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2절)
4장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성을 방문하셔서 한 여인을 만나주셨습니다. 여인을 통해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떠나 유대 갈릴리로 오시는데, 사마리아와 전혀 다른 반응입니다. 이들은 표적을 구합니다. 예수님을 그런 태도를 책망하시면서도 병들어 죽어가는 왕의 신하 아들을 말씀으로 고쳐주십니다.
오늘 말씀은 1절 “그 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어느 명절인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습니다. 양문은 양들이 지나다니는 문으로 제물로 바쳐질 양을 씻기 위해 사용되던 문입니다. ‘베데스다’의 의미는 “자비의 집”입니다. 그런데 그곳은 자비가 넘치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행각 다섯 개가 있는데, 그 안에 많은 병자들이 누워있습니다.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아마 곳곳에서 앓는 소리가 나고 절망이 깊은 장소였을 겁니다. 죽음의 냄새가 가득한 곳이 아니었을까요?
이 병자들이 모여 있는 이유는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4절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기가 막힐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연못의 물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물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립니다. 그러다 물이 움직이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요? 지옥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서로 먼저 들어가기 위해서 달려야 합니다. 누군가를 제쳐야 하고, 누군가는 밟고 지나가기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1등을 해야 치료가 됩니다. 한때 유행했던 말처럼 “1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시 절망입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은 정말 천사가 내려와서 물이 움직였을까요? 학자들에 따르면 이 연못에 가끔 온천수가 솟아 올라왔다고 합니다. 그것을 천사가 물을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했고, 또한 연못 물에 철분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간혹 치료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것이 미신같은 이야기로 이어진 겁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육신은 멀쩡하지만 죄의 영향력 아래 신음하며 살아갑니다. 헛된 소망을 붙잡고 서로 경쟁하며 달려갑니다. 이런 세상에 유일한 소망은 누구일까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
그곳에 38년 된 병자가 있습니다. 참 긴 시간입니다. 지금과 다른 당시 평균 수명을 생각해본다면 이 사람은 거의 평생을 질병의 짐을 지고 살았습니다. 이 연못에 얼마 동안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도 먼저 들어가지 못하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한마디로 완전한 절망입니다. 그런 병자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이 사람의 질병이 오래 된 줄 아시고 물으십니다. 6절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나 마나한 이야기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병자는 다른 대답을 합니다. 7절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대답 속에 세상에 대한 원망이 담겨있습니다. 내 곁에 힘 있고 발 빠른 사람들이 있다면 내가 1등으로 연못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데 그럴 수 없어서 답답하다는 겁니다. 어쩌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라도 곁에 머물면서 그런 도움을 주면 좋겠다는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이 병자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자기 앞에 있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겁니다. 바로 앞에서 죽어가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말씀으로 살려주신 분입니다. 죽을 자를 살리시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알지 못하니 엉뚱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을 처음보았기 때문이요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병자보다 이 시대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잘 알고 있는데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의 모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실 능력의 주님이신데, 우리는 그저 사소한 몇 가지만 해결할 분으로 믿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선포하십니다. 8절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참으로 당혹스런 말씀인데 병자는 순종합니다. 9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말씀의 능력입니다. 이 기적이 특이한 것은 보통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실 때 “네가 낫고자하느냐”라고 물으시고 믿음의 반응을 보이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혹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시며 치유하시는데 이 사람은 그냥 치유하십니다. 병자의 믿음과 상관없이 예수님은 치유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합니다.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은 육신의 질병의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적인 치유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신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문제를 제기합니다. 안식일인데 병을 고치는 것도 문제요, 병자가 치유되었다고 자기 자리를 들고 가는 것도 문제라는 겁니다. 참 냉혹한 사람들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이들의 이웃이었을 겁니다. 얼마나 고통스런 삶을 살았는지 너무 잘 압니다. 하지만 병자의 치유를 기뻐하고 감사하기보다 안식일 규정으로 그를 정죄하고 있습니다. 사실 안식일은 안식을 누리는 날입니다. 병자에게 안식은 질병의 짐을 벗는 겁니다. 드디어 참된 안식을 누린 겁니다. 그런데 정죄합니다.
본문이 강조하려는 것이 이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들보다 더 심각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육신은 멀쩡한데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를 망각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진짜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이런 유대인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지적에 당황한 병자는 누가 자리를 들고 가라고 했는지 대답을 못합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고, 자신이 치유되어 기뻐하는 사이 예수님이 사라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시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4절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육신의 질병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외칩니다. 15절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예수님만이 베데스다 연못과 같은 세상에서 유일한 소망이 되심을 선포합니다.
어디에 소망을 두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소망이 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누리고 있다면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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