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3절)
여섯 번째 나팔 재앙 이후 아직 일곱 번째 나팔이 울리지 않은 상황입니다. 일곱 번째 나팔은 11:15절에서 울립니다. 그 사이에 하나님의 진노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 세상을 향해(9:20-21절) 교회와 성도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어제 본문은 “작은 두루마리”를 통해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두 증인” 이야기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1-2절은 교회의 두 가지 측면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입니다. 그래서 갈대를 주시며 1절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라고 합니다. 성전 측량은 에스겔 40-48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측량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전을 보호하고 계심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을 보호하십니다. 특별히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예배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는 자들을 보호하십니다.
그런데 교회의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2절입니다.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고 합니다. 교회가 이방인들에 의해 짓밟힙니다. 핍박을 당합니다. 그 기간이 “마흔두 달”입니다. 그런데 이 기간이 3절에 나오는 “천이백육십 일”과 같습니다. 또 이 기간을 다른 곳에서는 “삼년 반”이라고도 하고 “한때 두때 반때”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같은 기간을 왜 이렇게 다르게 표현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처럼 고난의 기간은 짧은 숫자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승리와 사명의 시간은 길게 표현합니다. 즉 고난의 짧고 영광은 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낙심하거나 흔들리지 말고 승리하는 겁니다.
이처럼 교회는 하나님의 보호도 받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의 핍박도 받고 고난도 당합니다. 이때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바로 3절에 나오는 “두 증인”의 사명입니다. 이단들은 여기 나오는 두 증인이 자신들의 교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두 증인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4절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라고 합니다. 두 증인을 “두 촛대”라고 합니다. 1:20절에서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두 증인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교회를 “두 감람나무”라고 한 것은 슥4장을 배경으로 하는데 총독(왕)인 스룹바벨과 제사장인 여호수아를 가리킵니다. 이는 교회가 왕과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한 감람나무가 금 촛대에 기름을 공급해서 불이 타오르게 하는데 이처럼 증인의 사명을 감당할 때 성령 충만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며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세상을 향해 교회와 성도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12절)
두 증인에게 하나님은 능력을 주십니다. 이들을 해하고자 하면 입에서 불이 나와 삼키게 하십니다. 이들은 엘리야의 권능으로 하늘을 닫아 비가 오지 못하게 할 수도, 모세가 했던 것처럼 물을 피로 변하게 합니다. 이렇게 능력으로 복음이 증거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복음 전파가 계속되지 않습니다.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과 두 증인이 싸움을 하게 되고 안타깝게도 죽임을 당합니다. 그들의 시체가 길에 버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두 증인이 죽은 장소를 8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합니다. 두 증인이 죽임을 당한 곳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입니다. 이것이 말하는 것은 두 증인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 세상과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것과 같이 10절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고 하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은 두 증인이 복음을 전하므로 자신들을 괴롭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증인의 죽음을 기뻐하며 예물을 보내기까지 합니다. 세상의 무지를 봅니다. 무엇이 생명인지, 무엇이 진리의 길인지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 전파가 중요합니다.
여기까지 보면 두 증인을 죽인 세상이 승리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죽임당한 두 증인에게 생기를 넣어주십니다. 그러자 11절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다시 살아납니다. 예수님처럼 부활합니다. 그리고 12절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처럼, 두 증인도 다시 살아나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들 역시 예수님과 함께 온 세상을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왕노릇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 시대 성도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말씀해 줍니다. 예수님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면 십자가 이후 승리와 영광을 주십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십자가요 후에 영광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없는 영광을 원합니다. 고난 없는 승리를 원합니다. 아닙니다. 반드시 십자가 뒤에 영광입니다. 지금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다면 주어질 영광을 바라보며 인내해야 합니다.
또한 고난 속에서도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갑시다. 땅에 거하면서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늘 소망을 전하는 복된 삶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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