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11:1-17절/어리석은 목자들(25.08.18)

●“너는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라”(4절)

​어제 본문인 10:2-3절은 “백성들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숫염소들을 벌하리라”는 말씀이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와 구름을 주관하셔서 풍요를 주시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게 된 이유는 이스라엘의 목자인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잘못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스라엘 목자들의 모습이 어떠하였으며, 그런 목자의 인도를 받는 백성들의 처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3절은 목자들의 모습을 나무에 비유해서 설명합니다. 멋지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등장합니다. 레바논 백향목, 바산의 상수리나무 등입니다. 그런데 반복되는 말이 “곡하다”와 “쓰러졌다”입니다. 곡하는 소리의 정체는 3절 “목자들의 곡하는 소리”이며 “어린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입니다. 목자들이 곡하고 쓰러질 것입니다. 무엇 때문인가? 나무들을 수식하는 단어들을 보면 “아름다운”, “무성함”, “영화로움”, “자랑”입니다. 목자의 사명은 양 떼를 돌보는 것인데 이들은 자신들의 아름다움과 영광, 자랑을 추구했습니다. 자신들을 위해 양 떼를 희생시켰습니다. 우리 위해 생명을 주신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4절에 스가랴 선지자에게 목자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는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실이 잡혀 죽을 양 떼와 같습니다. 거짓 목자들은 양 떼를 사고 팝니다. 사는 자들은 착취하면서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면 파는 자들은 돈을 벌었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이들의 안중에 백성들은 없습니다. 종교지도자와 정치지도자들이 이처럼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백성들을 이용하는 나라는 소망이 없습니다. 이런 욕망은 지도자들에게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사랑과 정의는 사라지고 불법과 욕망이 난무한 동물의 세상이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이 이런 나라를 만든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방 나라를 들어 이스라엘을 치게 하십니다. 목자들의 죄악에 대해 징벌하시는 겁니다. 또한 이렇게 해야 돌이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잡혀 죽을 양떼를 돌보는 과정에서 막대기 둘을 취합니다. 7절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합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양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고, 또한 연합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세 명의 거짓 목자를 제거합니다. 이유는 8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목자의 사명을 맡기셨는데, 하나님의 성품대로 양들을 돌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짓 목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마음껏 채우는데 하나님이 걸림돌입니다. 말씀이 부담입니다.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그러니 제거될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12절)

​9절에 선지자는 충격 선언을 합니다. 새번역 “그런 다음에 나는 양 떼에게 말하였다. “나는 더 이상, 너희를 돌보는 목자 노릇을 하지 않겠다. 죽을 놈은 죽고, 망할 놈은 망하여라. 그러고도 남는 것들은 서로 잡아먹어라.”” 목자들만 문제가 아닙니다. 양들도 문제입니다. 목자의 사명을 선지자가 더 이상 참고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꺾어 버립니다. 이는 언약이 폐하여진 것입니다. 분명 언약은 하나님의 이스라엘 향한 보호와 사랑을 담고 있을 것인데, 이것이 폐해졌다는 것은 하나님은 보호가 사라진 것입니다.

선지자는 양들에게 품삯을 요구합니다. 돈을 요구함이 아니라 목자의 사명을 이들이 얼마나 가치 있게 여기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이들은 은 삼십 개를 지불합니다. 이 값은 노예의 몸값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목자의 직무를 소중한 것으로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3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고 하십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토이장이에게 은 삼십을 던집니다. 이 말씀은 마27:5-8절에서 예수님을 판 가룟유다의 죽음에 다시 등장합니다. 이때 선지자는 연합이라는 두 번째 막대기를 꺾습니다. 이렇게 은총도 연합도 깨어집니다.

하나님은 다시 선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15절 새번역 “주님께서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번에는 쓸모 없는 목자로 분장하고, 그 구실을 하여라.” 이를 통해 거짓 목자들의 실상이 드러납니다.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않고, 흩어진 자를 찾지 않습니다. 상한 자를 고치지 않고,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않습니다. 대신 살진 자의 고기를 먹고 굽을 찢어 버립니다. 목자의 사명을 망각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무서운 심판을 내리십니다. 17절 “화 있을진저 양 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의 팔과 오른쪽 눈에 내리리니 그의 팔이 아주 마르고 그의 오른쪽 눈이 아주 멀어 버릴 것이라 하시니라”

목자가 제대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이처럼 혼란이 찾아옵니다. 우리도 각자 리더의 자리에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맡기셨음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으로 잘 감당해야 합니다. 또한 스가랴서는 참된 목자이신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세상에 우리를 인도하려는 것들이 많은데 참 목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잘 따라가므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은혜를 매일 경험합시다.

스가랴8:14-23절/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25.08.14)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16절)

​7-8장이 스가랴 전반부 마지막 내용입니다. 그 시작은 금식에 대한 질문입니다. 성전이 건축되고 있는데 계속 금식을 해야 하는지를 물었고 이에 대한 대답으로 하나님은 7장에서는 과거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런데 8장에서는 그런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회복을 금식에 대한 질문과 연결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격노하셨고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셨습니다. 여기 “뜻하다”의 원어가 ‘자맘’인데요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성전에 무너졌습니다. 그것을 슬퍼해서 금식하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15절에 “이제 내가 다시”라고 말씀하시면서 과거에 재앙 내리시고 뜻하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셨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작정이기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회복하십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 이제는 은혜를 베푸시는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완전히 변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계속하시는 것을 보면, 여전히 이스라엘은 과거 조상들의 모습을 따라갈 위험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와 상관없이 은혜를 베푸시기로 작정하십니다. 이유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잘못에 대한 70년이라는 징계의 시간을 거쳤기에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내용이 16절입니다.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고 합니다. 먼저 사랑하시고, 먼저 은혜를 베푸신 후, 은혜에 합당한 행동을 요구하십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행위가 먼저가 아니고 은혜가 먼저입니다. 그리고 은혜 받은 자 답게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러니 그 큰 사랑을 알고, 은혜를 기억하며 이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은혜를 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6-17절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이미 7:9-10절에 나왔던 말씀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않았던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대단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신비한 능력을 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대신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고,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하며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않는 겁니다. “이웃”과 “서로”라는 단어를 통해 하나님은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원하십니다. 서로 해하지 않고 사랑하며 은혜를 나누길 원하십니다.

또한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는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맹세에 사용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은 바른 관계입니다. 위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옆으로 내 곁의 사람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반드시 “진리”가 자리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8장은 “진리”를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3,8,16,19). 그렇습니다. 진리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21절)

​금식에 대한 질문에 답을 주십니다. 7장에는 5월과 7월, 두 번 금식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본문 19절을 보면 네 번의 금식이 나옵니다. 4월, 5월, 7월, 10월입니다. 모두 예루살렘과 성전의 무너짐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슬픔의 금식 절기가 변하여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될 것이라 하십니다. 무너졌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회복하시고 다시 세우십니다. 성전도, 예루살렘도 그리고 성벽도 세우실 것입니다. 거리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도시가 될 것입니다. “기쁨, 즐거움, 희락”이라는 같은 의미의 단어를 세 번 반복하시면서 반드시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이 19절 하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고 하십니다. 그런 기쁨이 회복되면 이제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진리와 화평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회복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회복된 이스라엘의 모습을 통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많은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 것입니다. 21절 “이 성읍 주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하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서로 예루살렘으로 먼저 가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를 찾고 은혜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이 내용이 22절에도 반복됩니다. 과거 주변 나라들은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금식의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스라엘이 만난 하나님을 만나고, 이스라엘이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자 예루살렘을 찾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은 과거 하나님께서 처음 선택하셨던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출19:6절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 나라는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복됨을 보고 주변 나라들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요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며, 그들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가 아닌 세상 나라를 닮아 살았습니다. 그 결과가 금식이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제사장 나라로 회복시켜주십니다. 많은 주변 나라들이 이스라엘이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게 될 것입니다.

23절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고, 이스라엘과 함께 가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이 시대 우리 신앙생활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먼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 사랑을 알고, 진리의 말씀 안에서 위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 옆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기쁨을 누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함께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그런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스가랴8:1-13절/전에는 그러나 이제는(25.08.13)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3절)

​7장에서 백성들 가운데 금식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성전이 파괴된 것을 슬퍼하며 포로 생활 70년 동안 금식했는데 이제 성전이 새롭게 지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계속 금식을 해야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이 질문에 하나님은 금식이 과연 누구를 위한 금식이었는지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이스라엘 자신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는지. 그러시면서 과거 선지자들의 외침을 듣지 않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오늘 본문도 그런 책망의 메시지가 이어질 것 같은데 완전히 분위기 반전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회복시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2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고 하십니다. 이 구절은 새번역이 이해가 쉽습니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나는 시온을 열렬히 사랑한다. 누구라도 시온을 대적하면 용서하지 못할 만큼 나는 시온을 열렬히 사랑한다”입니다. ‘질투’의 원어는 ‘헤마’인데 의미가 “제어할 수 없는 강력한 힘, 뜨거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뜨겁게,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들은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을 반드시 새롭게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의아합니다. 왜 하나님은 바로 앞 7장에서는 그렇게 책망을 하시더니 갑자기 8장에서는 이렇게 뜨거운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바로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8절도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깨닫게 하시기 위해 잠시 고통을 주셨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뜨겁게 이스라엘을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을 멈추게 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사랑하시고 회복시켜주십니다. 사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회복의 시작은 하나님의 돌아오심입니다. 3절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과거 이스라엘은 화려한 솔로몬 성전이 있었고 풍요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과 하나님은 함께 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떠나십니다. 하나님께서 떠난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멸망 당하고 맙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반대입니다. 화려한 성전도 없습니다. 작은 성전이 지어지고 있으며, 예루살렘은 황량하기 그지없습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하나님께서 돌아오십니다. 함께 거하십니다. 그리고 진리의 성읍으로 거룩한 성산으로 예루살렘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아무리 초라하고 연약해도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며 아무리 거대하고 화려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회복의 그림을 보여주시는데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남자와 늙은 여자들이 다시 앉을 것이고,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뛰놀게 될 것입니다. 과거 선지자들은 예루살렘의 심판을 설명하면서 거리에 사람들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렘33:10절). 그런데 이제는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며 활기찬 성읍이 됩니다. 특히 약자들인 노인들과 어린이들이 행복을 누리는 복된 성읍이 될 것입니다. 남녀노소,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 차별없이 함께 어우러지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에 아마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현실이 어떤데 과연 그런 날이 온다는 말인가? 그래서 6절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야 어찌 기이하겠느냐”고 하십니다. 백성들은 과연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라고 생각하지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세상 어디에 있든지 인도하여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하십니다.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9절)

​이런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9-13절 앞과 뒤에 반복되는 말이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입니다(9,13). 이 말씀은 과거 전쟁을 앞둔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라는 겁니다. 과거 전쟁에서 승리케 하신 하나님께서 여전히 지금도 함께 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신뢰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전 건축을 앞두고 백성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눈에 보이는 문제를 바라보며 낙심하지 말고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선포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손을 견고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돌아와 함께 거하시니 하나님 이전과 이후는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10절 “전에는”과 11절 “이제는”이 대조를 이룹니다. 전에는 너무 어려워서 삯을 받지 못했습니다. 주변 원수들로 인해서 평안히 출입하지 못하고 두려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평강의 씨앗을 얻을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하늘은 이슬을 내릴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임할 축복을 농사의 이미지로 보여주십니다. 그 결과 12절 하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 또한 13절은 이전에는 저주가 되었지만 이제는 복이 되게 하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성전 삼으시고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 이전과 이후의 삶을 다르게 하실 것입니다. 회복과 평안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힘들어도 빛을 비춰주시고 소망의 미래를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범사에 손을 견고히 해야 합니다. 두려움이 아닌 만군의 여호와,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기대하면서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진리를 따라 공의의 삶을 살아갑시다.

스가랴7:1-14절/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25.08.12)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3절)

​스가랴1-8장이 전반부인데, 6장까지 8개의 환상에 관한 내용이 나왔습니다. 환상을 통해 하나님은 분명한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 7-8장은 금식과 관련된 내용인데, 참된 회복을 위해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주어지는 시기가 1절 “다리오 왕 제사년 아홉째 달 곧 기슬래월 사일”이라고 합니다. 스가랴의 예언이 시작된 때는 1:1절 “다리오 왕 제이년 여덟째 달”이었습니다. 그리고 환상을 보기 시작한 때가 1:7절 “다리오 왕 제이년 열한째 달”이었으니까 지금은 2년의 시간이 흐른 뒤입니다. 그렇다면 성전 건축이 시작되어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입니다. 즉 황량한 예루살렘 땅에 가시적인 성전이 완성되어가고 있는 시점입니다.

이때 벧엘 사람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3절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여기 울며 근신한다는 것은 “애곡하면서 금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들은 5월에 금식했습니다. 그런데 5절에 가면 5월 뿐만 아니라 7월에도 금식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금식의 기간이 70년 동안입니다. 즉 힘든 포로 생활을 하면서 금식을 한 것입니다.

5월에 금식한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달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멸망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사건입니다. 그래서 애통하며 금식했습니다. 7월 금식의 이유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통치자로 ‘그달랴’라는 인물을 세웠는데 그가 암살을 당한 달입니다. 나라가 멸망하여 왕이 없는 상황에서 최고 통치자가 죽은 일을 애통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포로에서 돌아왔고, 무너졌던 성전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금식해야 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질문을 통해서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오히려 다시 질문하십니다. 5절 하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라고 물으십니다. 2번이나 “나를 위하여”라고 하십니다. 과연 금식이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는지 돌아보라는 겁니다. 그것을 6절에서는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고 여기서도 2번 “너희를 위하여”를 반복하시면서 이들의 금식이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지적하십니다. 즉 금식했지만 자신들의 신세가 비참함을 애통한 것입니다. 더 중요한 왜 멸망했으며 회복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전 실패의 역사가 다시 되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눈에 보이는 성전이 있었지만 멸망했습니다. 지금 성전에 다시 세워지지만 성전이 이스라엘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과거를 돌아보며 다시 시작해야 할 중요한 시점입니다.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이 있지 않으냐”(7절)

​그래서 하나님은 과거의 역사를 설명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평안히 거할 때가 있었습니다. 이때 7절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이 있지 않으냐”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외치셨습니다. 그 내용이 9-10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지켜야할 네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9절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입니다. 재판을 굽게해서 억울한 사람들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돈과 힘이 있다면 편을 들어주고, 그것이 없다고 없는 죄를 짊어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두 번째는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 노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이미 경험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인애와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10절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입니다. 세상은 약육강식입니다. 정글의 법칙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런 세상과 반대되는 나라를 만들기 원하셨습니다. 가장 약한 자들이 존중과 도움을 받는 세상,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네 번째는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입니다. 내가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짓밟고, 다른 사람은 어떻든지 나만 잘되는 세상은 결국은 함께 무너집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이스라엘이 세상과 다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길 원하셨습니다. 제사장 나라가 되어 세상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세상을 닮아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세상과 다르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은 심하게 말하면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깨닫고 회복하도록 하시기 위해 70년 포로 생활이라는 고통의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지금 무엇보다 바로 이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실패의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입니다. 이것이 11-13절에 다섯 번이나 반복됩니다. 등을 돌리고 귀를 막고 듣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금강석같게 하였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새기지 않은 겁니다. 이런 백성들에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은혜와 보호가 아닌 진노를 내리십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강대국 때문이 아니요 하나님 때문입니다. 가장 슬픈 내용은 13절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한 것처럼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렀는데 이스라엘은 듣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불러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실 것입니다. 깨달음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새로운 출발의 자리에 섰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과거 실패의 이유를 알고 반복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희망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고 정체성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건물 성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백성들의 삶이 중요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신앙생활하고 있습니까? 내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를 구할 때 가장 복된 삶입니다. 이 순서가 바뀌면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불러주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제사장 나라로서 하나님 백성다운 아름다운 삶을 살아갑시다. 우리가 머무는 곳을 황폐한 땅이 아름다운 곳이 되게 합시다.

스가랴6:1-15절/이같이 되리라(25.08.11)

●“북쪽에서 내 영을 쉬게 하였느니라 하더라”(8절)

​스가랴가 본 마지막 여덟 번째 환상입니다. 그동안 보았던 환상을 잠깐 정리하면, 첫 번째는 화석류나무 사이 붉은 말을 탄 사람의 환상입니다. 두 번째는 네 개의 뿔과 네 명의 대장장이, 세 번째는 측량줄을 손에 잡은 자, 네 번째는 대제사장인 여호수아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심, 다섯 번째는 순금 등대와 두 감람나무, 여섯 번째는 날아다니는 두루마리, 일곱 번째는 에바 속 여인 환상이었습니다. 이 환상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강조하면서, 그 시작인 성전 건축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그 중심에 중요한 두 사람인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이 스룹바벨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본문의 마지막 환상에는 네 병거가 등장합니다. 두 산 사이에서 병거가 나오는데 특이한 것은 그 산이 “구리산”입니다. 이것은 아침 햇살이 산에 비친 모습을 말합니다. 새벽 빛이 비치고 있다는 겁니다. 어둠이 걷히며 아침이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회복의 아침을 열어주십니다.

병거를 모는 말들이 붉은 말들, 검은 말들, 흰 말들, 그리고 어룽진 말들입니다. 스가랴는 이것이 무엇인지를 천사에게 묻습니다. 5절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새번역은 “그 천사가 나에게 대답하였다. 그것들은 하늘의 네 영이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을 뵙고서, 지금 떠나는 길이다.”로 번역합니다. 쉽게 설명하면 “네 바람”은 “네 영”이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이루는 여호와의 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명을 받은 후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떠나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아무리 현실이 어두워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여전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일하고 계시며 머지 않아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이 중 검은 말이 북쪽을 향합니다. 흰 말도 그 뒤를 따릅니다. 어룽진 말은 남쪽을 향합니다. “네 바람”이 등장했기에 우리는 말들이 동서남북으로 가지 않을까 짐작하는데 향하는 곳이 북쪽과 남쪽입니다. 물론 7절을 보면 “땅에 두루 다닌다”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어느 곳도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난 곳이 없습니다. 하지만 8절 보면 특히 북쪽에 집중합니다.

이들이 북쪽과 남쪽을 집중적으로 향하는 이유는 이곳에 강대국들이 자리하고 있고 그러기에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이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쪽은 바벨론이 통치하고 있습니다. 남쪽은 애굽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바벨론에는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병거들이 향한다는 것은 강대국들을 심판하고 그곳에 머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8절은 “북쪽에서 내 영을 쉬게 하였느니라 하더라”고 표현합니다. 새번역은 “북쪽 땅에서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다”로 번역합니다.

이 마지막 환상은 첫 번째 환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붉은 말을 탄 자가 등장하고 다른 말들이 등장해서 세상을 두루 다닙니다. 그리고 전하는 내용이 1:11절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하더이다”고 했습니다. 세상이 평안하고 조용하면 좋을 것 같은데, 1:12절은 “여호와의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라고 부르짖습니다. 즉 강대국의 평안은 이스라엘과 같은 나라들의 고통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강대국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 돌아보십니다.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13절)

​이렇게 바벨론에서 돌아온 자들의 이름이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입니다. 이들이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어가 은금을 모아서 면류관을 만들어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웁니다. 이 내용이 14절에도 다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름이 좀 다릅니다. “헬렘과 도비야와 여다야와 스바냐의 아들 헨”으로 되어 있습니다. “헬대가 헬렘, 요시아가 헨”으로 되어 있는데 아마 별명이 사용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내용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하나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자들과 지금까지 고국에 머물던 자들 사이 갈등이 있을 수 있는데 이들이 함께 면류관을 만듭니다. 더 나아가 15절은 “먼 데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라고 합니다. “먼 데 사람들”은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방인들까지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하나가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이들이 만든 면류관이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워집니다. 이것은 영광과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3장에서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대제사장을 향한 백성들의 마음이 그랬을 수 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대제사장이 과연 성전 직무를 잘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시고 정결한 관을 씌워주셨는데, 여기서는 백성들이 함께 만든 면류관을 씌워주며 영광을 회복시켜 줍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더불어 중요한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12절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싹”이 다시 등장합니다. 보통 메시아에 대한 표현으로 이해하는데 여기서는 분명하게 성전을 건축하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싹”은 일차적으로 스룹바벨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13절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고 합니다. 성전 건축과 이후 이스라엘이 회복되는데 두 사람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되어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며 함께 일해야 합니다. 그래서 4장에서는 순금 등대로 상징되는 성전이 두 감람나무(여호수아와 스룹바벨)를 통해서 기름을 공급받는 환상이 등장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가랴는 15절 하 “너희가 만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진대 이같이 되리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대해야 합니다.

​아무리 현실이 어두워도 하나님은 반드시 새벽을 여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여전히 하나님은 일하시며 뜻을 성취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신뢰하며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큰 일을 기대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되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길 기뻐하십니다. 많은 차이와 다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될 때 다름이 오히려 공동체를 더 아름답고 풍성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순종을 통해 이루어짐을 기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