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28 | 매일성경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10절)
일곱 대접 재앙 이후 17장부터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큰 성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내용입니다. 큰 성 바벨론은 무엇을 추구했으며 그 결과 어떤 심판이 임하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17장에서는 바벨론을 “큰 음녀”로 표현했고, 18장에서는 성도들은 거기서 나와 바벨론의 죄에 참여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바벨론의 멸망으로 바벨론을 따르던 자들에게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지를 설명합니다. 세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9-10절은 땅의 왕들, 11-16절은 땅의 상인들, 그리고 17-19절은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입니다.
먼저 땅의 왕들은 바벨론과 음행하고 사치했습니다. 세상 정신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 나라가 영원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10절에는 바벨론을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라고 표현합니다. “견고한”이라는 단어가 새롭게 들어가 있는데 땅의 왕들의 기대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절대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나님의 진노로 불에 타 연기가 올라옵니다. 그것을 보고 자신들에게도 재앙이 올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렇게 견고한 큰 성 바벨론은 10절 하 “한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고 합니다. 본문에 반복되는 말들이 많은데, 가장 중요한 말은 10절과 17절, 19절에 반복되는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입니다. 사람들이 견고하다고 생각한 바벨론이 한 시간 만에 망해버린다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겉보기만 크고 화려했지 실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전3:12-15절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렇습니다. 불 타 없어질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한 부가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17절)
땅의 상인들도 바벨론을 위해 울고 애통합니다. 그런데 이유가, 바벨론의 심판을 보면서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함이 아닌 더 이상 매매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치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이들의 관심은 땅이 전부입니다. 12-13절은 상인들이 매매했던 품목들을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금, 은과 보석은 물론이고 고급 옷감과 그릇들입니다. 특히 주목을 끄는 품목은 13절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입니다. 사치와 치부는 새롭고 고급스러운 부분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관심을 끝이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들의 치부로 인해서 다른 많은 사람들은 고통을 겪게 된다는 겁니다. 이들이 매매하는 것들 중에는 “종들과 사람들의 영혼들”까지 있습니다. 새번역은 “노예와 사람의 목숨”으로 번역했습니다. 사람을 노예로 사고 파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람의 목숨도 돈으로 거래하는 무자비한 세상입니다. 한마디로 돈이면 못하는 일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 사람들이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 14절 “바벨론아 네 영혼이 탐하던 과일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라고 하는데 입으로 맛보는 맛있는 과일이나 음식, 그리고 눈으로 보는 빛난 것들입니다. 꼭 우리 시대를 보는 것 같습니다. 먹방 시대입니다. 맛있는 음식에 관심이 많습니다. 또한 눈으로 보는 것에 집중합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비슷합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들에 시대 정신이 반영되어 있고 그것을 주도하는 것이 큰 성 바벨론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잘 분별해야 합니다. 롬12:2절 말씀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마지막으로는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입니다. 이들 역시 울며 애통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땅이 아닌 하늘에, 그리고 순간이 아닌 영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세상은 사치와 치부에 관심이 있지만 성도는 영적인 부요함을 누려야 합니다. 3장에서 주님은 라오디게아교회를 책망하셨습니다. 부요해서 부족함이 없다고 자랑하는 자들을 향해 계3:17절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이 시대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오늘 하루를 영원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갑시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는 모든 것이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 견고한 삶이 됩시다.
2025.07.25 | 매일성경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15절)
오늘 본문은 일곱 대접 재앙 가운데 여섯째와 일곱째입니다. 여섯째 천사가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습니다. “유브라데”는 9:14절 여섯째 나팔 재앙 때도 등장했던 강입니다. 이곳은 로마와 로마가 두려워한 파르티아 군대의 경계선입니다. 여섯째 나팔 재앙은 파르티아 군대가 로마로 쳐들어와 공격하는 전쟁 상황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또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고 합니다. 로마와 파르티아 간의 전쟁이 아니라 이들이 연합군을 형성합니다. 말라버린 유브라데 강은 동방에서 오는 왕들이 쉽게 건너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연합군을 형성하는 이유는 13절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여기 개구리가 등장합니다.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 중 두 번째 재앙이 개구리 재앙입니다. 개구리는 부정한 짐승입니다. 그래서 “세 더러운 영”을 개구리에 비유합니다. 이 더러운 영들이 용과 짐승, 그리고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옵니다. 14절은 다시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고 하면서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내용이 귀신, 즉 사탄이 주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흉내내어 용과 짐승, 거짓 선지자로 활동하면서 그들의 입으로, 또는 이적으로 왕들을 모아 하나님과 전쟁을 합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14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고 합니다. 사탄의 나라가 연합군을 형성하여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교회를 공격합니다. 그런데 그 전쟁의 날을 “하나님의 큰 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날입니다. 세상 군대가 아무리 많고 거대해도 결코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미 승부는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의 승리요 세상 나라의 패배입니다. 이들이 모이는 곳이 16절 “아마겟돈”입니다. 원어로 ‘하르므깃도’로 “므깃도의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곳은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왕들이 패배한 곳이며(삿4-5장) 거짓 선지자들이 패망한 장소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은 영적 전쟁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핵심은 용과 짐승, 거짓 선지자가 패배하는 장소입니다.
이런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성도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15절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그런데 도둑같이 갑자기 오십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는 삶은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않는 삶입니다. 이것은 3장에서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에 권면한 말씀과 비슷합니다. 사데교회는 안타깝게도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면서 3:3절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이어 3:4절은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도둑같이 오십니다. 그러니 옷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유한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은 미지근한 상태였고 더 큰 문제는 자신들의 영적인 상태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곤고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3:18절은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하십니다. 이처럼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이 권면 속에 당시 성도들의 고민과 기도가 들어 있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연합합니다. 거대합니다. 세상이 이길 것 같습니다. 세상이 영원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살기 위해서는 세상 편에 서야 하고, 그들과 어울려야 하고 그들의 길을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성도들에게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 주님께서 반드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성도들에게 승리는 주실 것이니 항상 깨어 거룩한 옷을 입고 세상 앞에 흔들리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19절)
마지막 일곱째 대접은 공중에 쏟아집니다. 공중은 사탄이 권세를 잡은 곳입니다. 이곳에 진노의 대접이 쏟아지자 성전 보좌에서 음성이 들리는데 “되었다”고 합니다. “다 이루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결과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큰 지진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집니다. 세상의 모든 성이 무너집니다.
특히 19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받습니다. 이미 14:8절은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고 했는데 그것이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서 기억하신 바 되어”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죄악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시고 그에 합당한 보응을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수고와 눈물과 인내도 빠짐없이 기억하시고 복으로 갚아주시지만, 죄에 대해서는 기억하시고 갚으십니다. 큰 성 바벨론은 창11장에서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처럼 하나님께 도전하고 하나님 없는 삶을 추구하였습니다. 거룩함이 아닌 거대함을 추구하였습니다. 스스로가 신이 되어 살아가려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여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런 바벨론이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게 됩니다.
21절부터는 다시 한번 바벨론과 그를 따르는 세상에 임하는 심판을 설명합니다. 무게가 한 달란트(26-41kg)되는 우박이 떨어집니다. 이 재앙을 피해 살아날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입술은 어떤 도구인가를 생각합니다. 전쟁을 위해 사람을 모으는 입술이 아닌 복음을 전하고 평화를 이루는 입술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 언제 오실지 모르는 마지막 때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거룩한 옷을 입고 구별된 성도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거대한 세상을 따라 살지 않고 거룩한 성도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2025.07.24 | 매일성경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2절)
일곱 대접 재앙이 시작됩니다. 성전에서 큰 음성이 들립니다. 1절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진행하시는 일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는 곳이 “땅”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용과 짐승이 왕 노릇하며 자신들이 주인인 것처럼 행동했던 장소입니다. 하나님 흉내를 내던 곳입니다. 그런데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2절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라고 하는데 오늘 본문은 다섯 번째 천사까지 대접을 쏟는데 그 장소가 다릅니다. 첫 번째는 “땅”이고 두 번째는 “바다”이며, 세 번째는 강과 물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해이고, 다섯 번째는 짐승의 왕좌입니다. 세상 모든 곳에 예외 없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설명합니다. 2절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입니다. 우리가 계시록을 묵상하면서 잊어서는 안되는 내용입니다. 심판의 대상은 고난 속에서 믿음을 지킨 소수의 성도들이 아닌, 짐승의 세상에서 짐승을 따르고 짐승을 우상처럼 경배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그 안에서 부와 안전을 누렸습니다. 성공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 세상이 영원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곳에, 그 사람들에게 진노의 대접이 쏟아집니다. 독한 종기가 나서 고통을 당합니다.
둘째 천사는 대접을 바다에 쏟습니다. 그러자 3절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피”가 네 번 반복됩니다(3,4,6). 3절과 4절의 “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바다와 강물이 피로 변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6절에 두 번 반복되는 “피”는 성도들과 선지자들이 흘린 피입니다. 그 결과로 바다와 물이 피로 변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짐승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도들을 핍박하고 조롱했습니다.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선지자들의 외침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이들이 피를 경험하게 됩니다.
3절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단어는 “모든”입니다. 대접 재앙으로 모든 생물이 죽게 됩니다. 이것은 8:8-9절과 비교됩니다.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더라”고 합니다. 계속 강조했듯 나팔 재앙은 삼분의 일이 피해를 당합니다. 나팔 재앙 앞에 일어난 인 재앙은 사분의 일이 피해를 입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 것이 죽게 됩니다. 최종적인 심판입니다.
세 번째 천사가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은 후 이렇게 선포합니다. 5절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7절도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어제 본문인 15:3,4절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대접 재앙을 비롯한 모든 재앙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의롭지 않은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준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사람들과 세상이 정해 놓은 기준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따라 살아야 하는지가 분명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9절)
넷째 천사가 대접을 해에 쏟자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웁니다. 사람들에게 온기를 주고 에너지의 원천인 해가 심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사실 해는 위험한 것입니다. 해가 우리와 조금만 가까워도 우리는 태워집니다. 반대로 조금만 멀어져도 얼어 죽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따뜻한 햇볕 아래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적정한 거리를 유지해서 운행하시기 때문입니다. 해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계가 이렇게 하나님의 완벽한 손길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로 문제가 생기니 해가 사람들 태우는 도구가 됩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9절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고 합니다. 11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섯째 대접이 짐승의 왕에게 쏟아지니 사람들이 아파서 고통하며 심지어 혀를 깨물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11절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고 합니다. 이런 내용이 9:20-21절에도 나왔습니다. 나팔 재앙이 임했는데 그 결과 “회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소속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짐승에게 속한 자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계시록은 심판에 대한 내용이면서도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재앙의 목적도 그런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계속 회개하지 않습니다. 고집을 피우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그렇다면 진짜 문제는 회개하지 않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비난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이 “의로우심”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 기준으로 심판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 진짜 이유는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길을 알려주심에도 돌이키지 않고 고집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과 하나님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말씀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회개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025.07.23 | 매일성경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3절)
12-14장은 용과 짐승들의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인내한 성도들에게 주시는 승리가 무엇이며, 마지막 때에 어떻게 구원과 심판의 추수가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15장은 계시록에 나오는 세 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재앙인 일곱 대접 재앙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설명합니다.
1절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라고 시작합니다. 요한이 새로운 이적을 보는데 “이적”을 수식하는 단어가 “크고, 이상한, 다른”입니다. 이전에 보았던 것과는 다른 새롭고 놀라운 이적입니다. 그것이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진 것인데, 1절 하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고 합니다. 마지막 재앙이며, 하나님의 진노라 끝난다고 하니 이제 더 이상의 재앙은 없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하지만 바꿔 이야기하면 이 재앙은 최종적이고 철저한 심판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명한 것은 더 이상 회개의 시간은 없습니다. 일곱 인 재앙은 1/4이 심판을 받았다고 했고, 일곱 나팔 재앙은 1/3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심판의 강도가 점점 세지지만 완전한 심판을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회개의 시간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10:11절은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는 말씀이 있었고, 14:6절은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서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고 돌아올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그 기회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구조는 앞부분인 1절과 뒷부분인 5-8절이 일곱 대접 재앙에 대한 내용이라면 그 사이에 들어있는 2-4절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승리의 노래입니다. 이 재앙이 누를 향한 것인가? 성도들이 아닌 짐승과 그를 경배하고 추종하던 자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2절 보면 “유리 바다”가 나오고, 이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이들이 누구인가? 짐승과 그의 우상과 짐승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입니다. 황제 숭배를 강요하고, 신앙을 박해하는 가운데 인내하며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킨 자들입니다(14:12).
그런데 이들이 서 있는 유리 바다는 마치 출애굽기에서 바닷가에 서서 찬양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받아 애굽의 노예에서 벗어나 출애굽을 하는데 홍해가 가로 막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가 갈라져 이스라엘은 건너고 뒤쫓아오던 애굽 군대는 그대로 물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때 홍해 바닷가에서 구원의 노래를 불렀는데 그 내용이 출15장입니다. 출15:1-2절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이렇게 모세와 이스라엘이 노래한 것처럼 구원받은 신약의 성도들이 어린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 내용이 3-4절입니다. 강조하는 내용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만국의 왕이십니다. 의롭고 참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경배해야 합니다.
이런 내용이 나올 때마다 강조하지만, 이 부분을 읽는 성도들은 비록 현실은 고난이지만 이런 영광의 날을 소망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가 아니고 반드시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날을 주실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우리 삶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잘 보이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약속의 말씀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일하시고 믿음의 성도들에게 놀라운 승리를 주십니다.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6절)
일곱 대접 재앙은 5절 “증거 장막 성전”에서 시작됩니다. 이 용어를 한 이단이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구원의 길을 증거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증거 장막 성전에서 구원의 길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쏟아 붓는 일곱 대접이 나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이 아닌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왜 그냥 “셩전”이라고 하지 않고 “증거 장막 성전”이라고 하는가? 장막은 우리가 아는 “성막”입니다. 성막 안에서 가장 중요한 기물이 언약궤이고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 두 돌판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입니다. 사람과의 약속도 중요한데 하나님과의 언약은 대단히 엄중합니다. 언약을 지킨 자들에게는 은혜와 복은 주시지만, 언약을 어긴 자들에게는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일어나고 있는 심판이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온 세상의 창조주시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짐승과 우상에게 드리며 짐승의 정신을 따라 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기준으로. 그래서 “증거 장막 성전”입니다.
재앙을 가진 천사의 모습이 6절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라고 하는데 1:13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예수님의 권위로 심판을 대행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 7절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입니다. 어쩌면 이 대접은 성도들의 탄원의 기도를 담은 것이기도 합니다. 8장에서 일곱 나팔이 시작될 때도 성도들의 기도가 금 향로의 향연과 함께 하나님께 올라갔고 거기에 천사가 제단의 불을 담아 땅에 쏟으므로 재앙이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인내하던 성도들의 눈물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8절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고 합니다. 출애굽기에서 성막이 완공되었을 때도 출40:34-35절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재앙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이며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반드시 승리케 하십니다. 이 사실을 확신하면서 오늘 하루도 믿음의 경주를 이어갑시다.
2025.07.22 | 매일성경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15절)
14:1-13절까지는 두 가지 이야기였습니다. 하나는 구원받은 144,00명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들은 승리하신 어린양과 함께 하늘 시온산에 서서 새 노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다른 하나는 주님을 따르지 않고 큰 성 바벨론을 따르며 짐승에게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은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12-13장의 성도들이 경험하고 있는 어두운 현실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용과 짐승의 주도하는 세상에서 고통 속에서 인내하는 성도들에게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 내용을 더 선명한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도구가 “예리한 낫”입니다.
요한이 새로운 환상을 봅니다. 14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고 합니다. “인자와 같은 이”는 다니엘서의 예언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구름 위에 앉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셔서 온 세상을 통치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도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금 면류관을 쓰고 계신다는 것은 왕권과 권세를 의미합니다. 이런 간단한 예수님의 소개가 당시 성도들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로마 황제가 왕좌에 앉아서 절대권력을 휘두르면서 성도들을 박해합니다. 그 기세가 영원할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에 대한 소개는 진정한 왕은 예수님이시고, 그러니 황제들의 권세는 금세 사라질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두려워할 분은 세상 임금이 아닌 하늘 임금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의 손에 예리한 낫이 들려져 있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지만 예수님께서 낫을 가지고 하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15절의 다른 천사가 말해줍니다.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낫의 용도는 추수를 위함입니다. 곡식이 익어 거둘 때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12절에서 설명한 것처럼 고난 속에서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킨 성도들을 구원하는 내용입니다. 이들에게 수고를 그치고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십니다(13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둘 때”가 분명히 온다는 겁니다. 용과 짐승이 다스리는 세상이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19절)
그렇다면 믿음으로 인내한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예리한 낫으로 추수 하신다면, 반대로 큰 성 바벨론에 살면서 짐승을 경배하고 세상 정신을 따라 살아간 사람들의 결과는 어떠할까요? 그것이 17-20절입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아닌 17절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고 합니다. 천사의 손에 예리한 낫이 들려있습니다. 이 천사에게 다른 천사가 큰 음성으로 말을 합니다. 18절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고 합니다.
“불을 다스리는 천사”가 등장하는데 10절은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한 자들이 진노의 포도주를 마신다고 했는데 그것이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즉 그것을 담당하는 천사가 심판을 위해 등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천사가 어디로부터 나왔다고 하냐면 “제단으로부터 나와”입니다. 계시록에서 제단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 제단 아래는 6:9-10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서 하나님께서 탄식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6:10절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 진노의 심판도 성도들의 탄식의 기도가 응답되는 과정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포도송이를 거두라 하는데, 앞에서 나왔던 진노의 포도주와 연결하면 그냥 포도 수확이 아닌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사가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둡니다. 그리고 19절 하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집니다. 여기서도 “큰”이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냥 포도주 틀이 아닌 큰 포도주 틀이라는 것은 그렇게 짐승을 경배하고, 큰 성 바벨론에 속해서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간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소수의 성도들이 살아가기가 힘들었던 것이지요. 그런 자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져집니다.
20절은 포도주 틀을 밟았는데 거기서 나오는 것이 포도주가 아니고 “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피가 어느 정도 흘렀다고 하냐면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고 하는데, 280-320km입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혹독한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계시록 등장하는 숫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1600은 4×4×10×10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4는 사방 즉 온 세상을 의미하고, 10은 세상 왕들과 관련된 숫자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숫자는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짐승을 따른 온 세상 사람들을 의미하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이 땅의 왕으로 하나님께 도전하고 성도들을 박해했던 황제들에 대한 심판을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반드시 이런 날이 옵니다. 땅의 삶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지금, 매일의 삶이 그 날을 준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땅에 속해 살므로 잠깐 기쁨은 누리지만 영원히 쉼을 얻지 못하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믿음을 지키다 죽음에 이를수도 있지만 수고를 그치고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