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2절)
1-2절에는 ‘변론’이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법정에 세우시고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시는 장면이 연상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문제가 심각한데 이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증인으로는 2절의 “산들과 견고한 지대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산과 땅이 항상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보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답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변론하시는 이유는 3절 때문입니다.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괴롭게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6절부터의 말씀을 통해 보면 아마도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을 무거운 짐으로 느낀 것 같습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안식일에 그리고 절기마다 다양한 제물과 방법으로 제사드리는 일이 부담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언약백성으로 세상과 다르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 섬기는 것이 괴롭고 힘들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없이 쉽게 살면되는데 왜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 하느냐고 불만을 토합니다.
이런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무엇인 문제인지를 알려주십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잊은 겁니다. 그래서 5절에는 “기억하라”가 반복됩니다. 백성들이 기억할 것은 먼저 4절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입니다. 400년 애굽 노예생활하던 백성들을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자유를 주셨습니다. 백성들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또한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 인도자를 세워주셔서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5절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발람의 이야기를 자주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기 위해 모압 왕 발락이 거짓 선지자인 발람을 돈을 주고 매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발람이 저주가 아닌 축복을 하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싯딤은 본격적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2명의 정탐을 보낸 장소입니다. 그리고 길갈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머문 곳으로 가나안 정복의 전초기지가 된 장소입니다.
그렇다면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항상 함께 하였습니다. 이 은혜를 기억한다면 하나님을 향한 제사가 부담이 아닌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면서 꼭 기억하고 회복해야 할 부분이 이것입니다.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십자가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예배가 부담이 아닌 하나님과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지는 기쁨과 감격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향한 섬김이 은혜와 영광이 될 것입니다.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8절)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일 년된 송아지 아니면 천천의 숫양, 만만의 기름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맏아들을 드린다해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8절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제물이 아닌 백성들의 삶을 원하십니다. 정의의 하나님을 본받아 정의를 행하는 삶입니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제물은 필요가 없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의를 행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삶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으로 제물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로 이어집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과거에 신앙이 좋다는 분들을 보면 자신만 신앙이 좋다고 교만하여 다른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말도 함부로 합니다. 자기 주장과 자기 영광을 위해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이것은 바른 신앙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9절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잠9: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습관과 형식이 됩니다. 그러자 바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불의한 재물과 가증한 에바가 있습니다. 거짓 저울추를 사용해서 사람들을 속이고 강포와 거짓으로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 결과가 13절 “그러므로 나도 너를 쳐서 병들게 하였으며 네 죄로 말미암아 너를 황폐하게 하였나니” 이들의 노력, 기대와 전혀 다른 피폐한 삶을 살아갑니다.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쌓아도 보존되지 못합니다. 씨를 뿌려도 추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진정한 만족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예법을 지킨다고 책망하십니다. 북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이 아합이며, 아합의 아버지가 오므리입니다. 악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남유다도 이들의 길을 걷고, 이들의 삶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무엇을 기억하며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늘 기억하며 사랑에 감사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섬김과 헌신이 은혜에 기초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제물이 아닌 정의를 행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매일 동행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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