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139:13-24절/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25.12.10)

시편139:13-24절/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25.12.10)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13절)

​1-12절에서 모든 것을 아시고 언제 어디서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한 시인은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셨음을 선포합니다. 왜 갑자기 시인은 자신의 창조를 묵상하며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일까요? 19절을 보면 악인들이 시인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대적들로 인한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면 두렵고 위축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잊고 문제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이때 찾아오는 것이 낙심과 절망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기도하면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발견합니다. 사람들이 평가하는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서 어떻게 만드셨는지를 묵상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은 시인으로 하여금 가장 중요한 문제인 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발견하게 하였습니다. 어떤 문제가 해결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발견하는 겁니다.

13절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인체의 장기는 약80여 개라고 합니다. 크고 작은 장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만드셨습니다. 여기 “만드셨나이다”의 의미는 베틀로 옷감을 짜듯 섬세한 과정으로 만드신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는 우연한 존재가 아닙니다. 어쩌다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서 이 땅에 존재합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인 나를 그렇게 만드셨다는 사실이 감동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14절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고 합니다. 이전 성경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신비입니다. 그래서 “심히 기묘하다”라고 말하고 “기이하다”는 표현도 2번 반복됩니다(14,15). 15절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하나님은 은밀한 곳이며 땅의 깊은 곳과 같은 어머니의 태에서 시인을 만드셨습니다. 어둠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새로운 생명이 만들어집니다. 마치 12절에서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라고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어둠인 것 같은데, 그곳에 생명이 있고 빛이 있습니다. 이 깨달음이 시인에게도 한 줄기 소망의 빛으로 다가옵니다. 시인의 현실이 칠흑과 같은 어둠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날이 반드시 다가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어둠과 빛이 다르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계획과 섭리 속에서 시인을 만드셨기에 다시 강조하는 것은 “아신다”는 겁니다. 16절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하나님 앞에 숨겨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라고 하는데 어떤 의미인지 어렵습니다. 고대 근동의 배경으로 이해한다면 당시 왕들이 태어날 때 신의 칙령이 담긴 운명의 토판을 목에 걸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시인의 앞 날에 대한 모든 것을 예정하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삶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으며 사명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지요.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24절)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시고, 앞날의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니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깊은지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며 깨달을수록 기가 막힙니다. 시인의 마음이 습3:17절과 같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그래서 시인은 18절 하 “내가 깰 때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이런 고백입니다. 악인들로 인해서 괴롭고 불면의 밤을 보냅니다. 혼자인듯한 외로움과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그런데 나를 심히 기묘하게 만드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이제 시인을 악인들에 대해서 기도합니다. 19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과격한 기도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토로하며 온전히 맡기는 기도입니다. 어쩌면 시인이 악인들에게 둘러싸였을 때는 자신이 곧 죽을 것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니 자신을 악인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둘러싸시고 함께 하십니다(5절).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확신하며 기도로 맡깁니다.

악인들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피 흘리기를 좋아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시인은 그렇게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들의 말과 행동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거룩한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미워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보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불명예를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과격한 기도를 드리는 겁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의로운 분노가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 마음의 생각과 동기를 살펴보시기를 기도합니다.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확신하지 않습니다. 혹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잘못된 의도가 포함되어 있는지 하나님께서 살피시고 깨닫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영원한 길로 인도해주시길 간구합니다.

우리의 기도 중 많은 부분은 원하는 것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필요한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기도가 바로 존재에 대한 기도입니다. 시인처럼 나 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심히 기묘하심을 묵상하며 감사합니다. 특히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시는 십자가 사랑을 생각하며 감사합니다. 우리에게도 악인들과 문제들이 있지만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우리 마음과 생각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갑시다.

시편139:1-12절/아시며 함께하시는 하나님(25.12.09)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3절)

​본 시편 역시 ‘다윗의 시’로 되어 있습니다. 삶에 예기치 못한 고난이 찾아올 때 힘이 듭니다. 그런데 그때가 소망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과의 새로운 만남으로 우리의 신앙이 깊어집니다. 시인이 그렇습니다. 본문을 보면 외로움과 두려움이 시인의 삶에 가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알아가면서 오히려 큰 은혜 누리며 능력과 빛을 경험하게 됩니다.

1-6절에 반복되는 단어는 “아신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을 너무 잘 아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시냐면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아십니다. 여기 ‘살펴보셨다’의 의미는 보석을 분별할 때, 법적인 분쟁에서 증거를 찾을 때, 그리고 군사작전에서 적진을 정찰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냥 아시는 것이 아니라 시인을 향한 깊은 관심으로 집중해서 살펴보신다는 의미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라고 번역합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힘들고, 누군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다는 이 말씀이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아신다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길을 가거나 누워있는 것을 아십니다. 일거수일투족을 아십니다. 이처럼 외형적인 것만 아시는 것이 아니고 내면도 아십니다. 마음과 생각을 밝히 아시고 거기서 나오는 혀의 말도 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5절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고 합니다.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둘러싸 주십니다. 그리고 안수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붙잡아주시고 축복해주십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 반복되는 또 하나의 단어는 ‘손’입니다. ‘하나님의 손’. 10절에서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손이 인도하십니다. 능력의 오른손으로 붙잡아 주십니다. 시인은 이 사실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깊은 고독 속에서 하나님께서 시인의 손을 뜨겁게 붙잡아주시는 것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시인과 함께 하십니다. 보호하시며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 하나님과의 만남, 깨달음으로 시인은 놀랍게 됩니다. 6절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지금 시인은 고난과 외로움 속에서 흔들리고 무너져야 합니다. 두려움 속에 숨어야 합니다. 그런데 살피시고 아시는 하나님을 만나니 외롭지 않고 두렵지 않습니다. 내 인생의 하나님의 손길 속에 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시며 소망의 미래를 열어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10절)

​그리고 아시는 하나님은 반드시 함께 하십니다. 7-10절이 그 내용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절대 도망칠 수 없다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을 반대로 하면 어느 곳에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스올에 자리를 펼지라도 함께 하십니다. 9절은 복음성가에도 자주 나오는 표현인데요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입니다. 이 장면은 동이 틀 때 태양광선이 순식간에 뻗어나가 바다 끝에 닿는 모습입니다. 한마디로 빛의 속도로 날아간다 할지라도 그곳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오른손이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합니다.

롬8:35-39절 말씀이 생각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마지막으로 이처럼 아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시인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가? 흑암과 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현재 시인의 상황입니다. 흑암 가운데 절망적인 현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니 어둠이 어둠이 아닙니다. 밤이 하나님으로 인해 낮과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12절 하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현실은 고난과 어둠이지만 내면은 빛입니다. 소망입니다. 기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시편138:1-8절/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25.12.08)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2절)

​본 시편은 ‘다윗의 시’로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다윗이 환난 가운데서 지은 시편입니다. 시작은 1절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시인은 지금 감사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1절 “신들 앞에서”는 “천사들 앞에서”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말 그대로 “이방신들 앞에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지금 이방 신들이 다스리는 이방 땅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래서 2절도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라고 합니다. 성전 가까이에 있다면 성전에 가서 예배하며라고 해야 할 텐데, 그럴수가 없으니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광야에 같은 환경,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시인은 “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찬양합니다. 예배합니다. 또한 간구합니다. 이것이 힘과 기쁨이 넘치는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시인이 감사하는 이유는 2절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입니다. 시인은 시작인 2절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인 8절에서 다시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라고 합니다. 시작과 끝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언약에 신실하심입니다. 말씀하시고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나 현실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멀어진 것과 같지만 시인은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예배하며 찬양합니다.

그리고 간구합니다. 비록 이방 땅,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지만 하나님은 아니계신 곳이 없고 자기 백성을 반드시 기억하시며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간구합니다. 시인의 간구에 하나님은 힘을 주십니다. 강하게 하십니다.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7절)

​시인은 이어 4절 “여호와여 세상의 모든 왕들이 주께 감사할 것은 그들이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라고 합니다. 1절에서는 “신들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다면, 이제는 세상의 모든 왕들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상 왕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듣고 경험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그렇게 되기를 기원하는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애굽에서 400년 동안 노예생활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애굽의 바로 왕에게 말씀하시고, 순종하지 않자 10가지 재앙을 내리셔서 하나님의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신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세상 왕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해야 합니다. 그래서 5절은 “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그 무엇, 그 누구보다 하나님이 높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크고 위대하십니다.

시인의 고백이 놀라운 것은 당시 세상 왕들은 신과 같은 존재로 경배를 받습니다. 함부로 대적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시인이 확신하고 있는 것은 영광의 하나님 앞에서 세상 모든 왕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해야 할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 영광의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백성들이 영광스러운 존재요, 영광의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주목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복된 존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 당시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거대한 로마제국 황제의 핍박 아래 놓여있습니다. 황제 앞에 성도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소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요한을 열린문을 통해 하늘로 올라오라고 하십니다(계4:1절). 그리고 보여주신 것이 보좌였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온 세상을 주관하시며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앞에 이 땅 로마제국의 황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비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니 한치의 두려움없이 믿음의 길을 걸어 가라고 하십니다. 비록 그 길이 죽음의 길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영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는 세상과 다릅니다. 6절 “여호와께서는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굽어살피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심이니이다” 세상은 힘과 권력 부를 가진 자들이 중심입니다. 낮은 자들은 외면을 받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성공의 사다리에 오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면서 삶이 피폐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높이 계시지만 낮은 자들, 연약한 자들을 아시고 살피십니다. 도우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반면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십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본문을 말해줍니다. 우리도 낮고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겸손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7절을 새번역으로 보면 “내가 고난의 길 한복판을 걷는다고 하여도, 주님께서 나에게 새 힘 주시고, 손을 내미셔서, 내 원수들의 분노를 가라앉혀 주시며, 주님의 오른손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십니다.” 고난의 한복판을 걸어도 하나님께서 능력의 오른손을 내밀어 붙잡아주시고 구원해주십니다. 눈물과 수고와 인내를 아시고 갚아주십니다. 8절 하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하는데 절대 버리지 않으시고 영원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28:20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감사할 수 없는 현실, 예배할 수 없고 기도할 수 없는 환경이지만 시인은 전심으로 감사하며, 찬양과 예배, 기도의 삶을 삽니다. 좋은 환경 속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닮아 하나님 나라 정신을 따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겸손한 삶, 낮고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느헤미야13:1-14절/다시 제자리에(25.12.05)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3절)

​성벽 봉헌식을 하며 백성들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합니다. 말씀을 통한 부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말씀이 백성들을 새롭게 합니다. 점점 더 온전케 합니다. 이들이 낭독한 내용은 1절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라는 구절입니다. 이는 신23:3-6절의 내용입니다. 암몬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유는 출애굽하여 광야 길을 걷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배척하고 잔인하게 공격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이라는 주술사에게 뇌물을 주고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였습니다.(민22-24장) 하지만 하나님은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민24:10절 “발락이 발람에게 노하여 손뼉을 치며 말하되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내 원수를 저주하라는 것이어늘 그대가 이같이 세 번 그들을 축복하였도다”

그러니 이들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말씀의 기준을 따라 분리해야 합니다. 이전 에스라 때에는 이방인과 통혼하는 문제가 있어 스10:11절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때는 관계의 단절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의 완전한 분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3절은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신앙의 순수성과 거룩함을 위해 섞이면 안 됩니다. 분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계속 이스라엘은 섞여 있었습니다. 분명 공동체에 분명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알지 못했고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 깨닫고 분리합니다. 우리도 말씀을 묵상하며 작은 부분 하나도 점검하면서 세상 속에 살지만 구별되어야 합니다. 구별된 가치관,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분리해야 할 것을 분리해야 합니다.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웠더니”(11절)

​이어지는 4-13절은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면서 충격적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인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교제하면서 도비야를 위해 성전에 큰 방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방의 원래 목적은 제사장과 성전 봉사자들인 레위사람들을 위해 예물을 쌓아 놓는 방이었습니다. 도비야는 어떤 인물입니까? 1절에서 분리해야 할 대상인 암몬 사람입니다. 산발랏과 함께 성벽 재건을 방해하며 조롱했던 인물입니다. 그런 자가 다른 곳도 아닌 하나님의 성전에, 다른 방도 아닌 성전 봉사자들을 위해 예물을 보관하는 방에 머물렀다는 것이 충격입니다. 그 일을 대제사장인 엘리아십이 주도했다는 것은 더 충격입니다.

지금까지의 흐름을 보면 너무 갑작스러운 일입니다. 모든 과정이 말씀 중심으로 회개와 은혜 속에서 회복되어 갔는데 말이지요. 하지만 6절은 이 일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설명합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있지 않을 때 일어났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32년에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에게 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처음 예루살렘에 올 때 돌아온 기간을 정하고 왔기 때문입니다(2:6절). 그렇다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때는 2:1절을 보면 아닥사스다 제20년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페르시아로 돌아간 때는 아닥사스다 32년입니다. 12년 정도 총독으로 일을 하다 돌아간 것입니다. 그 이후 일어난 일입니다. 대제사장인 엘리아십은 아마도 느헤미야가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런 일을 저지른 듯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의 행동은 진실이 아닌 가식이었습니다. 13:28절에도 보면 대제사장인 엘리아십의 손자가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아닌 사람 앞에서의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고 사람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마음 중심이 변하지 않으면 진정한 변화가 아닙니다.

6절 하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고 하는데 “며칠 후”를 새번역성경은 “얼마가 지나서”로 번역했고 아마 2-3년 후에 돌아온 것 같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로 돌아가서도 고국에 대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고 염려가 된 듯합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왔는데 짧은 기간 안에 예루살렘은 많은 것이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앞에서도 계속 강조하였듯 외형적인 건물을 세우는 것보다 내적인 신앙을 온전히 세우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성전도 성벽도 세워져 있지만 마음의 성전이 무너지니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세우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사실을 알고 도비야의 세간을 방 밖으로 다 던지고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다시 예물을 들여놓습니다.

도비야가 성전 방을 차지한 것은 하나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12:44-47절에 나온 것처럼 성전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할 것들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레위인들은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 생계를 위해 밭으로 도망합니다. 성전 중심 예배를 위해 질서있게 조직했던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신앙이 이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과연 온전할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먼저 지도자들을 꾸짖습니다. 그리고 레위 사람들을 불러 다시 제자리에 세웁니다. 오늘 본문에 “다시”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9절 “다시 그리로”, 11절 “다시 제자리로”. 그렇습니다. 다시 원래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예배의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기도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섬김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성전에도 치울 것은 치우고 다시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십자가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다시 곳간에 성전 봉사자들을 섬길 예물을 채우고 관리하는 자들을 세웁니다. 이들은 13절 하 “그들이 충직한 자로 인정됨이라 그 직분은 형제들에게 분배하는 일이었느니라” 정직하고 인정받는 사람들을 세웁니다. 그리고 바르게 분배하게 합니다. 늘 강조하지만 사람이 중요합니다.

우리 일상에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순결을 위한 분리가 필요합니다. 다시 채워야 할 것으로 마음의 성전을 채우고,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로 다시 돌아가 서야 합니다.

느헤미야12:27-47절/성벽 봉헌식(25.12.04)

느헤미야12:27-47절/성벽 봉헌식(25.12.04)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27절)

​성벽을 완공 후 말씀 중심의 신앙회복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과 새롭게 언약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성벽 봉헌식이 이루어집니다. 성벽 봉헌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전에 비하면 성벽은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있지만, 성벽이 없는 성전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백성들도 그렇습니다. 온전한 예배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성벽이 완공되어야 모든 것이 안정되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도 온전해 집니다.

그런데 성벽 공사가 쉽지 않았습니다. 내부, 외부적으로 많은 장애물과 방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이기고 완공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며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의미로, 또한 완공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봉헌식을 진행합니다.

봉헌식을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 레위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있어야 27절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포로에서 돌아온 레위인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습니다. 그리고 레위 사람들도 예루살렘 근처에서 살고 있다가 모여듭니다. 이렇게 노래하며 악기를 연주할 사람들이 준비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봉헌식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30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 정결입니다. 사람들이 정결해야 합니다. 제사장, 레위인들 그리고 백성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문과 성벽까지 정결하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정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봉사할 때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이 정결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벽 봉헌식은 특이하게 진행됩니다. 느헤미야는 백성의 지도자들을 성벽 위로 오르게 합니다. 뒤를 이어 감사 찬송하는 큰 무리가 따르게 하는데, 이들을 둘로 나누어 서로 반대쪽으로 걸어가며 찬양하게 합니다. 한 무리는 오른쪽으로 향합니다. 이 무리의 인도자는 36절 하 “학사 에스라가 앞서서”라고 합니다. 에스라입니다. 이들은 분문을 지나 샘문, 그리고 수문으로 향합니다.

에스라가 인도하는 무리와 반대로 왼쪽으로 향하는 무리는 느헤미야가 지도자입니다. 이 무리도 백성의 지도자와 찬양하는 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뒤를 따라갑니다. 화덕 망대를 지나 옛문과 어문, 그리고 양문을 지나 감옥문에 멈춥니다. 이렇게 행진하여 두 무리가 함께 만난 곳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행진은 성전 반대 쪽에서 시작해서 성전에서 만나도록 진행되었습니다.

성벽 위를 걸으며 감사 찬양하는 무리의 마음에는 큰 감격과 감사가 넘쳐났을 것입니다. 방해하는 자들이 조롱하며 비웃었습니다. 백성들이 세우려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견고한 성벽을 완공하고 그 위를 걸으며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니 감격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함께 성전에 모였을 때는 42절 하 “노래하는 자는 크게 찬송하였는데”라고 합니다. 성전이 큰 찬양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43절)

​그리고 이들은 43절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립니다. 큰 제사는 많은 예물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즐거움이 가득했습니다. 이것을 43절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라고 “즐거워하고”를 네 번이나 반복합니다. 부녀와 어린 아이까지 모두가 즐겁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즐겁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즐거움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주어졌습니까? 힘들고 어려웠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했을 때 큰 즐거움이 주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편안함과 안전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가 아니라, 힘들고 어렵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 기뻐하시는 일,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을 감당할 때 기쁨이 가득하게 됩니다.

이제 성벽 봉헌식을 마쳤으니 앞으로 계속해서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이뤄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중요한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입니다. 또한 이들이 지속적인 봉사를 하려면 이들의 생계를 채워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백성들이 드리는 예물을 곳간에 채웁니다. 거제물과 첫 열매, 그리고 십일조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힘을 다하여 노래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들의 인도로 함께 예배하는 백성들의 마음에도 즐거움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육적인 필요를 채우도록 하십니다. 또한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백성들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줍니다. 이렇게 둘은 하나가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정결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지를 돌아봅니다. 습관적인 예배가 아닌 일상의 정결함으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서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진정한 즐거움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므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수고스럽지만 하나님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