로 예루살렘에 모이게 한 후 스10:11절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고 명령하였고 백성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죄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내부와 외부의 문제 중심에 귀족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와 지위를 주신 것은 느헤미야와 함께 하나님의 뜻을 감당하라고 주신 것임에도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대적들과 손을 잡고 느헤미야를 공격하고 하나님의 일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감사한 것은 이런 사람들이 있지만, 그래서 힘들었지만 연약한 많은 백성들이 하나되어 성벽 공사를 완공했다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특별한 몇 사람을 통해서가 아닌 이름 없이 헌신하는 많은 이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 집 맞은편을 지키게 하라 하였노니”(3절)

​성벽이 건축되어 마지막 과정으로 문짝을 답니다. 그리고 7:1절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하는데, 문지기, 노래하는 자들, 그리고 레위 사람들은 성전과 관련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성벽을 완성하고 세웠다는 것은 성벽 재건의 일차 목적이 성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전은 아무나 함부로 접근해서는 안되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런데 성벽이 없을 때는 성전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함부로 가까이했을 것입니다. 이제 성벽을 세워 바르게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회복의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바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바른 예배여야 함을 알게 됩니다. 또한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성벽을 세우듯 방해하는 것을 막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선순위를 예배에서 빼앗아가는 것이 있다면 막아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데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면 벽을 세워야 합니다. 지켜야 할 것들을 잘 지켜나갈 때 복된 인생이 됩니다.

성벽이 세워지므로 예루살렘 공동체가 이루어집니다. 이곳을 다스리도록 하나니와 하나냐를 세웁니다. 하나니는 1장에서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 소식을 전한 형제입니다. 하나냐를 소개하면서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뛰어난 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을 지키는 일은 3절 하 “자기 집 맞은편을 지키게 하라”고 합니다. 성벽을 건축할 때도 이런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래서 빨리 완공이 되었습니다. 지키는 것도 같은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모든 성벽을 지킬 수 없지만 각자 맡은 부분을 성실하게 지킬 때 결국 성을 온전하게 지키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어떤 일을 감당할 때 한 사람이 모든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각자가 자신이 맡은 일을 잘 감당할 때 아름답게 이루어집니다.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이나 비난 혹은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묵묵히 잘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느헤미야는 성문을 언제 열고 닫아야 할지 알려줍니다. 해가 높이 뜬 후 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해가 지기 전에 닫으라고 합니다. 어둠을 틈타 누군가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4절은 예루살렘 성읍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성읍은 크지만 주민이 적고 집도 아직 건축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 역시 또 하나의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하나님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 과정을 통해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다시 꿈꾸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느헤미야6:1-14절/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25.11.25)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2절)

​느헤미야는 공동체 내부에서 일어난 갈등을 해결하였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높은 이자를 받았던 귀족들을 꾸짖고 이자 받기를 그치게 하였습니다. 그 일에 느헤미야가 본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내부 문제가 해결되자 다시 외부에서 공격이 시작됩니다. 산발랏과 도비야 그리고 아라비아 사람 게셈입니다. 이들은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는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다 공사가 진행되자 건설 현장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이제는 공사가 진행되어 마무리 단계에 이르자 지도자인 느헤미야를 제거하고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성벽 공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입니다. 이제 성문 문짝만 달려 끝이 납니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임무를 잘 감당하였습니다. 수고의 열매가 맺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이 대적들에게는 두려운 일입니다. 느헤미야를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웁니다. 2절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 오노 평지에서 만나자고 합니다. 이곳은 유대와 사마리아 경계 지역입니다. 이들은 서로 의논하기 위해서 만나자고 그럴듯하게 포장했지만 실은 느헤미야를 해하기 위함입니다. 느헤미야의 영향력이 크기에 느헤미야만 제거하면 모든 것을 와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느헤미야는 이들의 의도를 간파합니다. 그래서 성벽 공사 마무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4번이나 사람을 보내 만나자고 제안합니다.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들의 몸부림이 대단합니다. 느헤미야가 여전히 거절하자 이제는 새로운 방법을 선택합니다.

편지를 보내는데 5절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보냅니다. 봉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안에 기록된 내용은 누구든지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소문이 퍼지도록 의도한 것입니다. 그 안에 기록된 내용은 거짓으로 가득합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건축하는 이유가 반역을 하기 위함이며, 느헤미야 자신이 왕이 되어 다스리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페르시아 왕에게 반역에 해당하는 중죄라고 편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거짓말로 느헤미야를 자극해서 기어이 만나 공격하려고 합니다.

느헤미야가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요? 고국의 어려운 형편을 듣고 자신의 편안한 자리와 보장된 미래를 내려놓고 어려움 속에서도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모함을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대로 직접 만나서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고 그들의 거짓됨을 공격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그들의 의도를 알고 있습니다. 9절 “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여기에 휘말리면 두려움 속에서 성벽 공사를 중단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들을 상대하지 않고 대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9절 하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 기도 내용을 보면 느헤미야도 인간인지라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많이 지쳐있는 듯합니다. 거기에 대적들의 거짓 소문과 살해 위협은 느헤미야를 낙심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모든 것 아시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께서 힘을 주셔서 이겨내고 감당하길 기도합니다.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14절)

​그런데 대적들의 공격이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의 측근을 뇌물로 포섭해서 함정에 빠지게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들이 지금까지 그곳에서 어떻게 힘을 유지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권모술수로 가득합니다.

느헤미야와 가깝게 지냈던 선지자 스마야가 보이지 않자 만나러 가보니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대적들이 느헤미야를 죽이러 밤에 올 것이니 피해야 한다. 가장 안전한 곳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곳으로 가서 숨어있자.”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제사장만 들어갑니다. 함부로 들어가면 율법을 어기는 일입니다. 느헤미야는 제사장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떤 이유가 되었든 성전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느헤미야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성전에 숨었다는 이야기가 백성들에게 알려진다면 지도자를 향한 신뢰가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대적들의 공격이 집요하고 교묘합니다.

사람은 죽음의 문제 앞에 서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내 생명을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대답합니다. 새번역 11절 “나 같은 사람더러 도망이나 다니란 말입니까? 나 같은 사람이 성소에 들어갔다가는 절대로 살아 나올 수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는 못합니다.” 사람들의 공격을 피하겠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에게 이런 유혹은 한 사람이 스마야만이 아니었습니다. 14절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곧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합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대적들과 하나되어 느헤미야를 두렵게 하였습니다. 이들 역시 뇌물에 매수가 되었다고 보여집니다.

느헤미야는 다시 기도합니다. 14절 하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하나님께서 해결하시고 하나님께서 갚아주시길 기도합니다.

느헤미야가 당한 일이니까 그렇지 이런 문제들이 우리 앞에 놓인다면 낙심하고 주저 앉을 것 같습니다. 자칫 사람과 싸우느라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느헤미야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웁니다. 문제의 뿌리를 잘 파악하고 지혜롭게 대처합니다.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로 맡깁니다.

느헤미야5:1-19절/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25.11.24)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1절)

​성벽 재건 공사가 진행되는데 4장에서는 외부적, 내부적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대적들이 조롱하며 비웃더니 이제는 직접 공격해서 공사를 멈추게 하겠다고 위협합니다. 그러자 백성들도 두려움 속에서 공사를 더 진행하기 힘들 것 같다고 낙심합니다. 위기의 순간에 느헤미야는 대적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당하자고 독려했습니다(4:14절). 이를 힘입어 백성들이 한 손에는 무기를 들고 한 손으로는 일을하며 성벽 공사를 진행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더 심각한 내부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문제는 자칫 어렵게 이끌어오던 성벽 재건 공사를 멈추게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를 분열과 갈등으로 몰아 넣을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처럼 삶은 문제의 연속입니다. 어떻게 해결해가느냐가 중요합니다.

백성들이 누군가를 원망하며 크게 부르짖습니다.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입니다. 이들의 원망 대상은 이방인들이 아닌 형제 유다 사람들입니다. 도대체 무슨 문제가 발생한 것일까요? 백성들은 울며 자신들의 형편을 이야기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인 먹고사는 문제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어려운 형편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핵심은 7절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라고 느헤미야가 지적합니다. 양식을 빌려주며 높은 이자를 받고 심지어는 자녀들을 종으로 삼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레25:35-36절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 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라고 합니다. 레25:39절도 “너와 함께 있는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동족 형제에게는 이자를 받지 않고, 종으로 부려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준이 지켜지지 않습니다. 이 문제의 뿌리에는 신앙의 문제, 즉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기득권 세력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누군가는 자녀가 많은데 먹을 것이 없어 양식을 빌어 먹어야 하는 처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흉년에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또는 세금을 바치기 위해 밭과 포도원과 집을 저당 잡힙니다. 자녀들을 종으로 파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해결할 힘이 이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니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나되어 공사를 감당해도 쉽지 않은데 큰 문제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요? 6절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분노를 참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7절 “깊이 생각”합니다. 흥분해서 백성들의 이야기만 듣고, 혹은 겉으로 드러난 문제만 보고 결정해서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멈춰서서 기도하며 생각합니다. 근본 원인을 찾고 해결책을 찾습니다. 느헤미야는 신중하고 지혜로운 지도자입니다.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7절)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부르짖게 한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습니다. 그리고 대회를 열고 그들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지적합니다. 이것은 위험부담이 있는 일입니다. 기득권 세력이 반기를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을 단호하게 처리합니다.

느헤미야는 이들의 잘못을 몇 가지로 지적합니다. 9절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지금도 이방인들이 조롱하고 있는데 이런 내부적인 문제로 백성들이 나누어지고 공사가 중단된다면 이방인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세상과 다름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9절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라고 합니다. 이것은 돈 문제가 아니고 신앙의 문제라는 겁니다.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행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이제 이자 받기를 그치고, 받은 이자를 돌려주자고 합니다. 그러자 감사하게도 12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보내고”라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제사장들을 불러 맹세를 하게 하고 옷자락을 털며 경고합니다. 이 말대로 행하지 않는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집과 산업 모두를 털어버리실 것이라고 합니다. 백성들은 이 경고의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큰 문제가 일단락되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자기 이득을 채운 귀족과 민장들과 다른 느헤미야의 삶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총독으로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 12년 동안 총독의 녹을 먹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전 총독들의 모습과는 완전 다른 것입니다. 총독들은 백성들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은 40세겔을 빼앗았다고 합니다. 빼앗았다는 표현을 통해서 보면 세금을 많이 거두어 일부는 바치고 나머지는 착복한 것입니다. 아랫사람들 역시 백성들을 압제하였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오히려 희생하며 섬깁니다. 백성들과 함께 먹고 나눕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15절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말씀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희생과 수고가 따르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함께 하는 형제와 지체들을 이익의 도구로 생각할 때 공동체는 위기를 맞습니다. 하나님 나라 정신을 버리고 세상의 가치관으로 욕심이 앞설 때도 그렇습니다. 느헤미야가 아름다운 본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체들을 섬김과 사랑으로 함께 해야 합니다.

느헤미야2:1-20절/하나님의 선한 손이(25.11.21)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4절)

​예루살렘의 환난과 능욕에 대한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는 기슬르월(1:1)에서 니산월(2:1)까지 4개월을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중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느헤미야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려면 왕의 허락해야 하기에 왕에게 은혜를 입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1:11절).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왕에게 포도주를 드리는데 왕이 묻습니다. 2절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느헤미야는 비록 이방 땅에서 이방 왕의 술 맡은 관원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 일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로 생각하고 기쁨으로 감당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수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기쁨으로 감당한 것이지요. 그런데 얼굴에 근심 빛이 보이니 왕이 묻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일터에서의 삶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는 그 자리에 두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내 주변에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기쁨과 감사함으로,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당시 왕 앞에서 얼굴에 근심 빛을 띠는 일은 자칫 죽음을 초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두려워하면서도 이유를 대답합니다. 3절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느헤미야의 대답은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왕을 섬기는 자가 이전에 멸망한 조국을 걱정하면서 재건을 꿈꾸고 있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왕은 놀라운 반응을 보입니다. 4절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합니다. 지금까지 성경 내용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지만 하나하나 생각해보면 사실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근심어린 얼굴에 왕이 분노대신 걱정하며 이유를 묻고, 오해가 생길 수 있는 느헤미야의 대답에 흔쾌히 도움의 손을 내밉니다. 8절 하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라는 말씀처럼 이 모든 과정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선한 손이 함께 합니다. 하나님께서 감동하셨다는 단어는 없지만 고레스를 감동하시고, 다리오를 감동하신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도 감동하셔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왕의 물음에 4절 하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왕 앞에서, 짧은 순간에도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지혜를 구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이미 그의 생각 속에는 모든 계획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지혜와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느헤미야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 세 가지를 요청합니다. 첫 번째는 5절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자신이 직접 가서 성을 재건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7절 “조서를 내게 주사 그들이 나를 용납하여 유다에 들어가기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총독들에게 조서를 내려서 가는 길을 무사히 통과하도록 요청합니다. 세 번째는 삼림 감독에게 조서를 내려 재건에 필요한 목재를 공급해주기를 요청합니다. 이 과정에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십니다. 왕이 허락합니다. 뿐만 아니라 왕은 군사를 동원해서 느헤미야가 가는 길을 보호해줍니다. 1차와 2차 귀환은 몇 명이 돌아왔는지 구체적인 숫자가 기록되어 있지만 3차 귀환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정황상 예루살렘 성벽 건축을 위해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소수의 사람이 귀환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할 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반드시 도우십니다.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18절)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느헤미야는 3일을 쉰 후 예루살렘을 돌아봅니다. 이때 12절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이미 하나님께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느헤미야에게 알려주셨습니다. 하지만 말하지 않습니다. 16절 하 “… 그 외에 일하는 자들에게 알리지 아니하다가”라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먼저 말하지 않고 신중하게 일을 진행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주신 것과 예루살렘 현장을 돌아보면서 계획을 구체화해서 시작하려 합니다. 아마 이때도 기도의 사람 느헤미야는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런 느헤미야의 모습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본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말이 앞서고, 말이 많아지다 보면 혼란과 오해가 발생합니다. 말보다는 먼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가장 합당한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드디어 때가 되자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독려합니다. 17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또한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신 일과 왕의 허락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지금까지 과정을 설명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겁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두 힘을 내어 일어나 건축하자고 합니다. 느헤미야를 통해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가 됩니다. 오랫동안 멈춰있던 일들이 새로 시작됩니다. 문제 앞에서 누구를 탓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받아들이고 기도하는 한 사람을 통해 무너졌던 곳이 다시 세워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에는 반드시 방해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과거 성전을 건축할 때도 그랬습니다. 이번에는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가 중심이 되어 방해합니다. 이들이 느헤미야와 백성들을 업신여기고 조롱하며 비웃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담대하게 이들의 방해에 대처합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일에는 반드시 방해가 있습니다. 일이 중대하면 중대할수록 방해도 거셉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사탄이 사람을 통해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문제를 만나면 올 것이 왔다는 마음으로 잘 해결해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도우십니다.

문제를 지적하고 다른 사람을 탓하고, 혹은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데 느헤미야는 자신이 짊어지고 수고와 희생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선한 손으로 도우십니다. 우리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할 곳은 어디일까요?

느헤미야1:1-11절/종의 기도를 들으소서(25.11.20)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4절)

​에스라 묵상 후 학개서를 마치고 느헤미야서를 묵상합니다. 원래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한 권의 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전체적으로 이렇게 진행됩니다. 에스라서 전반부는 1차 귀환과 성전 재건을, 후반부는 2차 귀환과 공동체 신앙 재건을, 그리고 느헤미야서는 3차 귀환과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관한 내용입니다. 즉 다시 세우는 재건에 관한 내용입니다.

느헤미야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위로하시다”입니다. 1절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라고 하면서 느헤미야의 활동 시기를 알려줍니다. 이때는 BC444년으로 에스라 2차 귀환 후 14년의 시간이 지난 시점입니다. 수산궁은 페르시아 왕들이 계절마다 돌아가며 머무는 별장으로 겨울 별장입니다. 느헤미야가 왕궁에 있는 이유는 11절 하 “왕의 술 관원”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왕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많았기에 왕의 음식과 음료를 담당하는 자들은 신임을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또한 왕의 가장 가까이에서 국정도 의논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대통령 비서실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가진 자리입니다.

유대인으로 포로 생활하던 느헤미야가 그런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성전이 무너진 때를 기준으로 한다면 지금은 약140년 정도가 흘렀습니다. 그렇다면 아마 할아버지가 포로로 끌려와서 아버지를 낳고, 느헤미야가 태어났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느헤미야는 이방 땅에서 태어나 고국 땅을 밟아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느헤미야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예루살렘의 형편과 그곳 백성들의 삶이었습니다. 마침 형제 하나니가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돌아왔기에 그곳 형편을 물어보니 3절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고 합니다. 지금 상황은 1차 귀환과 2차 귀환이 이루어졌고 이미 성전도 완공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성벽과 성문들이 허물어지고 불에 타서 예루살렘 백성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주변 기득권 세력들이 함부로 백성들을 능욕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예루살렘 형편을 들은 느헤미야는 4절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기도의 모습이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백성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반복되는 단어가 “기도”입니다. 사실 느헤미야는 현재 비록 이방 땅이지만 편안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고국의 소식이 안타깝지만 그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몇 번 기도해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이 문제를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로 붙잡고 기도하며,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시작됩니다. 어떤 문제를 들었을 때 판단하고 정죄하기가 쉽습니다. 냉정한 분석에 근거해서 해결책을 내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문제를 나의 문제로 끌어안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됩니다. 기도가 먼저입니다.

●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11절)

​4-11절까지가 느헤미야 기도 내용입니다. 여기에 느헤미야의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어떤 언약 관계인지를 압니다. 그리고 회복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5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라고 합니다. 학개서에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느헤미야서는 “하늘의 하나님”이 반복됩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느헤미야는 비록 대제국 페르시아 왕의 관원으로 있지만 하나님께서 진정한 왕이심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그 하나님은 크고 두려우신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어 느헤미야는 에스라가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자신의 죄악으로 자복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를 지키지 않은 것을 회개합니다. 그렇습니다. 무조건 문제만 해결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어디서부터 회복되어야 하는지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말씀 안에서 발견하고 기도합니다. 기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기도하다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대로가 아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간구하게 됩니다.

이어 하나님의 약속을 부여잡고 회복을 간구합니다. 9절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던 느헤미야의 기도가 11절 끝에서는 특이한 간구를 합니다.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여기 “이 사람”은 아닥사스다 왕입니다. 왜 갑자기 아닥사스다 왕에게 은혜를 입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일까요? 느헤미야는 긴 시간 기도했습니다. 1:1절 기슬르월에 시작해서 2:1절 니산월까지 약 4개월간 기도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형편으로 시작된 기도가 계속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자신이 고국으로 돌아가 그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부르심입니다. 고국 백성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알고 눈물로 기도하던 느헤미야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꿈을 주신 겁니다.

그런데 이 일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왕의 술관원이 갑자기 고국으로 돌아가 성벽을 재건하겠다고 했는데 왕이 싫어하면 그것은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에스더서를 보면 에스더가 왕비임에도 왕 앞에 함부로 나가지 못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 느헤미야의 사명은 목숨을 담보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지 않는다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느헤미야는 거절하거나 핑계하지 않습니다. 받아들이고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 바로 왕에게 은혜를 입게하셔서 허락을 받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울며 기도하고 있습니까? 누군가의 아픔과 문제, 공동체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끌어안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그 가운데 내가 해야 바른 길을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