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3:1-10절/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25.08.08)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2절)

​하나님께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1-2장에서는 예루살렘 땅에 새 역사를 이루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 절망의 땅이지만 그곳이 많은 사람들과 가축들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불 성벽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그곳에 세워지는 성전, 비록 초라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3-4장은 종교지도자인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정치 지도자인 총독 스룹바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사람을 새롭게 세우십니다. 특히 중요한 사람이 대제사장 여호수아인데 본문의 내용입니다.

1절은 특이한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천사 앞에 서 있고 사탄이 그 옆에 서서 고발하고 있습니다. 마치 욥기1장에서 하나님의 어전회의에서 하나님이 온전하고 정직한 욥을 칭찬하시자 사탄이 하나님께서 욥이 까닭없이 그러겠냐고 참소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처럼 사탄은 참소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공격할까요? 3절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하는 대제사장이 더러운 옷을 입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을 사탄이 공격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책망하셔야 할 것인데, 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탄을 책망하십니다. 이어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고 하십니다. 갑자기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이야기는 한편으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출19:6절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습을 2절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로 비유하십니다. 불은 심판을 상징하는데,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 모습이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와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복잡한 심경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건축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사람이 여호수아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역시 포로에서 돌아왔습니다. 일반 백성들이 자신들은 그렇다고 해도 이방 땅에서 포로 생활한 대제사장이 거룩한 성전에서 봉사의 직무를 감당하는 것이 맞는가라는 의문도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환상을 통해서 여호수아를 새롭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4절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사실은 더러운 곳을 입고 있는 여호수아를 하나님께서 책망하시고 옷을 벗고 새 옷을 입으라고 명령하셔야 할텐데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십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여호수아의 죄악을 제거해 버리셨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가 스스로 제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제거할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서 죄를 제거해주시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어떻게 누구를 통해서 이루실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본문 8절 하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구약에서 ‘싹’은 오실 메시아를 상징합니다. 사11:1절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시자 스가랴는 정결한 관도 머리에 씌워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렇게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벗고 아름다운 옷을 입었으며 정결한 관을 쓰게 됩니다. 바로 이 모습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이며, 이 시대 성도된 우리의 모습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고 정결한 관을 쓰고 있습니다. 이 세상 어떤 명품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아름다운 옷에 걸맞는 아름다운 삶, 정결한 관에 걸맞는 정결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네가 만일 내 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키면”(7절)

​그래서 이어지는 내용이 7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키면”이라 하십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은 백성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도와 규례, 즉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도록 하시며 직무를 감당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 종 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게 하시고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를 확증하기 위해 돌을 세우십니다. 그 돌에 일곱 눈이 있다고 합니다. 보통 언약을 확증할 때 돌을 세우는데, 핵심은 돌에 일곱 눈이 있다는 겁니다. 일곱은 완전 수이고, ‘눈’은 계시록에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감찰하심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변함없고 끊임없이 보호하시고 지키실 것을 약속하시는 겁니다.

그 결과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이 말은 이스라엘이 풍요와 평안을 누린다는 표현입니다.

여전히 사탄은 참소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정죄하게 하고 초라하게 합니다. 그런 시각으로 다른 사람들 역시 정죄하고 판단하게 합니다. 이때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는 더러운 옷을 벗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주어진 정체성과 신분을 선포해야 합니다. 또한 거룩한 신분에 합당하게 말씀을 따라 순종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스가랴2:1-13절/일어나시는 하나님(25.08.07)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5절)

​스가랴가 본 첫 번째 환상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십니다. 그때 하나님의 집이 건축이 되고 예루살렘을 다시 택하여 새롭게 회복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일을 이루실 것인지를 오늘 본문에서 설명하십니다.

본문은 세 번째 환상입니다. 측량줄을 든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측량줄은 두 가지 기능을 합니다. 우리가 묵상했던 계21:15절을 보면 천사가 새 예루살렘을 측량하기 위해 금 갈대 자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이 측량은 새로운 건설을 위한 측량입니다. 그런데 암7:7-9절에는 “다림줄”이 나오는데 이 다림줄은 경건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내리신 줄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측량줄은 새로운 건설을 위해 예루살렘을 측량하는 겁니다. 그런데 다른 천사가 나타나 예루살렘을 측량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4절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 사람과 가축이 많아질 것입니다. 그래서 성벽을 두를 수 없을 정도로 큰 성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을 지키고 보호할 것인가? 5절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친히 불로 둘러싼 성벽이 되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겠다고 합니다. 당시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은 성벽이 무너지고 없습니다. 이들의 마음속에 회의가 생깁니다. 과거 견고한 성벽이 있었어도 이방 나라에 의해 공격을 받아 성벽도 무너지고 성전도 훼파되었는데 성벽이 없는 상태에서 성전만 짓는다고 과연 안전할 수 있을까? 괜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불안감이 있습니다.

그런 백성들의 마음을 아시고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친히 불성벽이 되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마치 창15:1절에서 두려움가운데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하신 것과 같습니다.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연합군과 전쟁을 했습니다. 이들의 보복이 두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방패가 되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누구도, 무엇도 하나님을 뚫고 아브라함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친히 불성벽이 되어주실 때 예루살렘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안전한 곳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셔야만 가장 안전한 삶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이 멸망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견고한 성벽이 있는 요새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시자 아무리 견고한 예루살렘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지켜주실 때 가장 안전합니다. 시127:1절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10절)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은 열방을 심판하십니다. 6절 “오호라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피할지어다”라고 하는데, 여기 북방 땅은 그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를 가리킵니다. 그곳에서 도피하라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하늘 사방에 바람 같이 돌아오게 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 북방 땅에서 나와 도피해야 하냐면? 8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너희를 노략한 여러 나라로 보내셨나니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하나님은 천사를 열방에 보내 심판하시므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을 범한 자들은 하나님의 눈동자를 범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새번역은 “너희에게 손대는 자는 곧 주님의 눈동자를 건드리는 자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눈동자처럼 아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열방을 심판하시는데, 어제 살펴본 두 번째 환상에서 네 뿔을 네 명의 대장장이가 등장해서 박살을 낸 것처럼 그렇게 열방을 심판하십니다.

이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10절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 이처럼 하나님의 함께 머무심이 가장 큰 복입니다. 그래서 11절에도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뿐만 아니라 12절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머무시고, 소유 삼으시고, 택하십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11절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라는 말씀을 통해 원래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적을 이루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나라들 가운데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는 제사장 나라가 되어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은혜와 복을 누리고 이를 통해 열방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 나라가 아닌 세상 나라가 되어 오히려 세상을 따라 살아간 것입니다. 그 결과가 멸망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회복을 통해 원래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을 이루게 하십니다. 많은 나라가 돌아오게 하십니다.

여기서 이 시대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살펴봐야 합니다. 여전히 왕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나 한 사람의 복과 평안을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한 아름다운 삶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13절입니다. “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영광의 하나님 앞에서 잠잠해야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현실을 바라보면서 입으로 말하던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소리를 닫고 잠잠하라고 하십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할 것이니 기대하라는 겁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십니다.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은 불로 둘러싼 성벽으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눈동자처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머무시고 소유 삼으시며 다시 회복하십니다. 일어나셔서 새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황무한 예루살렘을 영광의 도성으로 만드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황무한 인생을 영광의 인생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스가랴1:7-21절/넘치도록 다시(25.08.06)

●“언제까지 …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12절)

​스가랴서 전반부인 8장까지는 8개의 환상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부터 본격적으로 환상이 시작됩니다. 계시록에서도 하나님은 요한을 통해 환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만큼 당시 성도들의 현실이 절망적이었다는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은 그림 언어를 통해 선명하게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시므로 위로와 소망을 주셨습니다. 스가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환상을 본 때가 7절 “다리오 왕 제이년 열한째 달 곧 스밧월 이십사일”입니다. 1절에서 스가랴가 활동을 시작한 시기가 “다리오 왕 제이년 여덟째 달”이었으니 약 3개월의 시간이 지난 때입니다. 학개서를 보면 우여곡절 끝에 성전 건축이 시작되었는데 학1:15절 “그 때는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이십사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전 건축이 시작되고는 5개월이 지난 시점입니다. 이때 짓는 성전은 과거 솔로몬의 성전에 비하면 규모가 작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과연 이 초라한 성전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영광이 회복될 수 있을까하는 절망감이 들기도 한 때입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은 환상을 통해 회복의 메시지를 전해주십니다.

첫 번째 환상은 붉은 말을 탄 사람이 등장합니다. 골짜기 화석류나무 사이에 서 있습니다. 본문에는 화석류나무는 상록수로 2m까지 자라며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나무라고 합니다. 이 나무는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과 새로운 역사를 기대하게 합니다. 나무 사이에 붉은 말과 더불어 자주빛 말과 백마가 있습니다. 계시록에서는 말들이 전쟁을 위해 등장했는데, 본문에서는 10절 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입니다. 땅을 돌아보는 말들이었습니다.

땅을 돌아본 후 결과를 보고하는데 11절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 보니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하더이다”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일인데, 바로 이어지는 12절에 천사가 하나님께 탄원을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과거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진노하셔서 이방 강대국에 의해 멸망 당하게 하시고 그때 약속하신 70년의 포로 생활이 끝났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고 회복시켜 주시지 않느냐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평안과 조용함은 이스라엘 고통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당시 페르시아와 같은 강대국이 여전히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있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그곳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 강대국들에게 평안과 조용함이 아니라 혼란과 시끄러움이 임해서 그들이 흔들리고 무너져야 이스라엘에게는 완전한 회복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세상은 강하고 요동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너무도 약하고 초라합니다. 비참합니다. 이런 현실이 바뀌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절망합니다.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17절)

​하나님은 탄원하는 천사에게 13절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절대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인가? 14-15절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안일한 여러 나라들 때문에 심히 진노”하십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 중심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무자비하게 정복했던 나라들에게 진노하실 것입니다.

16절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에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고 하십니다. 1:3절에서는 이스라엘이 먼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나님께서 돌아오시겠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돌아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비극은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떠나시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없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성전을 건축하게 하시고 그 안에 임재하십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백성들의 눈에 성전이 이전 성전에 비해 작고 초라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곳에 함께 하시며 역사하실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하나님은 돌아오셔서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의 크기와 규모 화려함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십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는 작은 이동식 텐트인 성막에서도 이스라엘과 기쁨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인도하시고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크고 화려한 성전이 아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화려한 솔로몬 성전이 무너진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동일합니다. 바른 관계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다시” 회복시켜주십니다. 17절 한 절에 “다시”라는 단어가 4번이나 반복됩니다. “다시 외쳐”, “다시 풍부”, “다시 시온을 위로”,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다시”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를 위해 열방을 심판하십니다. 18-21절 두 번째 환상이 그 내용입니다. 11절에서 온 땅의 평안하고 조용하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이런 제국들을 심판하십니다. 18절 “네 개의 뿔”이 보이는데 ‘4’는 계시록에서도 사방 모든 곳을 가리켰습니다. 그렇다면 네 개의 뿔은 세상 모든 제국들을 의미합니다. 뿔은 권세와 능력을 의미합니다. 자기 힘만 믿고 다른 이들을 압제하며 무자비하게 대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19절 하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흩뜨린 뿔”입니다. 하나님은 대장장이 네 명을 등장시켜서 네 개의 뿔을 깨뜨리십니다. 마치 대장장이의 망치로 뿔을 박살내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으로 인한 신원함을 갚아주십니다.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십니다.

계시록과 스가랴는 힘든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로 통치하시며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하나님 마음 중심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습니다. 성도인 우리가 있습니다. 가끔 버림받았다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함께 하시면서 “다시” 회복시키시고, 일으키시고, 시작하게 하시고, 꿈꾸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스가랴1:1-6절/돌아오라(25.08.05)

●“여호와의 말씀이 …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1절)

​우리가 지금까지 묵상했던 요한계시록은 제국의 박해 아래 믿음 때문에 고통 당하던 성도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기 위한 메시지였습니다. 오늘부터 묵상하는 스가랴는 포로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시리라 기대했는데 기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 낙심하고 절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주시는 내용입니다.

1절 “다리오 왕 제이년 여덟째 달에” 페르시아 다리오 왕 제이년은 BC 520년 경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돌아온지 20여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스가랴와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선지자가 학개입니다. 학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성전건축에 나서도록 강하게 질타했던 선지자입니다. 학1:8절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학개가 활동을 시작한 시점이 학1:1절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라고 합니다. 스가랴는 같은 해 8월이고, 학개는 6월입니다. 학개의 독려로 성전건축이 시작되었는데 이때가 학1:15절을 보면 “그 때는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이십사일이었더라”고 합니다. 성전건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스가랴서의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 건축을 시작하기까지 20여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포로에서 귀환할 때는 큰 기대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다윗이 누렸던 영광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이방 나라들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우뚝 세워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을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성이었던 예루살렘은 황폐하였고 이미 다른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짓는 일을 방해합니다.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일을 뒤로하고 자기 살기 위한 일에 집중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백성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점점 희미해져간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것인가 회의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런 시기에 스가랴가 등장해서 말씀을 선포합니다. 스가랴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입니다.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3절)

​스가랴가 선포한 첫 메시지는 위로와 격려가 아닌 “진노”에 관한 것입니다. 2절 “여호와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그래서 4절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본받지 말아야 할까요? 4절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과거 이스라엘 멸망 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악한 길을 걷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가 세상과 다른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는데, 정체성을 상실하고 세상의 길을 걷습니다. 탐욕을 위해 우상숭배하고 착취하는 길을 걷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 경고하셨습니다. 돌아오라고 외치셨습니다. 돌아오지 않으면 멸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고난을 경험한 사람들이 바로 지금 스가랴의 말씀을 듣는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역시 다시 기로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버리고 내 힘으로, 세상처럼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과거 조상들의 역사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실패와 멸망의 역사를 되풀이하면 안 됩니다.

이를 위해 3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여전히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만군의 여호와”가 다섯 번이나 반복됩니다(3,4,6). 요한계시록에서 강조한 것처럼 보좌 위에 앉으셔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능력과 권세의 하나님이십니다. 악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들 위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때 불안과 두려움이 임합니다. 반드시 이루실 약속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돌아오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기대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힘들고 절망적인 현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돌아오십니다. 영광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빛이신 하나님으로 회복과 치유가 일어나고 어둠이 빛으로 변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5-6절에서 말씀의 영원함을 설명하십니다. 과거 말씀을 들었던 조상들도 사라지고 없습니다.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들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6절 “내가 나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한 내 말과 내 법도들이 어찌 너희 조상들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말씀하신 대로 임하고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불순종에 대해서 경고했는데 그대로 이루어져 멸망한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 순종과 그 결과를, 그리고 불순종과 그 결과를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에 순종해서 복된 결과 누리길 원하십니다.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배자의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향한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신실하게 일하십니다. 현실이 우리 기대처럼 되지 않을 때 낙심하지 않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기억하고 기대와 소망으로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 확신하면서 매일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고 순종하는 복된 삶이 됩시다.

요한계시록22:6-21절/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5.08.04)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7절)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런데 6-7절은 계시록의 서론인 1장과 비슷한 구절들이 나옵니다. 이처럼 서론과 결론에 반복되는 내용이 계시록의 강조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6절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라고 하는데 1:1절은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은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입니다. 용과 짐승의 패배와 어린양의 승리가 오지 않을 것 같지만 약속의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내가 속히 오리라”로 이어집니다. 이 말씀이 오늘 본문에 세 번 반복됩니다(7,12,20). 이것을 반복해서 강조하시는 이유는 당시 성도들의 기도를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고난이 언제까지입니까?, 언제 주님 오셔서 완전한 승리를 주십니까?”라고 기도했는데 주님은 “내가 속히 오리라!”로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당시도 “속히”오신다고 했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까지 주님은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거짓말을 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는 언제든지 주님이 오실 수 있는 때입니다. 이것을 말세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말세지말, 즉 주님 오심이 더욱 가까워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니 근신함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7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입니다. 이 말씀 역시 서론인 1:3절에 나왔던 말씀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1:3절은 읽고, 듣고, 지키라고 했다면 22:7절은 “지킴”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박해와 위협 속에서도 신실하게 믿음의 길을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진정한 복은 핍박이 없고 문제없는 삶이 아닌 고난 속에서도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말씀을 지키는 삶이라고 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0절)

​8-15절은 계시록의 핵심을 정리합니다. 첫째는 “하나님만 경배하라”입니다(9절). 요한은 말씀을 전해주는 천사에게 경배하려 합니다. 그러자 천사가 만류하면서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19:10절에도 나왔습니다. 당시 성도들에게 이 내용이 중요했다는 겁니다. 하나님 말고 다른 것에 대한 경배 위험이 있었습니다. 천사숭배 사상도 있었다고 하고, 황제숭배도 강요했습니다. 그런 시대 속에서 오직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 한분 뿐이십니다. 지금 시대도 경배를 받으려는 것들이 많습니다. 돈이, 사람이, 과학 기술이 그렇습니다. 이런 시대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고 하나님만 예배합시다.

두 번째는 13절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고 하십니다. 시작과 마침이라는 같은 내용을 세 번 반복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십니다. 불안하고 어두운 현실이지만 이것 역시 주관자되시는 하나님의 손길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승리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14절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라고 합니다. 앞에서는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면 여기는 옷을 빠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옷을 빤다는 것은 매일 자신을 말씀으로 돌아보며 죄를 고백하고 성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을 말합니다. 큰 성 바벨론 속에서 세상 정신을 따라 살지 않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16절에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설명합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라고 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계시록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런데 말씀을 주시는 예수님이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인 것을 알겠는데, “다윗의 뿌리”라고 하십니다. 다윗은 근원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십니다. 그러니 다윗의 근원이 되십니다. 이 주님께서 교회를 위하십니다.

또한 “광명한 새벽별”입니다. 당시 어둠이 짙습니다. 아침이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반드시 어둠 가운데 빛을 비춰주시고 밝은 새벽이 오게 하십니다.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게 하시고 승리를 주십니다. 그러니 신부인 교회로 나오는 자들만이 목마른 영혼에 생명수를 공급받습니다. 참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말씀을 마치며 경고의 말씀도 주십니다. 예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 자들에게 재앙을 더하실 것이라 하십니다. 계시록의 말씀에 내가 본 천국과 같은 신비한 이야기를 덧붙여서 말씀의 의미를 변질시켜서는 안됩니다. 성도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 말씀을 이용해서도 안됩니다. 또한 예언의 말씀을 제하여서도 안됩니다.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고, 순종하기 힘든 내용은 외면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말씀을 우리 삶에 중심에 두고, 잘 읽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순종하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20절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님은 “속히 오신다”고 다시 한번 말씀하시며 위로하십니다. 성도들은 이 약속을 확신하면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로 화답합니다. “마라나타”입니다. 이 말이 당시 성도들의 인사였다고 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주님의 오심을 확신하며 믿음과 인내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주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속히 오리라!”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기대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주님 오시지 않을 것처럼, 아니면 지금 말고 나중에 오셨으면하는 삶은 아닌지 돌아보면서 매일 “마라나타”의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시며, 예수님은 “광명한 새벽별”이 되십니다. 모든 것 주관하시며 반드시 찬란한 새벽을 열어주실 것을 확신하며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는 삶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