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20절)
요한복음은 창세기와 비슷하게 시작합니다. 1: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반복해서 ‘말씀’을 강조하는데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천지 만물 창조사역에 함께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좋은데, ‘말씀’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인데요, 이 단어가 유대인들에게는 잠언 8장에 나오는 ‘지혜’였고 더 나아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를 가리킬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또한 이방인인 헬라인들은 철학적 사고를 하면서 우주를 지배하는 어떤 원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로고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로고스’라는 단어가 유대인들에게는 “당신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이분이다!”라는 선언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당신들은 신이 존재하는 것 같다라고 생각하는데 그분이 바로 로고스이신 예수님이다!”라고 선언하는 겁니다. 탁월한 단어 선택입니다.
요한은 ‘로고스’이신 예수님을 곧바로 4절에서 생명과 빛으로 연결합니다. 우리 삶에 예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죽음이요 어둠입니다. 9절 보면 예수님은 참 빛으로 각 사람에게 빛을 비추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외면합니다. 자신들의 기대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합니다. 창조주를 피조물이 인정하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을 알고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우리가 이 특권과 권세 누리고 있음이 감사일 뿐입니다.
그런데 저자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가장 먼저 예수님이 아닌 자를 소개합니다.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 이야기가 1장에서 많이 반복됩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메시아로 주목하고 기대했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저자 요한은 6-8절까지 세례요한은 ‘사람’이고 그의 사명은 ‘증언’이라는 것을 반복 강조합니다. 8절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고 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절)
그리고 오늘 본문은 세례요한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했으며, 예수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소개합니다. 세례요한에게 특사단이 파견되어 19절 “네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세례요한은 드러내어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는 엘리야가 아니라”, “나는 선지자가 아니라”고 답합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누가 아닌지”를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인기가 있어지면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만 있어도 인기가 더 치솟을 겁니다. 영광과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알고 단호하게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오직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예수님 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요한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마17:12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라고 하셨습니다. 즉 세례요한을 엘리야라고 하셨습니다. 말라기서를 보면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와 같은 사람을 먼저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세례요한이 그 엘리야입니다. 하지만 당사자인 세례요한은 자신을 그런 특별한 존재라고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일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세례요한의 대답에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누구냐?” 요한의 답은 23절 하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합니다. 사40:3절을 인용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마치 왕이 등장할 때 그 길을 미리 준비하는 역할이 자신의 사명이라는 겁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소리라고 합니다. 그는 소리는 사라지고 말씀만 기억되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은 사라지고 예수님만 드러나길 원했습니다. 예수님만 흥하고 자신은 쇠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또한 자신은 27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합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은 높고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34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런 소개에 사람들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을 겁니다. 당시 이들은 정치적, 경제적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의 강한 손아귀에서 이스라엘을 구해줄 강력한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29절 세례요한은 자신에게 나오는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합니다. “세상 영광 지고 가는 하나님의 숫 사자”가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여기 어린양은 구약 출애굽기에 나오는 유월절 어린양을 의미합니다. 어린양의 피를 집문에 바르므로 장자의 생명을 구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는 생명을 얻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본문은 우리의 문제가 정치, 경제적인데 있지 않다는 말해줍니다. 그것이 해결된다고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죄’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죄의 문제는 오직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이 생명이요 빛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오직 주님만을 높이며 주님께만 영광돌립시다. 세상 죄를 지고 자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음에 감사하며 오늘 하루 하나님의 뜻을 아름답게 이루어 갑시다.
0개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