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2절)
요한의 눈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보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등장하는 이유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에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그곳에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대리 통치자로 다스리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유혹이 넘어가 죄가 들어오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이 타락합니다. 그런 세상은 계시록에서 강조했던 것처럼 큰 성 바벨론이 중심되어 하나님을 거역하고 도전했습니다. 그런 악의 세력을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1절 하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합니다. 바다는 짐승이 올라오는 악의 장소였습니다. 모든 것을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5절 말씀처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새롭게 된 곳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렇다면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하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요한은 바로 이어서 2절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봅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것을 바로 이어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와 성도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표현하냐면? 앞에서도 설명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큰 성 바벨론이 통치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성도는 믿음의 싸움을 싸웠습니다. 그런데 이 싸움은 결과를 두고 봐야 하는 싸움이 아니라, 이미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승리한 싸움을 싸운다고 말씀합니다. 그런 성도들을 고전3:16절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합니다.
즉 성도는 큰 성 바벨론의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지상의 모든 대적이 사라지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2절 하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신부로서 가장 중요한 모습은 “거룩함”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본 요한은 이제 보좌에서 나는 음성을 듣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성도들이 누리는 축복과 영광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3절은 “함께”라는 단어가 세 번 반복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걸을 때 하나님께서 성막에 임하셔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 같이 함께 하십니다. 3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만으로도 영광인데 7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합니다. “내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가장 존귀한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아들로 만드셨다는 겁니다. 왕이신 하나님처럼 만물을 다스리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죄로 인해 아들됨과 특권을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아들이기에 아버지되신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7절)
그때 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합니다.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그리고 사망과 애통,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것들이 원래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죄의 열매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모든 죄의 근원을 제거하셨기에 이제 사망이 왕노릇하지 못합니다. 애통과 아픔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계획하셨던 세상이 이루어집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은 그 일을 이루어 오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구원과 회복을 위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다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5-6절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이니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6절도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보좌에 앉으셔서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 되셔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절)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셨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십니다.
이를 위해 7절은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8절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둘째 사망”은 첫째 사망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첫째 사망은 우리 모두가 죽는 육체적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둘째 사망이 있습니다. 영원한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자들이 둘째 사망에 들어가게 되는가? 목록이 8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 것인가? 그 당시 상황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로마의 박해를 아래 두려워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순교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두려움이 크면 결국 하나님을 버리고 황제를 숭배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임을 포기하고 로마의 신부가 됩니다. 그러면 결과는 둘째 사망이지요.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담대하고 당당하게 믿음을 지킨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이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아들인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입니다. 즉 순교하지 않고 이 땅에서 몇 년 혹은 몇 십년 더 살겠다고 믿음을 저버리지 말고 당당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이 시대 성도인 우리가 어디에 소망을 두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아갑니다. 거룩하고 순결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완전히 이루실 것을 확신하면서 두려워 하지 않고 믿음으로 승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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