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9절)
일곱 교회 중 에베소교회에 이어 오늘은 서머나교회와 버가모교회를 향한 편지입니다. 서머나는 지금의 튀르키예 이즈미르인데요, 당시에 ‘아시아의 영광’이라 불릴 정도로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서머나교회에 편지하시는 주님은 8절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입니다. 1:17-18절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그 교회에 가장 적합한 모습으로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서머나교회는 극심한 환난 가운데 있습니다. 죽음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그들을 향해 주님은 처음이며 마지막으로 영원부터 영원까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이 주님이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성도에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다시 살아납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가셨습니다.
서머나 교회를 향한 칭찬은 9절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하십니다.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 가운데 있습니다. 서머나 도시는 풍요로운데 성도들은 가난한 삶을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서머나의 풍요가 황제숭배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인들이 조직을 만들고 돈을 거둬 황제 숭배하는 일에 지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참여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물건을 매매하는 일에도 성도들은 왕따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환난과 가난이 기다리는 삶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그 길을 걷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궁핍한 성도들을 향해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하십니다. 현재 눈에 보이는 모습과 실상이 다르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보고 말하는 것과 주님이 보시는 것은 다릅니다. 실상은 부요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처음이며 마지막이 되신 주님은 일시적인 이 땅에서 풍요를 누리는 것을 부요하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사라질 것들입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보배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성도들이 실상은 부요한 자들입니다. 바울도 고후6: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지만 모든 것 되시는 주님을 소유한 자들로서 모든 것을 가진 자들입니다. 진정 부요한 자들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유대인들의 비방도 당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들 가운데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비방하는데 사탄의 무리처럼 공격합니다. 이 정도만으로도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쉽지 않은데 주님은 10절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라고 하십니다.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몇 사람이 옥에 던져집니다. 그 기간이 10일 이라고 합니다. 계시록에는 숫자들이 많이 나오는데 10일은 길지 않은 기간입니다. 환난이 있지만 짧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환난과 궁핍, 비방 거기다 옥에 던져지는 고난을 받는다면 이어지는 말씀은 구해주시겠다 혹은 대적을 물리쳐주시겠다는 내용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죽음의 길을 가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생명의 관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관의 의미는 “면류관과 같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렇습니다. 잠시 잠깐 이땅에 살겠다고 신앙을 저버리는 삶이 아닌, 죽더라도 믿음의 길을 걸으면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바로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께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11절 하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둘째 사망은 영원히 지옥에 들어가는 겁니다. 죽도록 충성할 때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성도는 이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917절)
버가모 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은 12절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입니다. 그런데 16절을 보면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검으로 싸우는 대상은 안타깝게도 버가모 성도들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칭찬하십니다. 버가모 교회가 있는 곳이 13절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입니다. 다른 지역보다 열광적인 황제 숭배의 중심지입니다. 그러니 박해도 극심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안디바’입니다. 함께 신앙 생활하던 교우가 로마의 칼에 의해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칼끝이 언제 자신을 향할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버가모 성도들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책망할 것이 있다 하십니다. 15절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2:6절에서 에베소교회는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는 말씀을 통해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버가모교회는 니골라 당의 행위에 동참하는 자들로 인해 책망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니골라 당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14절의 말씀을 보면 민수기22장에 나왔던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평지를 지나려하자 모압왕 발락이 두려움을 느끼고 이스라엘을 저주할 사람을 찾습니다. 그 사람이 발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도록 막으시고 오히려 축복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던 발락의 계획은 무산됩니다. 그런데 민25장으로 가면 이스라엘이 스스로 무너지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모압 여인들과 우상숭배하면서 음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모압 여인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초청했고 거기에 응한 사람들이 제사의식 중 하나로 음행을 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로 염병이 발생하여 24,000명의 백성들이 죽게 됩니다.
이런 일들이 버가모 지역에서도 발생한 것입니다. 우상의 신전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거기있는 여사제들과 음행을 하는데 그 중에 교회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회개하라고 하시며 회개하지 않으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검은 성도들을 향합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기고 승리하면 17절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라고 하십니다. 만나와 흰돌을 주십니다. 만나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던 하늘 양식입니다. 만나를 주시는 이유는 니골라 당에 참여하는 자들이 먹던 것이 14절 “우상의 제물”입니다. 그것 거부하면 하늘 양식으로 채워주십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 잔치를 누리게 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입장권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흰 돌입니다. 당시 공적 축제와 왕족 회의에 들어가려면 자기 이름이 새겨진 흰 돌이 입장권이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우리의 이름이 새겨진 흰 돌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성도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합시다. 궁핍 가운데 있지만 실상은 부요한 자입니다. 보배되신 예수 그리스도, 모든 것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것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런 성도들은 잠시 이 땅에 잘 살기 위해 주님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의 길을 걷습니다. 그 길이 실상은 영원한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당시 니골라 당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성도들을 유혹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함께 하자고 합니다. 이런 삶은 주님의 검이 우리를 향하는 삶입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오히려 믿음의 삶을 통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삶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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