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3절)
역대상을 통해서 보면 다윗이 통일왕국의 왕이 된 후 처음으로 한 일이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일입니다. 이 내용은 삼하 6장에도 나오는데, 차이점은 사무엘하 내용은 다윗이 주도적으로 궤 옮기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다윗이 지도자들과 의논하고 백성들의 동의를 얻어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온 회중”(1,4), 온 땅(2), 온 이스라엘(5,6)이 반복됩니다. 왕이지만 명령이 아닌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중요한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2절 앞부분을 새번역으로 보면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이 좋게 여기고 우리 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입니다. 다윗은 어떤 일을 진행할 때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그리고 백성들이 좋게 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이 두 가지는 기억해야 할 중요한 요소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원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멈추어야 합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뜻일지라도 사람들과의 의논과 동의를 얻어 진행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물론 진리에 대해서는 타협과 양보가 있을 수 없지만, 많은 문제들은 진리가 아닌 문제를 일방적으로 진행할 때 일어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이유는 3절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묻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어지는 내용에서 지금 하나님의 궤가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삼상 4-7장을 보면 길게 하나님의 법궤가 어떻게 블레셋 땅으로 가게 되었고, 또한 어떤 과정으로 이스라엘로 돌아와 기럇여야림에 오게 되었는지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법궤 사건이 이스라엘 신앙의 현주소를 알려줍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을 상징하는 법궤마저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이스라엘의 잘못된 신앙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렇게 법궤는 기럇여아림 아비다납의 집에 20년 동안 있게 됩니다(삼상7:2절). 문제는 사울이 법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것을 다윗은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합니다. 대상10:14절은 사울의 죽음과 실패를 이야기하면서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고 합니다. 사울의 실패 원인은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왕으로 통치를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세워주셨지만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따라 통치한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결과는 실패입니다. 비록 작은 일을 하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면 성공적인 인생입니다. 사울과 달리 다윗은 하나님께 묻고자 합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자신이 왕이지만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묻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14절)
궤 옮기기가 시작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은 5절 “다윗이 …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고자 할새”, 6절 “다윗이 … 여호와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려 하니”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옮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함부로 만져서도 아무렇게나 옮겨서도 안 되고 반드시 레위 자손이 어깨에 메는 방식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런데 7절에 가면 이렇게 바뀝니다.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그리고 수레에 실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해서 웃사라는 사람이 죽게 됩니다.
수레에 싣고 가는데 소들이 뜁니다. 법궤가 넘어지려 합니다. 수레를 몰던 웃사가 자동적으로 손을 들어 궤를 붙잡았습니다. 궤를 넘어지지 않게하려는 좋은 행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웃사를 치시고 죽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행하는 일이어도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재앙의 시작은 수레에 궤를 싣고 옮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메어 옮겨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수레에 옮겼을까요? 쉽게 설명하는 우리도 말씀을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다를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이유는 실용성과 편리함 때문입니다. 기럇여아림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도보로 약 14km정도의 거리로 3-4시간을 이동해야 합니다. 궤를 어깨에 메고 가는데는 보통 수고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실용적으로 수레가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편리하게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또 하나의 이유는 블레셋에서 이스라엘로 법궤가 돌아올 때 블레셋 사람들이 암소 두 마리가 모는 새 수레에 법궤를 실어 보냈습니다. 지금 방식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합니다. 즉 다윗과 이스라엘이 좋은 일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기준이 섞여 있습니다. 자신들의 편리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변경해서 적용합니다. 문제는 시작하고 있는 다윗 왕국에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다윗 역시 사울의 길을 가지 않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깨닫게 하십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라도.
12절 “그 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르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뜻대로 법궤가 함께 한다면 그것을 복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예루살렘으로 옮겨가지 못한 법궤는 오벳에돔의 집에 머뭅니다. 그 결과는 14절 하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진노가 아닌 복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도 삶의 우선순위가 하나님과의 관계, 즉 말씀과 기도가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된 삶을 살아갑시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크심과 두려우심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준을 따라 행합시다.
[출처] 역대상13:1-14절/궤를 옮겨오자(25.06.11)|작성자 늘봄교회
역대상을 통해서 보면 다윗이 통일왕국의 왕이 된 후 처음으로 한 일이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일입니다. 이 내용은 삼하 6장에도 나오는데, 차이점은 사무엘하 내용은 다윗이 주도적으로 궤 옮기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다윗이 지도자들과 의논하고 백성들의 동의를 얻어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온 회중”(1,4), 온 땅(2), 온 이스라엘(5,6)이 반복됩니다. 왕이지만 명령이 아닌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중요한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2절 앞부분을 새번역으로 보면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이 좋게 여기고 우리 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입니다. 다윗은 어떤 일을 진행할 때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그리고 백성들이 좋게 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이 두 가지는 기억해야 할 중요한 요소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원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멈추어야 합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뜻일지라도 사람들과의 의논과 동의를 얻어 진행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물론 진리에 대해서는 타협과 양보가 있을 수 없지만, 많은 문제들은 진리가 아닌 문제를 일방적으로 진행할 때 일어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이유는 3절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묻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어지는 내용에서 지금 하나님의 궤가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삼상 4-7장을 보면 길게 하나님의 법궤가 어떻게 블레셋 땅으로 가게 되었고, 또한 어떤 과정으로 이스라엘로 돌아와 기럇여야림에 오게 되었는지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법궤 사건이 이스라엘 신앙의 현주소를 알려줍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을 상징하는 법궤마저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이스라엘의 잘못된 신앙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렇게 법궤는 기럇여아림 아비다납의 집에 20년 동안 있게 됩니다(삼상7:2절). 문제는 사울이 법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것을 다윗은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합니다. 대상10:14절은 사울의 죽음과 실패를 이야기하면서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고 합니다. 사울의 실패 원인은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왕으로 통치를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세워주셨지만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따라 통치한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결과는 실패입니다. 비록 작은 일을 하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면 성공적인 인생입니다. 사울과 달리 다윗은 하나님께 묻고자 합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자신이 왕이지만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묻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14절)
궤 옮기기가 시작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은 5절 “다윗이 …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고자 할새”, 6절 “다윗이 … 여호와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려 하니”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옮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함부로 만져서도 아무렇게나 옮겨서도 안 되고 반드시 레위 자손이 어깨에 메는 방식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런데 7절에 가면 이렇게 바뀝니다.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그리고 수레에 실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해서 웃사라는 사람이 죽게 됩니다.
수레에 싣고 가는데 소들이 뜁니다. 법궤가 넘어지려 합니다. 수레를 몰던 웃사가 자동적으로 손을 들어 궤를 붙잡았습니다. 궤를 넘어지지 않게하려는 좋은 행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웃사를 치시고 죽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행하는 일이어도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재앙의 시작은 수레에 궤를 싣고 옮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메어 옮겨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수레에 옮겼을까요? 쉽게 설명하는 우리도 말씀을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다를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이유는 실용성과 편리함 때문입니다. 기럇여아림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도보로 약 14km정도의 거리로 3-4시간을 이동해야 합니다. 궤를 어깨에 메고 가는데는 보통 수고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실용적으로 수레가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편리하게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또 하나의 이유는 블레셋에서 이스라엘로 법궤가 돌아올 때 블레셋 사람들이 암소 두 마리가 모는 새 수레에 법궤를 실어 보냈습니다. 지금 방식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합니다. 즉 다윗과 이스라엘이 좋은 일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기준이 섞여 있습니다. 자신들의 편리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변경해서 적용합니다. 문제는 시작하고 있는 다윗 왕국에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다윗 역시 사울의 길을 가지 않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깨닫게 하십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라도.
12절 “그 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르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뜻대로 법궤가 함께 한다면 그것을 복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예루살렘으로 옮겨가지 못한 법궤는 오벳에돔의 집에 머뭅니다. 그 결과는 14절 하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진노가 아닌 복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도 삶의 우선순위가 하나님과의 관계, 즉 말씀과 기도가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된 삶을 살아갑시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크심과 두려우심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준을 따라 행합시다.
[출처] 역대상13:1-14절/궤를 옮겨오자(25.06.11)|작성자 늘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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