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2:1-18절/하나님은 크심이라(25.09.16)

●“솔로몬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1절)

​솔로몬은 하나님께 일천 마리의 번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묻자 “지혜와 지식”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백성들을 잘 재판하여 공의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역대기에는 다른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곧바로 성전 건축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저자는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지식으로 성전을 건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2장은 성전 건축을 위해 솔로몬이 사람들을 준비하고 특별히 백향목을 구하기 위해 두로 왕 후람에게 사절을 보내 계획을 설명하는 내용과 이에 대한 후람의 반응이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오늘 본문을 읽은 사람들이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방인들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고 하나님의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어려움 속에서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이 솔로몬 성전의 영광과 비교되지 않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에 이런 질문들이 그치지 않습니다. “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상태에 있는가?”, “언제 다시 하나님의 영광, 예루살렘의 영광, 성전의 영광이 회복될 것인가?” 이렇게 묻고 있는 백성들에게 저자는 오늘 말씀을 통해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1절 “솔로몬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위해 먼저 사람을 준비합니다. 짐꾼과 산에서 돌을 떠낼 자들과 감독할 사람들입니다. 무슨 일이든 사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건축 재료인데 백향목이 필요합니다. 인근 나라인 두로가 백향목이 많은 곳입니다. 이미 다윗왕이 왕궁을 건축하면서 두로 왕의 도움으로 백향목을 공급받아 궁궐을 건축하였습니다. 솔로몬도 두로 왕에게 사절단을 보내 백향목을 공급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성전에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인지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4절 “주 앞에서 향 재료를 사르며 항상 떡을 차려 놓으며 안식일과 초하루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절기에 아침 저녁으로 번제를 드리려 하오니 이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규례니이다” 향 재료를 사르며 영광의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진설병 떡을 차려 놓으며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곳입니다. 안식일과 초하루 그리고 절기에 아침 저녁으로 번제를 드리며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전은 영광의 하나님과 만남이 있는 곳이며 하나님의 인정하고 영광을 돌리는 곳입니다. 이 본질이 흐려지고 습관적으로 성전을 오가며, 형식적인 예배, 그리고 성전을 통해 자기 영광을 얻으려 한다면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5절 “내가 건축하고자 하는 성전은 크니 우리 하나님은 모든 신들보다 크심이라”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6절에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고 영광스러운 분이신지 설명합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요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내가 누구이기에 어찌 능히 그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요 그 앞에 분향하려 할 따름이니이다” 크고 화려한 성전을 건축하지만 솔로몬이 분명하게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지은 공간에 머무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성전으로 짓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용납하실 수 없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반복해서 강조한 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한다는 말입니다(1,4).

그렇다면 이 시대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전으로 삼으시고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제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이 영광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신다면 성전된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할지가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일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므로”(11절)

​솔로몬은 두로의 최고 기술자를 보내줄 것은 요청합니다. 그들과 이스라엘 기술자들이 함께 성전을 건축할 계획을 합니다. 또한 그에 상응하는 대가도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11절부터는 두로 왕 후람의 답장입니다. 이방 나라의 왕의 입에서 놀라운 고백이 나옵니다. 11절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을 세워 그들의 왕을 삼으셨도다”, 12절 “천지를 지으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송축을 받으실지로다 다윗 왕에게 지혜로운 아들을 주시고 명철과 총명을 주시사 능히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후람의 이방 나라 왕이지만 다윗과 함께 하신 하나님, 또한 솔로몬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합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백성,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을 통해 하나님은 이방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열방의 빛으로 이스라엘의 사명입니다.

역대기를 읽는 백성들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반대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렇습니다. 경제, 국방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삶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수 없는 모습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니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오늘 말씀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후람은 솔로몬의 요청을 들어줍니다. 이를 위해 재주있고 총명한 사람을 선택합니다. 13절 “내가 이제 재주 있고 총명한 사람을 보내오니 전에 내 아버지 후람에게 속하였던 자라”는 말씀은 좀 혼란스러운데 새번역 “이제 총명을 갖춘 기능공 한 사람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이런 일의 전문가인 후람이라는 사람입니다.”로 되어 있습니다. 즉 ‘후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전문가를 보내줍니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 단지파 어머니와 두로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야 그 가치를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거 성전이 있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음이 영광이었고 은혜였습니다. 그때 바르게 하나님을 알고, 바르게 예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해 잃어버리고 나니 현실이 절망적입니다.

우리가 예배할 수 있음이 감사한 일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리를 성전 삼으시고 함께 하심이 영광입니다.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바르게 인정하고 합당한 예배로 영광돌립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이 됩시다.

역대하1:1-17절/지혜와 지식을 주소서(25.09.15)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왕위가 견고하여 가며”(1절)

​역대하 묵상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왕들의 역사는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상은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 사무엘하는 왕으로서 다윗의 통치, 그리고 열왕기상하는 다윗을 이어 왕이 된 솔로몬의 통치와 이후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분열왕국의 이야기, 왕국의 멸망 이야기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왕들의 이야기인 역대상하가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록 시점의 차이입니다. 삼상하와 왕상하는 그 당시 관점에서 역사를 기록했다면, 역대상하는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포로에서 돌아온 후 역사를 회고하며 기록한 내용입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들에 의해서 멸망했으면, 그렇다면 회복을 위해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징이 부정적인 내용보다는 긍정적인 부분을, 그것도 남유다 역사를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통치부터 시작합니다. 1절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왕위가 견고하여 가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사 심히 창대하게 하시니라”고 합니다. 왕위가 견고하며 심히 창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시작부터 역대기 저자의 관점이 부각됩니다. 사실 솔로몬이 왕이 되는 과정은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열왕기상을 보면 다윗이 늙자 아들 아도니야가 왕이 되겠다고 먼저 움직입니다. 그와 동조하는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혼란 속에서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고 반대자들을 제거했습니다. 하지만 역대기는 그런 내용을 생략합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솔로몬이 왕이 되고 처음을 한 일이 무엇인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2절부터의 내용입니다. 온 회중과 함께 기브온 산당으로 갑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기브온 산당에 여호와의 회막이 있습니다. 아직 성전이 지어지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성막을 만들어 성막을 중심으로 광야를 지나왔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어와 정착하면서부터는 성막이 이동하지 않고 정해진 곳에 머뭅니다. 길갈, 실로에 있다가 지금은 기브온 산당에 있습니다. 성막에 대한 관심은 성막에서 가장 중요한 기물은 법궤로 향합니다. 법궤는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메어 올려 보관 중입니다. 그리고 놋제단은 기브온 여호와의 장막 앞에 있습니다.

그 제단에서 솔로몬이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데 6절 “천 마리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 일천 번의 제사가 아니라, 천 마리의 번제를 드린 겁니다. 하루에 이 많은 양의 제물을 잡아 드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 솔로몬은 열 마리, 백 마리가 아닌 천 마리의 번제를 드렸을까요? 백 마리만 해도 많은 숫자입니다. 솔로몬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과 온전한 신뢰가 외적으로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오직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께 집중합니다. 저자는 이스라엘의 실패가 예배의 실패라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솔로몬의 예배를 통해 우리의 예배를 돌아봅니다. 내면이 형식으로 드러납니다. 예배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습니다. 예배하는 우리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집중하며, 그것이 우리의 모습에도 드러나야 하겠습니다. 주일을 잘 지키는 것, 시간을 잘 지키는 것, 온전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 전심으로 찬양하며 기도하는 것, 말씀에 집중하는 예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는 이제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10절)

​하나님께서 그 날 밤에 솔로몬에게 나타나 물으십니다. 7절 하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 너는 구하라” 솔로몬은 과거 아버지 다윗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큰 은혜를 기억하면서 다윗과의 언약을 굳게 지켜주시길 기도합니다. 바로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게 이어지길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한 것은 “지혜와 지식”입니다. “지혜와 지식”이 세 번 반복됩니다(10,11,12). 왕상3:9절에서는 “듣는 마음”을 구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혜와 지식이 머리가 비상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이렇게 지혜와 지식을 구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백성들 때문입니다. 9절 “주께서 나를 땅의 티끌 같이 많은 백성의 왕으로 삼으셨사오니”, 10절 “이렇게 많은 주의 백성을 누가 능히 재판하리이까” 이런 솔로몬의 기도에 하나님은 11절 “오직 내가 네게 다스리게 한 내 백성을 재판하기 위하여 지혜와 지식을 구하였으니”라고 하십니다. 솔로몬의 마음은 백성들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이 백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바르게 재판해서 억울한 사람이 없게하고 공의의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와 지식을 구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간구에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지혜와 지식을 주시면서 그가 구하지 않은 것까지 허락하십니다.

기브온에서 예배하고 예루살렘으로 내려온 솔로몬의 통치가 어떠했는지를 14-17절에 설명합니다. 한마디로 견고하고 부강했습니다. 그것을 15절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금을 돌 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많게 하였더라”고 합니다. 사실 이 부분을 열왕기상은 부정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애굽에서 말을 사들인 것은 하나님께서 왕이 되는 자들에게 금지하신 일을 한 것입니다. 신17:16절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이것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도 저자의 관심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으며,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하나님을 향한 예배에 우선순위를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지혜와 지식으로 복된 삶을 살아갑시다.

스바냐2:4-15절/남은 자들(25.09.12)

●“화 있을진저 블레셋 사람의 땅 가나안아”(5절)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진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나님은 “여호와의 분노의 날”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날 때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징계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열방을 향해서도 하나님은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이들 역시 하나님의 손길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벗어나 악을 행할 때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온 땅의 통치자이십니다. 그래서 본문은 서쪽 블레셋, 동쪽 모압과 암몬, 남쪽은 구스 마지막으로 북쪽은 앗수르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블레셋은 다섯 도시가 연합해서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4절 “가사는 버림을 당하며 아스글론은 폐허가 되며 아스돗은 대낮에 쫓겨나며 에그론은 뽑히리라” 가드를 제외한 네 도시가 버림을 당하고 폐허가 되며 쫓겨나고 뽑힌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세우시기도 하시며 무너뜨리기도 하십니다. 학자들은 여기 사용된 단어들이 버림받은 여인을 표현하는 단어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표현은 남편인 하나님을 떠난 아내 이스라엘을 향한 경고일 수도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왜 심판을 당하는지 다른 나라들처럼 명확하게 나와있지 않지만, 5절 “블레셋 사람의 땅 가나안아”라는 말씀을 통해서 보면 이들은 이스라엘이 진멸했던 가나안 사람들의 정신을 따라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이들을 심판하십니다. 이들이 멸하여 주님이 없게 할 것이며 해변은 풀밭아 되고 양을 치는 곳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블레셋 땅이 누구에게 주어진다고 하냐면? 7절 “그 지경은 유다 족속의 남은 자에게로 돌아갈지라”고 합니다. “남은 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여기만 아니라 9절 모압과 암몬에 대한 심판에서도 “내 백성의 남은 자들이 그들을 노략하며 나의 남은 백성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내 백성의 남은 자”, “나의 남은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2:3절에서 말씀하셨던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자소수의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정신을 따라 포악과 거짓으로 살아가며 하나님 대신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갈 때, 신실하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행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내 백성이라고 하시면서 회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거대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분명합니다. 다수의 길, 넓은 길이 아닌 소수의 길, 좁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15절)

​이어 모압과 암몬에 대한 심판입니다. 심판의 이유는 8절 “내가 모압의 비방과 암몬 자손이 조롱하는 말을 들었나니 그들이 내 백성을 비방하고 자기들의 경계에 대하여 교만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비방하고 조롱했습니다. 또한 교만하여 국경을 침범하였습니다. 이것을 10절 하 “여호와의 백성을 훼방하고 교만하여 졌음이라”고 하십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무시하고 비난했습니다. 거만을 떨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조롱과 비난의 소리를 하나님은 들으셨습니다. 그들의 훼방과 교만을 보셨습니다. 갚아주십니다.

성도는 누군가를 함부로 조롱하고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교만하고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로 누군가를 실족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내가 소중하듯 그들 역시 소중합니다. 비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그대로 갚아주십니다. 그러니 성도는 조롱과 비난 대신 칭찬과 격려의 말을 해야 합니다. 훼방 대신 하나됨을 이루어야 하며 교만 대신 겸손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모압과 암몬을 불과 유황으로 심판받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만드시겠다고 합니다. 황폐하게 됩니다.

남쪽으로는 구스를 심판하십니다. 가까이 있는 나라들보다 멀리 있는 구스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2절 “구스 사람들아 너희도 내 칼에 죽임을 당하리라”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북쪽 앗수르를 심판하십니다. 화려하고 번성했던 도시는 사막같이 메마르고 짐승들의 소굴로 변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앗수르가 심판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5절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주하며 마음속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기쁨의 성이요 염려 없는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쁨과 염려 없음이 힘으로 다른 나라들을 짓누르고 탈취해서 얻은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기쁨과 염려 없음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이들의 문제는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는 이기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성 때문입니다. 자신들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고 파괴했습니다. 나만, 우리 가정만, 내 자녀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앗수르를 하나님은 황폐하게 하며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십니다.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는 결국 나를 황폐하게하고 공동체를 황폐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참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닌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갈 때 오히려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점점 자기 중심성이 강화되는 세상에서 다른 이들을 돌아보며 섬기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스바냐1:14-2:3절/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25.09.11)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14절)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희생제물로 준비하는 ‘여호와의 날’이 임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14절에서는 이 날을 “여호와의 큰 날”이라고 하고, 세 번이나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라고 합니다(18,2:2,3).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이 컸던 만큼, 그들을 향한 진노 역시 큽니다. 어쩌면 진노의 뿌리 역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14절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고 합니다. 새번역은 “득달같이 다가온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에도 인지하지 못하고 포악과 거짓 속에서 안일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로 앞에서 묵상한 살후 2장은 주님의 재림을 너무 고대해서 혼란이 생긴 것이라면, 오늘 본문은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지 않을 것이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어쩌면 본문의 백성들처럼, 주님 다시 오실 날이 가까이 오고 있음에도 오시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 날은 용사마저 심히 슬피 우는 날이 될 것입니다. 15-16절은 그 날이 어떤 날이 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분노의 날, 환난과 고통의 날, 황폐와 패망의 날, 캄캄하고 어두운 날, 구름과 흑암의 날입니다. 특히 15절은 어둠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창세기에서 어둔 세상에 빛을 만드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어 빛된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빛을 잃어버리고 어둠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런 백성들에게 내리는 심판이 어둠입니다. 16절은 전쟁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전쟁 나팔이 울리고 견고한 성읍과 높은 망대가 무너질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상대로 전쟁을 하십니다. 이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셨습니다. 아무리 강한 대적이라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면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십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17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디로 가며,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망각하고 세상을 따라 살았습니다. 선택된 거룩한 백성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가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맹인이 되게 하시며 티끌과 분토가 되게 하십니다.

이런 진노의 날에 18절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그렇습니다. 은과 금이 건지지 못합니다. 그동안 포악과 거짓으로 은과 금을 모았습니다. 그것이 안전과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무용지물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우리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질 은과 금이 아닙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2:3)

​이렇게 무서운 여호와의 날을 피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있다고 하십니다. 2:1절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모이라고 합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의 의미는 ”하나님을 원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하는 백성“입니다. 모이라는 이유는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함입니다. 기회는 여호와의 진노가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이르기 전입니다. 기회가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모여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3절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이들은 1:17절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는 세상에서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입니다. 다수의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겸손하게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먼저 여호와를 찾습니다. 하나님만 예배합니다. 풍요를 위해 우상을 숭배하고 은금에 관심을 기울이는 세상에서 하나님만 경배합니다. 또한 공의와 겸손을 행합니다. 포악과 거짓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다스리심을 믿고, 악과 불의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또한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내가 주인되어 내 마음대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갑니다. 바로 이들이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습니까? ”가깝고도 빠르도다“라는 선지자의 경고를 귀담아 들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소수의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스바냐1:1-13절/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25.09.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2절)

​지난 8월 우리는 스가랴서를 묵상했습니다. 나라가 멸망하여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예루살렘의 현실을 보면서 절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회복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오늘부터 묵상할 스바냐의 배경은 남유다가 멸망하기 전입니다. 그렇다면 왜 나라가 멸망할 수 밖에 없었는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죄악상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스바냐가 활동한 시기는 1절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입니다. 스바냐를 소개하면서 “히스기야의 현손”이라고 합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 중심으로 나라를 통치했던 왕입니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위기를 극복했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이후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이 되는데, 남유다 역사상 가장 악한 왕입니다. 그는 바알을 위해 제단을 쌓았고 하늘의 일월성신을 경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을 숭배하는 제단을 만들었으며, 가장 악한 일은 인신 제사를 받는 몰렉에게 자신의 아들들을 바쳤습니다. 이 므낫세로 인해서 남유다의 멸망이 확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므낫세를 이어 아몬이 왕이 되었지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반역이 일어나 아몬이 죽고 그의 아들 요시야가 8살의 나이에 왕이 됩니다. 그러니 이전의 우상숭배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바냐서가 시작되자마자 진멸을 선언하십니다. 2-6절까지 “진멸”과 “멸절”이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2,3,4,6). 진멸의 대상은 3절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입니다. 사람이 가장 먼저 나오고 이어 짐승과 공중의 새 그리고 바다의 고기입니다. 이것은 창1장에 나오는 천지창조와 반대되는 순서입니다. 하나님은 새와 물고기에 이어 땅의 짐승을 만드시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다스려야 할 피조물을 경배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멸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거치게하는 자가 되었으며 악인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유다와 예루살렘이 그 중심에 서 있습니다. 4절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라고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손을 펴시는 것은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심판하시기 위해 손을 펴십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죄악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풍요를 위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하나님만 예배해야 할 이스라엘이 ‘그마림’이라는 이방신에게 제사드리는 제사장들을 임명하였습니다. 지붕 위에서 하늘의 뭇별에게 경배하며, 하나님도 섬기고 말감도 섬겼습니다. 여기 말감이 바로 인신 제사를 원하는 몰렉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을 동시에 행하였습니다. 가장 큰 죄악은 6절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무관심하고 우상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이런 일들이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서서히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점점 심각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 경고하시지만 자신들에게는 상관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무 문제없이 잘 살고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잘 돌아보고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7절)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날”이 다가오고 있으니 잠잠하라고 하십니다. 보통 구약의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날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여호와의 날”은 반대로 이스라엘에 심판을 행하시는 날입니다. 7절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희생제물입니다. 마땅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려야 하는데, 이들은 하나님은 외면하고 우상숭배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친히 희생제물을 준비하시는데, 제물이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스라엘 죄악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까요? 8절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지도자들, 권세있는 자들입니다. 또한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은 주변 강대국의 문화와 정신 수용해서 부와 권력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행했던 일이 “포악과 거짓”입니다. 힘으로 사람들을 짓누르고 거짓으로 속여 자신들의 배를 채웠습니다. 이런 지도자들의 악은 결국 모든 백성들의 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시대 기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이 포악과 거짓에 휘말리지 않고 바른 길을 걸어 시대의 혼란을 바로 잡을 수 있도록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결국 예루살렘 곳곳에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모든 곳에 심판이 임한다는 것은 어느 곳 하나 바른 곳이 없다는 슬픔입니다. 특히 상업지역인 막데스가 거론된 것을 보면 이곳이 포악과 거짓의 중심지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13절은 그렇게 모든 재물이나 세운 집들이 노략 당하고 무너질 것을 경고하십니다. 포악과 거짓으로 쌓고 세운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바람같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다시 한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절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혹 인정하지만 하나님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로 인식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하나하나 등불을 들고 찾아내셔서 벌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사람이 누군인지를 알게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심판과 징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감각한 시대를 향해 경고하십니다. 우리 역시 습관적이고 오래된 우상숭배로 무뎌져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고 모든 것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